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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2건
2013. 1. 1. 23:19

 

 

1. 영화 제목이 <라 모르(la mort)> 죽음이 아니라 <아무르(Amour)> 사랑인 이유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리고 죽음 또한 누구나가 맞이해야하는 순간이다. 영화 <아무르>는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이에 대한 영화다. 음악교사로 평생을 함께 한 안느와 조르주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고오 그림자는 그들의 일상에 짙고 검게 드리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는 과정에 대해 감정을 덧씌우지 않고 깊이 있게 바라본다. 인간이 지니는 고결함을 지키고자 안느는 최대한 애를 쓰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그것은 매일 무너진다. 무너지는 순간은 얼굴 근육의 변화, 근육의 굳음과 어눌한 말투 등 몸으로 고스란히 표현된다. 안느가 그렇게 몸으로 죽음의 과정을 말한다면 조르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의 심리를 통해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안느를 곁에서 간호하는 그를 보며 주변인들은 감탄한다. 하지만 조르주에게는 그러한 말들은 무의미할뿐이다. 그저 그들이 침묵하고, 무관심하기를 바랄뿐이다. 안느의 죽음을 직면하는 자신의 태도는 감탄할 무엇도 아니고, 안타까운 무엇도 아닌 현실이고 두려움인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이가 점점 죽어간다는 것은 그리운 버거움이고, 감당하기 힘든 상실인 것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이 과정을 장 루이 트래티냥과 에마뉘엘 리바를 통해 물기를 빼고 '고스란히' 전달한다. 물기 빠진 장면들이지만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영화 제목이 <라 모르(la mort)>, 즉 죽음이 아니라 <아무르(Amour)>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죽음을 향해간다. 함께 식사를 하다 안느는 순간 정신을 놓고, 조르주는 안느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안느는 조르주에게 부탁한다. 아니 약속하라고 한다. "앞으로는 절대 병원으로 데려가지 말라고." 안느가 악화될 수록 딸 에바는 엄마를 이대로 둘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 하지만 조르주는 세상의 규범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안느와 함께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결국 조르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은 쉬이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안느를 떠나보낸다. 그 방식에 대해 감독은 깊이 있게 고민했고, 그들만의 규범에 대해 정당성을 덧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2. 영화를 보면서 엄마와 나에 대해 생각하다.

영화 <아무르>의 힘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이것을 단순히 영화 속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게 한다는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지듯이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구나 늙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대해 관객들은 한 번즘 생각하게 된다. 아직 '죽음'까지는 생각이 다다르지 않더라도 늙음, 나이듦, 노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났고, 나의 노후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엄마가 아팠다. 아니 지금도 아픈 상태이다. 평생 사용한 근육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풀어준 적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사용하다보니 결국 탈이 났다. 오른손잡이인 엄마는 오른손이 고장나버려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혼자서 옷을 입고 벗을 수 없고, 밥을 먹을 때도 왼손으로 어설프게 밥을 뜨고 힘들게 반찬을 집는다. 엄마대신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엄마의 거동을 도우면서 속상했다. 그리고 순간순간 짜증이 치고 올라왔다. 속상함과 달리 올라오는 이 짜증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같이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기존 상태를 기억하고 엄마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몸은 마음과 달리 움직인다. 내곁에 있는 이가 내가 사랑하는 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면, 그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성질을 잊어가며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짜증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감정의 또다른 표현 방식일까? (다시 생각해보니 오바스러운 해석같다. 정확히 말하면 짜증의 8할은 엄마가 아픈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가부장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나의 노후는? 나는 가난하다. 그리고 안나처럼 배우자가 없을 수도 있다. 가난한 내가 나이 들고 늙어 내 스스로를 돌보지못하는 순간이 올 때 나는 어떡하지? 평생 학생을 가르치며 매달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 연금 등으로 여든이 넘어도 사회경제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조르주와 안나는 두 명의 간호사를 고용할 수 있고, 대신 장을 봐주고 집안 청소를 맡아하는 가정관리사를 둘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영화에 제대로 몰입하기 어려웠다.

 

3. 예술을 사유한다는 것에 대하여.

영화 속 안느와 조르주의 모습을 보면서 '참 우아하다.'라고 생각했다. 전직 음악교사였던 그들은 피아노 독주회도 가고, 새로 발간한 소설을 함께 읽고, 세계정세가 실린 신문기사를 읽어 주고, 피아노 연주를 하고, 오디오로 클래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는 그림들이 곳곳에 걸려 있고, 거실엔 책들로 가득하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그들은 우아한 삶을 살고 있었다. 품격과 격식, 격조라는 단어가 그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한 조르주와 안느를 보면서 '그들의 우아한 삶은 어디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일까?' 질문하게 되었다. 프랑스라는 국적에서? 혹은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에서? 아니면 경제적 지위에서?  이 모든 것들의 조합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감동과 동시에 예술을 사유할 수 있는 이들이 별도로 있는 것같다는 박탈감이 들었다. 가난한 이도 예술을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사유가 아닌 소비가 되어 버린 지금 가난한 이들은 예술을 향유할 수 없다. 무대에 위치한 카메라가 객석에 앉아 있는 안느와 조르주를 담는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4. 결론.

- '영화'는 자신의 위치에서 보고 해석하게 되는 것 같다.

- 2, 3번의 두려움과 박탈감을 떨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운동(movement)해야한다.

  : 그런데 요즘엔 계속 기운이 빠진다.

2012. 12. 20. 21:43

 

12월 19일이 지났다. 심란할듯하여 일부러 대선 방송을 보지 않았다. 대신 극장에 다녀왔다. <레미제라블>을 봤다. 친구들과 함께 24일날 보기로 약속해놓고 결국 참지 못하고 봤다. 24일에도 다시 볼 것이다. 우선 이 영화에 대한 초벌감상을 해보려고 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에 아주 충실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뮤지컬을 구현한다는 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기대하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관객이 기대하는 '무언가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영화 평론가 황진미씨는 '뮤지컬이 보여주지 못하는 스펙터클까지! 최고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스펙터클을 어느 부분에서 느꼈던 것일까?

 

영화를 통해 뮤지컬이 구현되는 장점 중 하나는 무대에서 쉽게 보고 느낄 수 없는 배우들의 생생한 표정일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카메라를 배우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면서 표정의 생동감은 전달한다. 하지만 뮤지컬 영화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기준을 두고, 거기에 영화적 요소를 결합하는 장르이다. 그랬을때 '뮤지컬'이 가지는 기본조건을 관객들은 당연히 전제하고 극장을 찾는다. 관객과 배우가 닫힌 공간에 함께 있는 장르인 연극은 그 시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 그로 인해 느껴지는 긴장감이 묘미이다. 뮤지컬은 같은 시공간에 관객과 배우가 존재하는 것과 더불어 음악적 역동이 더해져 그 긴장감의 전달은 더욱 극대화된다. 특히 <레미제라블>과 같은 대형 뮤지컬의 역동과 웅장함에 대한 관객의 기대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영화이지만 뮤지컬영화라는 두 버전이 결합된 창조물에 대해 관객들은 두 버전에 대한 기대를 동등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레미제라블>은 관객의 그 기대에 미치지못하고 대체로 평이하다는 느낌을 전한다. 재능은 가지고 있지만 끼를 제멋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모범생'같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답답했다. 왜 답답했을까? 그 이유는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관객의 기대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제대로 본 뮤지컬영화 중 하나는 <사운드오브뮤직>이다. <사운드오브뮤직>과 <레미제라블>을 비교했을 때 두 영화의 확연한 차이는 화면에 무엇을 얼만큼 담았는가이다. 즉 영화의 배경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인가이다. <사운드오브뮤직>의 경우 영화라는 장르를 적극 활용하여 카메라는 자연이라는 광활한 배경을 멀리서 잡고, 그 안에 인물을 담고, 음악을 덧씌운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뮤지컬 무대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제한적 배경안에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하였다. 특히 시민군과 공권력의 대치장면은 무대를 그대로 반복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배경이 세트와 컴퓨터그래픽으로 구성되어 이 또한 무대에 국한된 연출로, 관객은 영화적 스펙타클을 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빅토르위고의 원작인 <레미제라블>에 대해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딱 은촛대까지의 수토리가 전부였다. 영화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처음과 끝을 접하였다. 영화를 함께 본 이는 2시간 30분 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자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이 또한 5권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을 영화하면서 부딪히는 한계일 것이다. 인물들이 '도구화'되는 순간들이 틈틈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자베르의 고집스러운 자기 신념에 대한 실천과 장발장의 끊임없는 질문-Who am I?-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장발장의 죽음과 동시에 영화 속에서 흐르는 노래가 주님을 언급하다가 민중으로 전환되는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소설이라는 원작의 무게와 4대 뮤지컬 중 하나라는 작품의 그림자 속에서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혔지만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한 작품이었다.

 

+ 제대로 본 뮤지컬도 없으면서 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주저리주저리 쓴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긴하지만 말그대로 감상이니까. 제멋대로 내 공간이니까. ㅎ

 

+ 앤헤서웨이와 에포닌 역의 사만다 뱅크스 좋았다.

 

+ 만약에 영화를 메가박스 센트럴에서 보지 않고 다른 곳에서 보았으면 영화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메가박스 센트럴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집 앞이라는 장점으로 찾았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를 했다. 스크린은 조막만하고, 조막만한 스크린은 또 윗부분이 잘리고, 음향은 전혀 받쳐주지않고 의자만 징그럽게 많은 메가박스 센트럴에서는 앞으로 가급적이면 영화를 보지않을 것이다. ㅠ <레미제라블>을 메가박스 센트럴에서 보다니 내가 멍충이다. 여튼 좋은 극장에서 다시 한 번 더 봐야겠다.

 

+ 그리고 관객님들하 영화볼 때는 제발 영화에만 집중해주면 안되겠니? 팝콘 먹느라 분잡하고, 이에 낀 팝콘 빼느라 쩝쩝 산만하고, 틈틈히 핸드폰 메시지 체크하고, 앞좌석 뻥뻥 차주시면서 그렇게 영화를 봐야겠니? 제발 안그러면 안되겠니? 엉.엉.엉. 

2012. 12. 18. 19:24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을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 중에서, 그가 <몰락의 에티카>에서 뽑아 다듬어 옮기다

2012. 12. 13. 00:18

 

"<26년> 어때?"라고 친구에게 물었을 때 친구는 작은 실망을 표현했지만 꼭 봤으면 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일요일 아침 한파를 뚫고 극장으로 갔다. 영화가 김아중과 류승범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가 엎어지고, 이승환의 제작 투자 미담과 1만 5천명의 두레제작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기본적 정보만 가지고, 강풀 원작의 웹툰 <26년>을 보지않은 채 극장에 갔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영화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않았다. 개봉시기를 굳이 대선 직전에 잡아 급하게 만들어 영화 완성도가 어떻고 저떻고 떠들고 싶지 않았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봤던 중학생들은 욕을 하면서 잃어버린 핸드폰을 컴컴한 극장안에서 찾고 있었다. 5-6명의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 일요일 아침, 이 영화를 보며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1980년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당시 '화려한 휴가'를 지시했던 그 사람 또한 존재하는 지금 <26년>은 그들에게 어떤 영화 였을까? 궁금했다. 씨네21이 김혜리 기자는 <26년> 20자 평에 대해 '관객이 빈 곳을 채워가며 마음속에서 완성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그 말에 적극 공감한다. 그리고 '<26년>과 <남영동 1985>는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말에도 동의한다. <26년>은 비극을 보며 마음의 정화를 가지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시간을 기억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26년>을 보고, 웹툰 <26년>을 보았다. 웹툰을 연재하면서 강풀은 본인이 왜 이 웹툰을 쓰는지에 대한 변-그동안의 연재에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을 하였고, 광주에 대해 정리했던 웹툰을 Daum에 부탁하여 다시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는 웹툰 <26년>을 통해 많은 이들이 광주를 기억하고, 당시의 광주를 몰랐던 이들에게 광주를 알리기 위해 '최대한 재미있게' 웹툰을 연재하려고 애를 썼다. 웹툰을 보면서 그의 그러한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영화 <26년>에서 또한 그런 애씀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 감독과 배우, 제작진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함께 한 1만 5천명의 보통(?) 사람들의 애씀의 흔적이 영화 마지막까지 보였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오늘 아침', 새벽의 기운이 어스러이 느껴지는 장면에서 광화문 대로를 지나는 검은 세단을 보면서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제각각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아침이었다.

 

대선 후보자 토론회에서 이정희의 활약에 누군가는 속 시원해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절대 그 사람이 당선되면 안되기에 반드시 투표장에 가야한다며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제발 내게 그 사람이 아닌 다른 그 사람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한 가지만 제발 알려달라는 사람들도 있다. 제각각 저마다의 상황에서 이번 대선을 바라보고 있고,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침 출근길, 정말 그 사람이 당선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선택해야만하는 것인가? 딱 일주일 전인 오늘, 그럴 수밖에 구도가 개탄스럽기도했다. 하지만 어찌보면 19일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 날일 수도 있다. 19일이 우리의 삶을 절대 바꿔놓지는 않을 것이다. 19일이 운명의 날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19일 이후와 이전의 우리 삶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신중하게 답하고 그 답에 대한 실천을 다짐하는 밤이 되야한다.

 

[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남영동 1985’와 ‘26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032152405&code=990100


[올드독의 영화노트] <26년> <남영동1985> 작은 스위치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2093

 

[2030 콘서트] 정권교체 실패하면 이민가겠다는 지식인들게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 학생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212122143505&code=990100


 

후손들에게

브레히트

 

1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없는 이마는

무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웃는 사람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을 따름이다.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곧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한 침묵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나 다름없으니,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저기 천천히 길을 건너가는 사람은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이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물론, 나는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나의 행운이 다하면, 나도 그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셔라! 네가 그럴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느냐?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무엇이 현명한 것인지 씌어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기어들지 말고 덧없는 세월을

두려움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없이 지내고

악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2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폭동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로 와서

그들과 함께 나는 분노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눕고

되는대로 사랑을 하고

참을성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언어는 살륙자에게 나를 드러나게 하였다.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더욱 편안하게 살았고, 그러기를 나도 바랬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너무 약했다. 목표는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비록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보였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3

우리가 잠겨 버린 밀물로부터

떠올라오게 될 너희들은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생각해다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우리는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었지만

우리 스스로가 친절하지 못했단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정도까지 되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

(1934/38년)

2012. 12. 2. 15:10

 

 

 

 

 

사람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심상의 풍경이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해변이다.

<아녜스의 해변> 중

'나의 경우 그것은 바람이 부는 언덕이다.'

 

<아녜스의 해변>을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아녜스 바르다 그녀는 '生의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한 편의 영화로 그녀의 자화상을 그린 사람. 그녀는 붓대신 카메라를 들었고 필름에 그녀, 그녀가 만나온 사람들, 그녀의 기억, 그녀의 철학을 위트있고 솔직하게 담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벼운 生, 가볍기에 자유로운 生, 자유롭기에 솔직한 生. 그렇게 영화 속에는 80생을 살아온 80개의 아녜스 바르다가 있었다.

그리고 영화 <아녜스의 해변>은 아녜스 바르다와 그녀가 지켜본 사람들,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 관계를 통해 얻은 '행복'을 말하고 있었다. 아녜스 바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백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채우고, 이어가고 그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生의 에너지가 놀라웠다.

 

+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조건에 대해 질투를 했다. 그녀를 동경하면서 동시에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내 생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조건에 대한 질투'는 확실히 못난 방식이다. 어떻게든 나만의 방식으로 무엇이든 생산할 수 있도록.

(20121125)

2012. 11. 28. 14:21

 

 

첫 번째 <百의 그림자>는 누군가가 내게 여행 보낸 것이었다.

내게 여행을 온 첫 번째 <百의 그림자>를 여행 보낸 이에게 돌려보내기 전 다시 읽었다.

 

두 번째 <百의 그림자>는 부산의 어느 극장앞에서 만났다.

두 번째 <百의 그림자>를 부산에서 온 이에게 여행을 보냈다.

두 번째 <百의 그림자>를 부산에서 온 이에게 보내기 전 다시 읽었다.

 

세 번째 <百의 그림자>는 지금 군산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百의 그림자>를 군산으로 보내기 전 다시 읽었다.

 

무재씨와 은교씨가 서울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같은,

무재씨와 은교씨처럼 나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세 번째 <百의 그림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네 번째 <百의 그림자>를 기다린다.

(20121127)

 

+ 세 번째 <百의 그림자>를 보내면서 엽서 한 장을 적었다. 그 엽서 속 두 사람이 <百의 그림자>의 무재씨와 은교씨를 닮았다. :)

2012. 11. 12. 01:17

 

 

* <서칭 포 슈가맨>을 보실 분들은 읽지마셔요!

 

써야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있던 그 순간을 흘러보내고 싶지 않았다.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을 보고 사람들과 함께 한 점심시간엔 자연스럽게 영화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먼지가 <서칭 포 슈가맨>에 대해서 말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않았던 미국의 가수 로드리게즈, 우연히 그의 노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흘러가 엄청난 인기를 끈다. 당사자 로드리게즈는 그 사실을 몰랐고, 그의 노래에 열광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많은 사람들 또한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영화는 그렇게 모두가 몰랐던, 본인도 몰랐던 '서칭 포 로드리게즈'에 관한 영화라고 먼지는 설명한다. 그리고 먼지는 영화 중반부터 놀랄만한 반전과 감동이 펼쳐진다며 영화에 대한 기대를 마구 뿜어내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먼저 이 영화를 본 나은은 "이 사실도 모르고 보면 더 좋았을거야."라고 말하면서 그저 아무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서칭 포 슈가맨>은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가 명확하게 다른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반은 무대위에서 노래를 하다가 권총자살을 한, 혹은 분신자살을 했다는 소문만 가득한  전설의 가수 로드리게즈의 죽음을 뒤쫓는다. 그는 한마디로 수수께기인 것이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로드리게즈와 관련된 단서들,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영화 전반은 그렇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미스터리 다큐멘터리로 구성된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철썩같이 믿고 그의 '죽음'을 추적하던 과정 중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죽은줄로만 알았던 로드리게즈는 죽지않았고, 그는 40여년동안 디트로이트에 한집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로드리게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린 후 영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화가 되어 관객에게 다가간다.

 

로드리게즈를 찾은 이들은 로드리게즈에게 그의 노래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밥딜런의 노래보다 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 노래를 듣지 않고 청년기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로드리게즈를 남아프카공화국으로 초청하고 무대를 마련한다. 한순간에 인생이 바뀐 것일까? 고작 6장의 앨범을 팔았다. 그런데 대서양을 건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그의 앨범은 50만장이 넘게 팔리고 그는 국민가수로 칭송되고 있었다. 하지만 로드리게즈에게 그것은 중요하지않았다. 내가 무엇을 해냈다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그것을 인식조차하지 않았다. 로드리게즈는 '사실'을 덤덤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본인이 국민가수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않았다. 디트로이트에서 40년 넘게 거주하면서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그에게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제공되었다는 것을 그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는 시간의 순서대로, 그가 걸어가는 방향대로 삶이 흘러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민가수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가 뿌리박고 살아온 생이 무엇인지 잘아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자세인 것이었다. 로드리게즈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어, 살아있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가 만든 노래가 흘러나올때마다 카메라는 한 방향으로 구부정하게 느릿하게 걸어가는 로드리게즈의 걸음과 같은 속도로 나란히 걸어나간다. 그 흐름이 아마도 로드리게즈가 살아온 삶의 흐름을 말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서칭 포 슈가맨>의 감동은 바로 사람, 로드리게즈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사실의 반전이 아니라 그가 생에서 품어온 내공에서 오는 것이었다.

 

수수께끼는 그쪽으로 끌린다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한다.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그는 수수께끼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끌렸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위해 누군가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수수께끼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에 대해 성실히 임하는 '사람' 로드리게즈였다. 그렇기에 그는 세상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하지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로드리게즈에게 "왜 음악을 그만두었나?"라고 물었을 때 로드리게즈는 "더이상 잘 할 자신이 없기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한 이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고 답한 그는 지금의 생을 택한 것이다. 그의 선택에 따라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고자하는 이들에 의해 그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고, 노래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받게 된다. 그는 그 무대를 선택한다. 그리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 무대를 감사해한다. 이것이 로드리게즈가 겪은 사실이고 생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다시 몇 년이 흐른 뒤 영화로 만들어진다. 극장을 나오면서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이후의 로드리게즈의 삶은 또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궁금해졌다.(-_-;) 어쩌면 그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불쑥 카메라가 그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들기를 요구한 것은 아닐까? 나 또한 불쑥 그의 삶을 들여다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혼란이 찾아왔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그의 노래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조심스럽게 감사해하며, 그가 세상에 내놓지 않은 노트 속 창작물을 가끔 열어보며 노래하고 노동하고 그렇게 일상을 건강하게 보내기를 바란다. 이 밤 그에게 안부를 전한다. "땡큐! 로드리게즈 아저씨, 건강히 지내셔요." 

 

 

 

 

+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로드리게즈의 'cause'라는 노래가 가장 인상깊었다. 반복해서 듣는 중이다. 그리고 영화 속 장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실제 공연장면을 찍은 홈비디오에서 관중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띠,띠디리,띠리리 베이스 소리가 반복해서 들리다 "I wonder"라고 그의 음성이 공연장에 가득 채워지고 동시에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나올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ㅠ

2012. 11. 7. 20:40




민우회 재정사업을 무사히 치룬 우리가 우리에게 평일 오전 영화단체 관람을 선물했다. <MB의 추억>을 볼까, <늑대소년>을 볼까, 저마다의 취향과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는 수두룩했지만 맘 편히 그저 웃을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는 결론하에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을 보기로 했다.

 

대학가 중국집에서 배달일을 하는 강대오는 여대생 예린을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 중국집에서 일하는 이와 여대생이 어떻게 만나 사랑을 할 수 있겠냐며 대오는 좌절하지만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라.'는 예린의 메모를 보고, '혁명'이라는 것을 해보겠다고 마음 먹는다. 이렇게 영화는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혁명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대오가 예린의 생일파티인 줄 알고 공지된 약속장소에 나갔다가 우연히 미문화원점거농성에 합류하게 되고, 미문화원점거 72시간 동안 대오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사연과 에피소드로 진행된다.

 

왜 감독은 좋은 배우들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로 만든 것인가?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조정석과 독립영화 <혜화,동>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유다인이 캐스팅되어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캐스팅이 탄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연들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연배우들을 정말 조연배우로만 머물게 하고 있었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김인권만 영화 내내 끊임없이 움직이며 '홀로' 애썼다는 것이다. 좋은 배우들이 생명력을 뿜을 수 있도록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만들고 자락을 깔아주지 않고, 그들을 하나의 작품 바운더리에 그냥 모아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영화 초반 내내 조정석은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듯 하였고, 그가 등장한 이후에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곤 첫 등장에서 노래 부르며 짧은 춤을 추는 장면정도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그저 영화 속에서 특별한 캐릭터 없이 말그대로 경찰에 단 한 번도 잡혔던 적이 없는 전설의 의장 황영민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유다인 또한 강대오가 첫 눈에 반한 선배 서예린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김인권을 제외하고 그나마 본인의 캐리터를 가지고 나온 인물은 황비홍역의 박철민뿐이었다고 생각한다. 대오의 배달동지들 중에 코메디언 김미려도 있었고, 그 외에 권현상, 김기방, 이건주 등의 배우들이 등장하였지만 감독은 그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것이다. 단순히 감독탓만 해야하는 걸까? 흥행을 위해 눈에 익은 배우들을 수집하듯 그러모은 제작사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코미디 영화라고 말해도 될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상근활동가들 중에는 눈물을 보인이도 있었다. 나도 마지막에 대오가 연행되어 가는 장면에서, 닭장차를 쫓아가는 예린을 보면서 감정이 살짝 울렁거렸다. 그래서 그런걸까? 극장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거 코미디 영화 아닌데!' 영화는 소품을 활용한 잔재미, 배우 김인권이 내뿜는 특유의 익살 등으로 소소하게 코미디 영화의 장점을 이끌어 가고 있었지만 '본격' 코미디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함이 있었다. 그것은 일정 욕심에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방가?방가!>를 보지 못했지만 당시 육상효 감독은 이주노동자가 한국땅에서 겪는 현실을 말하며, 그 안에서 해학을 그리고 있다는 긍정적 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무게감때문에 그는 이번에도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 '무언가'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상황을 연출할뿐이었다. 운동권에 대해서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 운동사회에서 비판받아야하는 운동권의 작태를 까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시의 운동권에 대해서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는 시종일관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영화 후반부에서 연행되면 안되는 운동권 지도부들을 대신하여 연행되는 배달노동자들과 그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운동권 학생들을 번갈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감동'을 억지로 짜내려고 하는 느낌이 들어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영화 배경이 정말 1985년도 이었던 거야?

이 영화의 잔재미 중 하나는 중국집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소품들을(특히 중국집에서 주는 테이블 비닐) 활용하여 연출하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어 저 비닐이 정말 80년대에도 있었을까? 어 저 엑스트라가 입고 있는 옷은 요즘에 유행하는 디자인인데? 어 저 표지 디자인의 체게바라 평전은 내가 알기로는 분명 2000년대에 나온 것일텐데? 어 물대포도 정말 당시에 활용되었던 진압도구인가? 맹박이 정권 때 명활약하던 도구잖아? 어 영화 속 배경은 왜 이리도 현대와 닮은 걸까? 등 시간이 짬뽕된 소품과 배경들은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1985년 이라면 지금으로 부터 27년 전의 일이다. 거의 30년전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현대의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웃음 코드를 뽑기가 쉽지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끊임없이 몰입도를 방해하는 소품과 배경에서 약간의 안일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영화 오프닝 타이틀은 상당히 귀여웠고 재미있었다. 오프닝 타이틀에 너무 신경쓰느라 힘이 빠졌나?

 

영화는 맘편히 웃으며 극장을 나오겠다는 나의 기대에 빗나갔다. 그래도 오랜만에 사람들과 평일 낮시간에 영화보고, 밥 먹고 보낸 시간이 좋았다. 작년 상근활동가 '외출'때 다같이 상암동 극장에서 <헬프>를 본 후 일년만이다. 일상의 공간에서 내가 좋아라하는 상근활동가들과 앞으로도 이런 시간을 종종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김인권 외엔 모든 것이 어정쩡했다고 기대가 커서 아쉬웠다고 말하며 영화에 대한 짧은 글을 마친다. 

 

+ 영화 본 후 같이 점심밥먹으며 두런두런 나눴던 이야기들을 글에 담았다. 민우회 사람들과 뭔가를 같이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재미있다. 영화, 드라마, 뉴스 등 요즘 하는 것들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나눌 수 있는 점심시간이 즐겁다.

 

+ 영화 엔딩크레딧에 아는 사람 이름이 나오니까 신기했다. 근데 쓰다보니 본의 아니게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을 까게 되었다. 그래도 종종 깔 때는 까게 될 것같다. ^-^; 결론은 아는 사람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것은 무조건 신기하다!

 

+ 집에 와서 조금 더 보완하긴했지만 소모임 친구들 기다리며 리뷰 하나를 썼다. 뿌듯하다. ㅎ

2012. 11. 3. 12:55

 

 

아마 이번 특별전 포스터에 사용된 이미지는 영화 <아녜스의 해번>인 것같다. 이 영화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프랑스 영화 특별전이라는 말만이라도 아트시네마에서 프랑스 영화가 내내 상영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올 겨울 아트시네마에 프랑스 영화 보러 가야겠다. :) 아트시네마 포스터 만드시는 분은 센스가 돋는다. 이미지와 글자만으로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어 낸다.

2012. 10. 21. 21:38

 

 

<우리도 사랑일까?>를 다시 봤다. 영화를 보고 계속 여운이 남아 사람들에게 꼭 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나도 다시 한 번 그 영화를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 극장에 늦게 들어가 첫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더 다시 한 번 그 영화를 보고싶었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니 처음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러 인물들에 대해 감정을 충분히 개입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었다. 수영장에서 소변소동을 일으킨 마고와 그녀의 친구들이 샤워를 하던 장면, 마고와 마고의 친구들의 젊은 몸과 대비되던 나이든 여자들의 몸을 감독은 오랜 시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새것도 언젠간 헌 것이 된다던 나이든 여자의 말이 인상 깊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떠올랐다. 삼순이에 대한 마음을 확신한 진헌은 희진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때 희진은 "지금은 반짝반짝 거리겠지. 그치만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 그 여자가 지금은 아무리 반짝반짝해보여도...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된다고. 지금 우리처럼. 그래도 갈래?"라고 진헌에게 물었다. 반짝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희진의 말에 당시 나는 펑펑 울었다. 그때 진헌은 "사람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잖아."라고 답한다. 그 대답에 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마고의 마음 또한 그러하지 않았을까? 지속되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지만 다가온 또다른 사랑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또 사랑인가보다.

 

또다른 한 장면은 결국 알콜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루의 누나가 경찰차에 타기 전 마고를 바라보며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도 사랑일까?>를 보면서 영화 <사과>도 생각 났다. <사과>의 현정은 마고와 달리 현재의 남편 상훈을 택하면서 민석에게 "그동안 열심히 사랑해 왔지만 노력을 해본 것 같지는 않아."라고 말하며 그만 만날 것을 고한다. 그리고 현정은 집으로 와 돌아 누워 있는 상훈의 등 뒤에 누워 그를 안는다. 영화 <사과>를 떠올린 것은 "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순 없어."라고 말한 루 누나의 대사때문이었다. 큰 탈없이 삶을, 사랑을 차곡히 채워가다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치고 들어오는 '틈'에 일일이 다 반응할 수 없다는 그 말이 넌지시 동의되었다. 지속되는 사랑을 지키는 것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영화는 또 한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그 '선택'에 따라 삶이 흐르고, 사랑은 채워지고 이지러지고 다시 채워지고 이지러지고 반복하는 것이다. 누구를 탓할수도 없고 그저 그렇게 그 당시의 나 혹은 너 그들의 선택에 따라 생이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보니 보지못했던 것들 중 다시 보이는 것이 루의 감정 결이었고, 사라폴리 감독의 시간을 섞어 놓은 편집이었다. 영화 시작 마고는 요리를 한다. 그 요리를 하는 시간이 처음 영화를 본 이들은 루와 함께한 시간의 마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마고는 대니얼과 함께 하는 마고였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 장면은 다시 영화 마지막 부분에도 등장한다. 영화 러닝타임대로 따라간 시간을 언급하면 홀로 길을 걷던 마고는 서점에 발간된 루의 책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슬픈듯 멍하니 정면을 보고 걸어간다. 장면은 다시 바껴 꼬마 토니가 마고를 찾는다는 전화를 받고 마고는 루와 함께 했던 옛집으로 간다. 그리고 루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루는 돌아서는 마고에게 말한다. "새로산 요리 기구로 당신의 눈을 파내고 싶어." 마고는 답한다. "나도."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고는 혼자 놀이기구에 앉아 울듯한 표정을 짓다 홀로 미소지으며 놀이기구를 탄다. 이것이 러닝타임의 순서라면 이 영상들을 현실세계의 시간으로 가져와 다시 정리하면 그 순서는 달라진다. 꼬마 토니가 찾자 마고는 루와 함께 살던 옛집으로 찾아가고 그곳에서 루와 대화를 나눈다. 마지막 대화에서 루는 마고에게 한때 "사랑한다."는 말 대신 마고에게 전했던 엽기적이고 귀여운(?) 말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새로산 요리 기구로 당신의 눈을 파내고 싶어." 거기에 마고 또한 나또한 그렇다고 말한다. 한때 서로에게 순수하게 전했던 그 귀여운 표현들은 후에 '마음의 균열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용도 변경'되었지만(올드독의 영화노트 표현을 가져옴) 또 마지막의 그 대사는 또다른 의미로 '너는 나의 마음속에 지워지지지 않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같았다. 그 대화가 지난 사랑에 대한 예의같이 느껴졌다. 그 시간을 겪고 마고는 길을 걷다 우연히 서점의 쇼윈도를 통해 전해오는 루의 안부에 '잘 지내지?'라고 아련하게 묻고, '잘 지내고 있어 좋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홀로 놀이기구에 올라 앉아 '내가 잘한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스스로의 선택을 긍정하며 언제나 따라오게 되는 두려움을 인정하며 그녀는 그렇게 누군가의 마고가 아니라 그저 '마고'로서의 존재를 확실히 말하며 영화를 마무리 한다.

 

+ 토요일 오후의 극장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뒤늦게 들어오는 엄청난 관객들. 절대 웃음 포인트가 아닌데 나로서는 너무 슬픈 장면인데 박장대소하는 사람들. 여튼 토요일 오후 극장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 영화 제목을 <우리도 사랑일까?>로 번역한 배급사에 화가 났다. 그렇게 제목을 바꾸면 관객은 좀 더 들겠지. 하지만 정말 그 영화의 진면목을 알아주는 이들은 제목때문에 영화의 진면목이 사그러드는 것을 더 속상해할거야.

 

+ 미셸윌리엄스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되었다. 어쩜 그렇게 사랑스러울까? 정말 그녀는 이 영화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얼굴 근육의 움직임도, 몸짓도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옷도 엄청 이쁘게 잘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