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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해당되는 글 18건
2012. 12. 2. 15:10

 

 

 

 

 

사람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심상의 풍경이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해변이다.

<아녜스의 해변> 중

'나의 경우 그것은 바람이 부는 언덕이다.'

 

<아녜스의 해변>을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아녜스 바르다 그녀는 '生의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한 편의 영화로 그녀의 자화상을 그린 사람. 그녀는 붓대신 카메라를 들었고 필름에 그녀, 그녀가 만나온 사람들, 그녀의 기억, 그녀의 철학을 위트있고 솔직하게 담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벼운 生, 가볍기에 자유로운 生, 자유롭기에 솔직한 生. 그렇게 영화 속에는 80생을 살아온 80개의 아녜스 바르다가 있었다.

그리고 영화 <아녜스의 해변>은 아녜스 바르다와 그녀가 지켜본 사람들,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 관계를 통해 얻은 '행복'을 말하고 있었다. 아녜스 바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백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채우고, 이어가고 그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生의 에너지가 놀라웠다.

 

+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조건에 대해 질투를 했다. 그녀를 동경하면서 동시에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내 생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조건에 대한 질투'는 확실히 못난 방식이다. 어떻게든 나만의 방식으로 무엇이든 생산할 수 있도록.

(20121125)

2012. 10. 21. 21:38

 

 

<우리도 사랑일까?>를 다시 봤다. 영화를 보고 계속 여운이 남아 사람들에게 꼭 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나도 다시 한 번 그 영화를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 극장에 늦게 들어가 첫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더 다시 한 번 그 영화를 보고싶었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니 처음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러 인물들에 대해 감정을 충분히 개입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었다. 수영장에서 소변소동을 일으킨 마고와 그녀의 친구들이 샤워를 하던 장면, 마고와 마고의 친구들의 젊은 몸과 대비되던 나이든 여자들의 몸을 감독은 오랜 시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새것도 언젠간 헌 것이 된다던 나이든 여자의 말이 인상 깊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떠올랐다. 삼순이에 대한 마음을 확신한 진헌은 희진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때 희진은 "지금은 반짝반짝 거리겠지. 그치만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 그 여자가 지금은 아무리 반짝반짝해보여도...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된다고. 지금 우리처럼. 그래도 갈래?"라고 진헌에게 물었다. 반짝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희진의 말에 당시 나는 펑펑 울었다. 그때 진헌은 "사람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잖아."라고 답한다. 그 대답에 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마고의 마음 또한 그러하지 않았을까? 지속되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지만 다가온 또다른 사랑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또 사랑인가보다.

 

또다른 한 장면은 결국 알콜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루의 누나가 경찰차에 타기 전 마고를 바라보며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도 사랑일까?>를 보면서 영화 <사과>도 생각 났다. <사과>의 현정은 마고와 달리 현재의 남편 상훈을 택하면서 민석에게 "그동안 열심히 사랑해 왔지만 노력을 해본 것 같지는 않아."라고 말하며 그만 만날 것을 고한다. 그리고 현정은 집으로 와 돌아 누워 있는 상훈의 등 뒤에 누워 그를 안는다. 영화 <사과>를 떠올린 것은 "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순 없어."라고 말한 루 누나의 대사때문이었다. 큰 탈없이 삶을, 사랑을 차곡히 채워가다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치고 들어오는 '틈'에 일일이 다 반응할 수 없다는 그 말이 넌지시 동의되었다. 지속되는 사랑을 지키는 것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영화는 또 한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그 '선택'에 따라 삶이 흐르고, 사랑은 채워지고 이지러지고 다시 채워지고 이지러지고 반복하는 것이다. 누구를 탓할수도 없고 그저 그렇게 그 당시의 나 혹은 너 그들의 선택에 따라 생이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보니 보지못했던 것들 중 다시 보이는 것이 루의 감정 결이었고, 사라폴리 감독의 시간을 섞어 놓은 편집이었다. 영화 시작 마고는 요리를 한다. 그 요리를 하는 시간이 처음 영화를 본 이들은 루와 함께한 시간의 마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시작에 등장하는 마고는 대니얼과 함께 하는 마고였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 장면은 다시 영화 마지막 부분에도 등장한다. 영화 러닝타임대로 따라간 시간을 언급하면 홀로 길을 걷던 마고는 서점에 발간된 루의 책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슬픈듯 멍하니 정면을 보고 걸어간다. 장면은 다시 바껴 꼬마 토니가 마고를 찾는다는 전화를 받고 마고는 루와 함께 했던 옛집으로 간다. 그리고 루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루는 돌아서는 마고에게 말한다. "새로산 요리 기구로 당신의 눈을 파내고 싶어." 마고는 답한다. "나도."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고는 혼자 놀이기구에 앉아 울듯한 표정을 짓다 홀로 미소지으며 놀이기구를 탄다. 이것이 러닝타임의 순서라면 이 영상들을 현실세계의 시간으로 가져와 다시 정리하면 그 순서는 달라진다. 꼬마 토니가 찾자 마고는 루와 함께 살던 옛집으로 찾아가고 그곳에서 루와 대화를 나눈다. 마지막 대화에서 루는 마고에게 한때 "사랑한다."는 말 대신 마고에게 전했던 엽기적이고 귀여운(?) 말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새로산 요리 기구로 당신의 눈을 파내고 싶어." 거기에 마고 또한 나또한 그렇다고 말한다. 한때 서로에게 순수하게 전했던 그 귀여운 표현들은 후에 '마음의 균열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용도 변경'되었지만(올드독의 영화노트 표현을 가져옴) 또 마지막의 그 대사는 또다른 의미로 '너는 나의 마음속에 지워지지지 않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같았다. 그 대화가 지난 사랑에 대한 예의같이 느껴졌다. 그 시간을 겪고 마고는 길을 걷다 우연히 서점의 쇼윈도를 통해 전해오는 루의 안부에 '잘 지내지?'라고 아련하게 묻고, '잘 지내고 있어 좋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홀로 놀이기구에 올라 앉아 '내가 잘한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스스로의 선택을 긍정하며 언제나 따라오게 되는 두려움을 인정하며 그녀는 그렇게 누군가의 마고가 아니라 그저 '마고'로서의 존재를 확실히 말하며 영화를 마무리 한다.

 

+ 토요일 오후의 극장은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뒤늦게 들어오는 엄청난 관객들. 절대 웃음 포인트가 아닌데 나로서는 너무 슬픈 장면인데 박장대소하는 사람들. 여튼 토요일 오후 극장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 영화 제목을 <우리도 사랑일까?>로 번역한 배급사에 화가 났다. 그렇게 제목을 바꾸면 관객은 좀 더 들겠지. 하지만 정말 그 영화의 진면목을 알아주는 이들은 제목때문에 영화의 진면목이 사그러드는 것을 더 속상해할거야.

 

+ 미셸윌리엄스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되었다. 어쩜 그렇게 사랑스러울까? 정말 그녀는 이 영화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얼굴 근육의 움직임도, 몸짓도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옷도 엄청 이쁘게 잘 입는다.

2012. 9. 16. 22:54

'시간'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기에 사람들은 그 시간이 무한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 착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르기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 <늑대아이>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봤다. 두 영화의 공통된 주제는 아마도 '시간'이지 않을까?

 

<늑대아이>는 늑대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진 하나가 그의 부재 속에서 두 아이 유키와 아메를 기르는 13년의 시간을 순서대로 차곡차곡 기록한 영화다. 반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우연히 타임리프 방법을 습득한 마코토가 며칠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는 반복의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 <늑대아이>에 대한 평을 보면 주로 '성장'이라는 키워드 중심으로 글이 서술된다.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치열하게 그 시간에 함께 개입한 하나도 결국 성장하는 영화가 <늑대아이>이다. 감독 호소다 마모루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를 동경한다고 어느 잡지에서 말하면서 이 영화가 '성장'에 관한 영화임을 피력하고 있었다. 밭에 씨를 뿌리고 그 다음날 바로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니라사키 할아바지의 말처럼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시행착오와 기쁨, 슬픔, 괴로움, 고난 등 온갖가지의 경험이 축적된 시간의 흐름을 거치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늑대아이>에서 유키와 아메의 성장을 함축과 은유를 배제하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또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아이들의 성장이 단순히 부모와 아이라는 일대일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서술하고 있었다. 성장의 흐름 속에서 유키는 세상의 '여자아이'들이 어떻게 길러지는지를 온 몸으로 체험하며 여자답게 살아가기를 은연 중에 습득하며 결국에는 여자사람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늑대의 습성을 아메보다 적극적으로 습득하며 발휘하며 살아가던 어린 유키에게는 '늑대'와 '사람'이라는 이중의 정체성 외에도 '여성'이라는 젠더의 옷이 하나 더 있었다. 유키의 삶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젠더의 옷은 쉬이 벗어던질 수 없는 옷이었기에, 유키는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는 삶을 영화 속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아메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그 누구도 그가 '어때야 한다.'라는 특별한 강요나 요구의 제약없이 당연한 성장의 과정을 거치고 자연스럽게 늑대가 되어 숲으로 돌아간다.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유키, 늑대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아메. 그리고 두 아이로 부터 새로운 독립을 감행해야하는 하나. 영화는 그렇게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선택하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아빠 미소로 보았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보다는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의 생각이 나는 더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러 온 아이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세상의 부모들이 이 영화를 더 많이 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독립'이라는 개념은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라, 부모들 또한 반드시 각오하고 거쳐하는 과정이기때문에 그 과정을 온 몸으로 겪고 지나는 하나의 모습을 세상 부모들이 보고 공감하면서 함께 '독립'을 준비하기를 아이들은 바라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그저 본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보고싶어졌고 그래서 연달아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보았다. 만약 내게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나는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릴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결과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밟지 않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순차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늑대아이>와 달리 시간의 역행과 순행을 반복하는 영화이다. 주인공 마코토는 우연히 타임리프 방법을 습득하여 10시간 넘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일상에서 겪게 되는 작은 불행들을 피해가고, 치아키의 고백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녀가 시간을 역행하면 할수록, 그녀가 피해갔던 순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결국 내가 된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살면서 분명 그런 순간이 온다. 후회되거나 혹은 맞이하고 싶지 않은,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은 그런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역행하여 그 순간을 회피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나는 그 순간을 직면해야 하는 순간을 반드시 다시 맞이하고 그 시간을 뚫고 지나가야지만 내 생이 흘러간다는 명제를 영화를 보면서 느꼈다.

 

 

'Time waits for no one' 칠판에 쓰여있는 그 말처럼 시간은 내가 바라는대로의 속도로 흘러가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역행하지도 않고, 기다려주지도 않은채 그렇게 흘러간다. 때로는 나보다 먼저 앞서 흘러가기도 한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성취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그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배운다. 산다는 것은 시간에 나를 맡기고 그 흐름의 속도에 맞춰 유영해야한다는 것을 배우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온 존재를 다해 있는 그대로 시간을 겪어야 성장한다는 그 의미를 배우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나쳐와야하는 것일까? 내가 직면해야하는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 순간 나는 마코토처럼 타임리프를 통해 다시 주말 토요일 아침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주말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다. 이렇게 말도안되는 상상력으로 나는 시간을 뚫고 월요일로 향해간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월요일로! 꺅! (-_-;)

 

+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리뷰 '삶을 연장하는 편법, <시간을 달리는 소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6875

 

+ 조조로 <늑대아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차려먹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고, 저녁을 만들어 먹고 <정글의 법칙>과 <런닝맨>을 보고 오늘 본 영화들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글을 썼다는 나의 행위에 만족하며 호소다 마모루 감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고생스럽지만 2차원의 애니메이션을 고집을 가지고 아름답게 만드는 그가 참 고마웠다. 그의 2차원 애니메이션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기에.

 

+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OST도 참 좋다. OST를 재생해둔 채로 내내 글을 썼다. :)

2012. 9. 2. 17:39

 

 

이 영화의 원제는 <Bonsai>, 한국말로 번역하면 '분재'다. 영화를 수입하면서 영화는 다시 <훌리오와 에밀리아>로 번역되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영화 제목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첫인상'이기에 내심 재해석 혹은 상업적 이용에 의해 영화 제목이 가급적 바뀌지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훌리오와 에밀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지만 감독은 훌리오와 에밀리아를 빌어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고, <훌리오와 에밀리아>로 번역된 영화제목은 관객들을 그 안에 가둬버리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감독 크리스티안 히메네즈는 '자연'을 좋아하고, '문학'과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 속에 머물고, 나란히 누워 문학 작품들을 읽고, 거의 매일밤 사랑을 나누는 이가 '한 때' 곁에 있었다는 것을 감독은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이 단지 '한 때'가 아니라 그가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영화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장은 프루스트로 시작한다. 2장은 피(8년 후), 3장은 몸(8년 전), 4장은 다시 8년 후(4장의 소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6장의 소제목도 불확실하다.), 5장은 탄탈리아(8년 전), 6장은 분재(8년후)로 시간이 구성되고 교차된다. 1장을 제외하고는 소제목 아래에 '8년 전' 또는 '8년 후'라고 시간도 함께 기록된다. 소제목 아래의 시간 표시를 보면서 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8년 전'이라고 하면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를 말하는 것이고, '8년 후'라고 하면 '8년 전'을 기준으로 시간이 지난 미래의 '8년 후'로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화자는 두 개의 시간영역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사랑을 나누고, 이별하고, 다시 고독과 외로움을 견디다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그 과정들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감독은 소제목 아래의 시간 표시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책들과 훌리오와 에밀리아가 머물렀던 공원과 노닐었던 나무, 강(江) 즉 자연의 풍경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분재도. 감독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이고, 자연을 좋아하는 이라는 것을 영화에서 느껴졌다. 우디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을 알게되었다. 그책이 7권이나 된다는 것과 그 책을 다 읽는 것은 보통 작업이 아니라는 것은 고래씨를 통해 알게되었다. 영화 시작에 교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사람?"이라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영화 중반에 훌리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장을 에밀리아에게 읽어주고, 영화 마지막에 훌리오가 읽었던 그 구절이 다시 한 번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때로는 촛불을 끄자마자 즉시 눈이 감겨서 '잠드는 구나'하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 시간 후,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각이라는 생각에 깨어난다. 아직 손에 들고 있으려니 여기는 책을 놓으려고 하며, 촛불을 불어 끄려고 한다.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에 대한 회상은 깜박한 사이에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회상은 야릇한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섯

 

그리고 후에 나오는 책들은 제임스 엘로이의 <아메리칸 타블로이드>,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조류쥬 페렉의 <잠든 남자>,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등 처음 들어보는 낯선 책들도 있었고 익숙한 책도 있었다. 그동안 감독이 접했을 책들, 감독 자신의 경험과 연관할 수 있는 책들, 칠레의 상황을 말 할 수 있는 책들 등 감독은 문학이라는 코드를 통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책과 더불어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자연과 분재였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공원의 숲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훌리오는 에밀리아에게 네잎 클로버 화분을 선물하고, 그리고 그는 8년 후 에밀리아의 부고를 듣고 분재를 가꾼다. 그리고 훌리아는 분재를 가꾸며 이런말을 한다. "화분에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궁극적으로 둘은 모두 자연이다." 영화를 보면서 문학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감독의 호(好)가 보였다. 그리고 분재라는 소재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이 독특하였다. 분재는 어찌보면 자연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이와 연결하여 문학은 세계에 대한 모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모방은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흠모가 없다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감독은 그렇게 자신을 '사랑' '문학' '식물학'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사랑을, 그를 둘러싼 문학과 식물학을 다시 한 번 소상히 회상하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말하는 것같았다. 영화 <훌리오와 에밀리아>를 통해 크리스티안 히메네즈라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사람이 보이는 영화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보이는 영화다.

 

+ 훌리오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가 일하는 서점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벽면 전체에 책이 빼곡히 꽂혀있다. 세상에는 읽어야 하는 책들 혹은 읽을 수 있는 책들 또는 읽고 싶은 책들이 수없이 많고, 책은 끊임없이 만들어질텐데 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그 책들을 만족할 정도로 읽다가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져야할텐데. 이 게으름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책만 보면 쏟아지는 잠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걱정만 잠시 늘어 놓는다. 영화도 그러할텐데. 세상엔 읽어야 하는 책과 보아야 하는 영화가 무한하다. 내게 딱 1년 정도 영화보고, 책보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재력이 있으면 좋겠다. ㅎ 그러고 나면 1년보다 더 긴 시간이 욕심나겠지. 틈틈이 애써봐야겠다.

 

 

+ 일요일 조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니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 인파 속에서 생각을 했다. '나도 문학과 영화와 자연을 좋아하는 이를 만나 그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다.' 훌리오가 소설가 가즈무리를 만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리 위에는 하얀색 화살표가 계속 따라 다녔다. 인파 속에 "나, 훌리오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도 그 많은 인파들 속에서 머리 위에 화살표를 달고 "나 여기 있어요!"라고 내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여튼 그 장면이 재미있었다. 감독은 왜 유독 그 장면에 머리위 화살표를  붙여 놓은 걸까?

 

 

+ 칠레 영화를 처음 봤다. 얼마전 이태원 산책을 하면서 지리부도를 갖고 싶었다. 칠레 영화를 보고 나니 칠레의 위치와 그 주변의 나라들이 궁금해졌다. 세계지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문학과 식물학, 영화만큼 지리학도 매력적인 공부일 것 같다. 영화 포스터 아래 사랑, 문학, 식물학이라는 세가지 테마가 쓰여있다.(무비꼴라쥬 시네마톡 후기에서 정보를 얻었다.)

 

+ 트리플 불안님의 블로그 : 아트톡 <훌리오와 에밀리아> with 한창호 평론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icskan&logNo=90151101422

 

+ 낯선 나라의 말, 혹은 "고대의 말 라틴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시간과 교감하는 것이다."라는 훌리오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 칠레 영화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유럽감수성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2012. 8. 5. 23:32

날씨가 정말 덥다. 뉴스에서는 '최악의 더위'라고 말하고 있고, 에어컨 사용량을 줄이라는 아파트 관리소장의 안내 멘트가 웅웅 거리며 들린다. 정말 이렇게 더울 수 있는지, 너무 더워서 이 더위가 낯설 지경이다. 도저히 집에 머물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을 뛰쳐 나와 극장으로 찾아갔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가 보고 싶었다. 옴니버스 구성도 흥미롭고, <기담>의 감독이 만든 이야기도 있다고 하고, 배우 남보라가 어떻게 연기하는지도 궁금했고, 한국영화에서 좀비이야기는 어떻게 그려질지 확인하고 싶었다. 헌데 함께 극장에 갈 사람이 없고(공포영화를 잘 보지만 그래도 혼자보기엔 촘 무섭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에 상영을 하는 극장이 없어 못보고 있다가 더위를 핑계로 동생을 꼬셔 늦은밤 <무서운 이야기>를 봤다.

 

집주변엔 <무서운 이야기>를 상영하는 극장이 없어 신사동에 있는 브로드웨이 극장에 갔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판을 치는 요즘, 비멀티플렉스 극장인 브로드웨이 극장은 아주 작은 상영관을 여러 개 보유한 곳이었고 좌석 선택 시스템도 A4용지에 그려진 좌석을 내가 선택하면 매표원이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표를 발행하고 있었고, 화장실도 적당히 지저분했다. 시내 한복판에 이런 정겨운 시스템의 비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다는 것이 괜시리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데맨 뒤 좌석에 앉으면 물결모양의 천장때문에 화면 윗 부분이 툭 잘려 보였다. (-_-;) 그래도 내가 주말 더위를 피해 공포영화를 적절한 시간에 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브로드웨이 극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영화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잡혀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소녀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시작한다. 첫번째 이야기는 전래동화 <해와 달>의 구조를 가지고 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인간의 환상이 빗어내는 공포와 현실의 인간이 실제로 겪는 공포를 엮어 만든 <해와 달>의 스토리가 닫히는 순간 '나쁘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인간의 환상이 빗어낸 공포의 존재였던 택배기사는 현실의 인간이 되어 자신을 고용하고 결국 해고하여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간 사업주의 아이에게 찾아가 복수를 감행한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감독의 욕심이 무엇인지 알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현실의 이야기를 '이용'한다는 것에 대해 "나쁘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인 집이 가장 무서운 공간이 되어 방과 방으로, 문과 문으로 이어지는 공포를 잡아낸 흐름이 좋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노현희씨의 모습도 묘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원버스 안에서 아이들과 해와 달 영어노래를 함께 부르며 대문앞까지 아이들을 데려다주며 "씨유 투마로우"라고 말하던 노현희씨의 맥거핀적 공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아이들과 빨간 입술과 빨간손톱의 노현희씨 공이 컸다.

 

두번째 이야기 <공포비행기>는 밀폐된 공간에서 악마와 같은 존재와 맞서 싸우는 승무원의 이야기인데 특별할 것없는 무난한 이야기였다. 어디론가 달아날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악마와 같은 존재와 함께 있을 때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죽기살기로 그와 맞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죽기살기로 맞서 싸우는 구조 안에 하나의 이야기를 더 접목시킨다. 살인마의 눈에는 체포되기 전 그가 살해 한 승무원의 환영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피칠갑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살인마를 쏘아보며 불쑥불쑥 등장하는 승무원 귀신은 한국 공포영화에는 귀신이 등장해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번째 이야기는 <콩쥐, 팥쥐>이다. 이 에피소드를 보기 전 영화 <장화, 홍련>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자매의 등장과 옛이야기와 연관지어 만든 제목때문인듯하다. 고전적 느낌의 영화세트와 배우들의 의상 또한 두 영화를 연결하여 사고하도록 하였다. 외향은 그렇게 연결이 되는데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장화, 홍련>의 이야기가 잘 기억이 나지않아 연결하지 못한다. 여튼 <콩쥐, 팥쥐>로 돌아와 민 회장에게 시집을 가기 위해 공지와 박지는 매일 으르렁 거린다. 결국 언니 공지대신 민회장과 결혼하게 된 박지. 하지만 민 회장과의 결혼이 부를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민 회장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음식으로 스스로가 활용된다는 것을 두 자매는 알게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시점은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십여명의 민회장 아내들이 입었을 피 묻은 드레스가 보관 된 방의 장면은 동화 <푸른 수염>을 연상케했다. 전체적인 콘셉트는 '잔혹'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지만 콘셉트만 가져왔을 뿐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이야기같다.

 

 

네번재 이야기 <앰뷸런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칭찬하고 있었다. 한국영화에서 좀비를 그려낸다는 것이 우선 흥미로웠다. 이야기에는 좀비에게 물렸는지 물리지 않았는지 확실치 않은 아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엄마. 좀비에게 물렸다고 확신하고 앰뷸란스에서 아이를 내보내려고 하는 의사, 아직 확실치 않으니 일단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가 백신을 맞히도록 하자는 간호사가 등장한다. 감독은 각각의 인물들의 입장이 부딪히는 시점을 포착하고 그 입장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압착하고 있었다. 감독은 이야기를 어디에 집중하고 풀어가야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에피소드들 보다 밀도있게 이야기를 풀어낸 <앰뷸런스>는 공포를 흉내내려고 하지 않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비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좀비의 모습이 제대로 화면에 포착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저 요란스런 소리와 정신없는 팔동작, 멀리서 뛰어오는 모습만으로 그려진 좀비의 존재는 한국영화에서는 좀비를 어떻게 그릴것인가라는 나의 궁금증을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다.

 

영화는 살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소녀와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그럼 이제 내가 해줄까? 무서운 이야기?"라고 말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우리가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공포와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접하게 된 사건으로 파생된 공포를 적절하게 버무린 영화 <무서운 이야기>는 극장을 나온 관객들에게 귀신이 더 무섭냐, 사람이 더 무섭냐라는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었다. 

 

+ <인간극장>의 남보라가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도 나는 신기하다. 그녀의 동생들이 생각나서 그런지 배우 남보라가 잘됐으면 좋겠다. (^-^;) <콩쥐, 팥쥐>에는 전직 아나운서 임성민씨도 나온다. 내가 누군가의 연기를 운운할 수 있을까 싶긴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아직 많이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임성민씨도 얼마전에 <인간극장>에 나왔다.

 

+ 옴니버스식 구성을 통해 다채로운 형식의 공포를 드러내는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으나 너무 나열한 듯한 인상이 강해 108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살찌기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2012. 7. 27. 00:33

 

 

영화 <도둑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씨네21을 펼치고 정한석 기자가 쓴 <도둑들> 프리뷰를 봤다. 그의 프리뷰에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프리뷰에 "아니요. 잠깐만요! 달리 생각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생각에 빌어 나의 생각을 말해보려고 한다. 그전에 영화를 보며 내가 신기해했던 지점을 짚고 넘어가보려고 한다. 

 

<도둑들>을 보며 신기했던 부분 중 하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9명(도둑으로 위장한 경찰 줄리는 제외)의 도둑들 중 첸(임달화)을 제외하고는 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도 직접 총을 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점이 재미있었다. 마카오 카지노에서 스위트룸에 들어간 예니콜(전지현), 뽀빠이(이정재), 팹시(김혜수), 옥상에 있던 잠파노(김수현)을 제외하고는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손에 총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카지노에서 경찰들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총을 한 번즘 쏠 법도 한데 그들은 쏘지 않았다. 그리고 부산에서도 위홍일당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끊임없이 총을 쏘았고, 경찰들도 계속해서 총을 쏘아댔지만 도둑들의 손에는 총이 없었다. 왜 그들은 총이 있어도 총을 쏘지 않았고, 상대는 총이 있는데 왜 그들은 총이 없었던 것일까? 허리우드 영화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상대가 총을 쏘면 당연히 나도 총을 쏴야 한다는  단순 화법에 익숙해져있던터라 도둑들이 총을 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도둑들이 총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 총은 '쏘기'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기때문이었고, 둘째 그들의 목적은 허리우드 영화 화법에서 종종 등장하는 적을 두고 '적과 싸우기'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말그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뭔가를 훔치기'위한 것이기때문에 굳이 총이 필요 없었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미쿡사람도, 홍콩 사람도 아닌 '한쿡' 도둑들이기때문에 총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홍콩 사람이었던 첸(임달화)만이 총을 들고, 총을 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본인이 정체가 무엇인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고 옆길로 세지 않고 맡은바 임무에 '충실한' <도둑들>이 기특했다.

사람들이 이유없이 무차별적으로 죽어나가는 영화를 싫어 한다. 밑도 끝도 없이 일단 죽이고 보자는 그 무자비함이 싫다. 그렇다고 이유있는 살인은 또 무엇인가 물으면 할말은 없지만...'태양의 눈물'을 넘보는자, '태양의 눈물'을 빌미로 자신에게 접하는 자를 무조건 죽이고 보겠다는 위홍일당과 달리 '훔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총알 세례를 맨몸으로 받아내는 도둑들이 순박해서 좋았던 것이다. 결론은 허리우드의 정서가 아니라 '한쿡 정서를 담뿍 품은 오락영화'라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정한석 기자는 '작전이 실행 되자 의아하게도 서사의 활력이 갑자기 무뎌진다. 특히 보석을 탈치하는 장면에서는 이 영화의 장르적 성격상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할 서사적 아이디어가 무디거나 없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특기할 만한 물리적인 흥분감 또는 신속함이 대신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대해 나는 "비교집단을 두고 영화를 보게 되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허리우드 영화라는, 특히 <오션스일레븐>이라는 확연한 비교군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는 턱없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겠지요. 하지만 비교하지 않고 한쿡 오락영화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면 이 영화는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고, 충분히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장르적 성격을 가진 영화에 대한 나의 기대치가 너무 소박한 것일까? -_-;) "기자님, 보석 탈치 장면이 아쉬웠다 손 치더라도 건물외벽씬은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았나요?"

 

두번째로 그는 '인물들 사이에 여러 가지 감정적인 인간관계를 걸어놓고 있지만 그걸 맺고 푸는 과정도 유연하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첸(임달화)과 씹던껌(김해숙)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들을 어떻게 퇴장시킬 것인가 고민하다 내린 서사적 극약 처방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감독 또한 "첸(임달화)과 씹던껌(김해숙)의 감정에 대해서는 영화의 속도를 위해서 빼야 맞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감정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 사소한 감정때문에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도 분명 있는 것 아닐까? 수십년 전 친구를 배신하고 스스로 비겁하다 생각하며 살아온 첸(임달화)에게 "당신 비겁하지 않았다."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위로였고, 평생 도둑질을 하며 번 돈을 딸과 사위에게 쏟아부었지만 남는 감정이라곤 '외로움'밖에 없었던 씹던껌(김해숙)에게 "내일 아침엔 내곁에 있어요."라고 말하는 이는 의미인 것이었다. 이런 사소한 감정을 욕망하고, 이런 사소한 감정에 흔들리는 이들이 우리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홍콩에서 4년만에 처음 만난 팹시(김혜수)와 마카오박(김윤석)의 눈빛에서, "복희야 사랑해."라고 외치며 결국 체포되는 잠파노(김수현)에게서, 앰뷸런스 안에서 '태양의 눈물'을 손에 쥐고 "아 근데 내 기분은 왜 이러냐?"라고 말하던 예니콜(전지현)에게서 쿨하지못해 미안한 한쿡적 사소한 감정이 오롯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이것이 <도둑들>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정한석 기자는 '<도둑들>은 금고가 있는 방에는 들어갔으나 정작 금고를 여는 데는 실패한 금고털이범 같다. 금고 안에 어떤 보석이 들어 있는 줄은 아는데 그걸 갖지는 못했으므로 그러하다.'라고 쓰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는 분명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성격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의 표현일 것이다. 거기에 대해 난 또 물어본다. "그래도 한쿡 오락영화로서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전 최동훈 감독에게 말하려고요. <도둑들>은 한쿡 1급 오락영화에요." 더위로 지치는 목요일 오후 '한쿡 1급 오락영화' 한 편 잘 봤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경향신문(20120730)에 <도둑들> 글을 썼다.

[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최동훈 감독표 종합선물 ‘도둑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7292117285&code=990100

 

+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난 전지현이 반가웠고 오바스럽긴했지만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 장면이 만족스러웠다. 김윤석의 눈은 상당히 섹쉬했고, 김해숙씨는 멋진 배우이다. 임달화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도 좋았다.

 

+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하고 이런 방식으로 글을 써도 되는 걸까?'라고 잠시 생각한다. 아, 나 정한석 기자 글 좋아하는데. ;

 

+ 무더위가 계속 되고 있다. 밤엔 자다가 더워서 지치고, 아침 출근길에 한 번 더 지치고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몸이 녹아내려 일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름에 왜 휴가를 떠나는지 알  것같다. 그리고 매해 다가오는 이 더위는 겪어도 겪어도 익숙하지 않다. 어제부터 사무실의 k활동가는 단축근무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끊임없이 했고 오늘도 그 말이 나왔다. 그래서 감행했다. 점심식사 시간 멍군에게 "오늘 3시까지만 근무하는 것 어때요?"라고 물었고 멍군은 쿨하게 "오케이!"를 했다. 바로 영화 시간표를 알아보았고, <도둑들>을 보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그 시간이 3시 40분. 단축근무를 쿨하게 제안한 k활동가는 내일까지 마무리해야하는 작업이 있어 사무실에 있었고, 나를 포함한 5명의 활동가들이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기분이 묘했다. 이래도 될까? 사무실에 남아있는 활동가들이 괜시리 생각나고 수업시간 땡땡이 치고 나온 학생이 겪을법한 불온한 불안감이 머물렀다. -_-; 그치만 그 생각은 금방 잊기로 했다. 여튼 단축근무는 기분 좋고, 극장 가는 길은 설렌다. 여름 더위가 쓸만하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 합정동 L시네마가 지난주 목요일에 오픈했다. 사무실을 기점으로 근거리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또 하나 생긴 것이다. 오늘 그곳에서 <도둑들>을 봤다. 몸의 반응이 민감한 사람들은 한동안 합정동 L시네마를 멀리해야하지 않을까? 새건물 냄새가 상당했고, 공기의 시큼함은 눈을 따갑게 맹글었다. ㅠ 

2012. 7. 4. 00:44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보기 위해 지난 일요일에는 집에서 하루 종일 소설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13살때 소설 <폭풍의 언덕> 존재를 알았다. 나의 단짝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폭풍의 언덕>을 꺼내 놓고 읽었다. 친구가 좋아했던 책이기에 나도 함께 읽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폭풍의 언덕>에 줄곧 빠져 있었다. 다 읽고 덮은 책장을 몇번이고 다시 펼쳐 읽고 또 읽었다. 나의 십대를 흔들었던 소설, 그 여운은 이십대까지 이어졌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 EBS에서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폭풍의 언덕>을 상영했고, 텔레비전에 앞에 앉아 숨죽여 그 영화를 봤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비디오가게에서 <폭풍의 언덕>이라는 타이틀의 영화를 꼭 찾아보곤 했다. 서점에서 <폭풍의 언덕> 원서를 구입하기도 했으며(절대 읽을 수 없었지만), <제인에어>도 함께 읽으며 괴이한 브론테 자매들을 흠모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내 청춘의 시간 속에 오롯이 존재했던 <폭풍의 언덕>, 늦은 밤 책장을 덮고 잠시 생각했다. 내 생에 있어 <폭풍의 언덕>을 13살 때 만나 다행이라고. 서른을 넘긴 시간 다시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몇몇 장면에서 찔끔- 눈물을 흘리긴했지만 그것은 당시의 그 감정이 아니었다. "그 피라미 같은 에드거가 온 힘을 다해서 80년을 사랑한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하루만큼도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을거야." "내가 살아가는 큰 보람은 바로 히스클리프야. 모든 것이 다 죽어도 그만 살아남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있어."라고 말하던 히스클리프와 캐시는 가슴을 부여잡고 절절히 슬퍼했던 그때의 히스클리프와 캐시가 아니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한치의 쉼도 없이, 한치의 우회도 없이 극에서 극으로 치달으며 비극의 연속을 만들어 갔던 에밀리 브론테, 그녀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에필로그 격의 후대의 캐시와 헤어튼의 이야기 그리고 유령으로 등장하는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이야기는 글을 쓰느라 지친 그녀가 스스로에게 전하는 위안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에밀리 브론테 그녀가 독자들에게 "히스클리프와 함께 오는 동안 힘들었지. 이제 쉬게 해줄게. 하지만 잊지는 마. 가학적일 수 밖에 없었던 그 깊고 슬픈 사랑을..."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여전한듯하지만 여전하지 않았던 소설 <폭풍의 언덕>을 보고 오늘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보았다. 폭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오늘은 <폭풍의 언덕>을 보기에 제격인 날씨였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극장에 불이 켜졌다.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휘청하였다. 진이 빠졌다. 저녁을 먹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휘청'의 90%는 영화때문이었다. 다행이었다. 활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한 영화는 공간이 전하는 정서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공간에 감정을 담아 관객에게 말을 건내고 있었다. 작은 극장에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이들은 아마도 그 혹은 그녀가 소년이고 소녀이던 시절, 소설 <폭풍의 언덕>을 가슴에서 놓지 못했던 이들일 것이다. 바람만 세차게 부는 언덕과 어두워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간이 반복해서 나올뿐인데도 바람이 부는 여백과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은 활자의 결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사람들을 그것을 느꼈고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소년과 소녀가 되어 영화를 읽고 있었다.

 

+ 영화가 좋았다. 헌데 영화 제목과 엔딩 크레딧의 폰트가 상당히 유치했다. 왜 그러한 폰트를 썼을까? 활자를 읽는다는 것과 활자를 본다는 것에 대한 간극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 바람소리, 새소리로만 채워져있던 영화는 마지막에 음악을 집어 넣는다. 영화 <원스>의 배경음악을 연상시켰다. 솔직히 음악이 튄다. 감독은 왜 막판에 굳이 음악을 집어 넣었던 것일까? 음악이 끝나고 엔딩크레딧 장면에서는 다시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화면을 채운다. 왜 그랬을까? 마지막에 감독은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건 소설이 아니에요. 영화에요. 관객 여러분-"

 

+ 3주째 모모에서 영화를 봤다. <멜랑콜리아> <두번의 결혼식 한번의 장례식> <폭풍의 언덕> 선택한 영화도 좋았고, 극장도 북적이지 않고, 거리도 가깝고, 폭 빠져들어갈 것 같은 지하 객석도 마음에 든다.  헌데 모모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영화 시작 후 관객이 늦게 들어오면 영화 속 주인공과 관객들의 시커먼 머리통 그림자를 동시에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싫다.ㅠ 영화 시작하면 모모는 관객 입장을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쉽게쓰여진 詩]

 

폭풍의 언덕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폭풍의 언덕에 존재하는 것은 바람과 너뿐이다

바람도 차마 채우지 못하는 그 빈 공간에 네가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2012. 6. 9. 02:27

 

 

산다는 것이 참 찌글스럽다. 오늘 하루는 진창같은 하루였다. 자책도 하고, 울기도 하고, 정신차려야 겠다, 다짐도 하고 여튼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나 오르고 내리고 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가는 길 적절히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서 좋았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한참 서서 멍하니 비내리는 장면을 봤다.

 

한참 비나리는 장면을 보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 좌석에 앉는다. 영화 시작 전 10여분을 앞둔 시간. 나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그 순간이 좋다. 어떤 장면들이 내 앞에서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늘 설렌다.

 

영화 엔딩이 끝나는 순간, '역시 홍상수다.'라고 생각을 했다. 홍상수 감독의 초기작은 본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이다. <밤과 낮>,  <잘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오늘 본 <다른 나라에서>를 제외하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섰던 기억은 있는데 솔직히 영화의 장면들과 이야기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감정들을 일괄적으로 표현하자면 좋았다는 것. 별로인 영화들도 있었던 같긴 하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홍상수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하하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했고, <옥희의 영화>를 보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대가 컸다. 나의 저질스러운 기억력때문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다른 나라에서>"라고 무식하게 답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아름답다.'라고 연신감탄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왜 아름다운 영화인가?

<다른 나라에서>는 크게 세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등장한다. 세개의 에피소드 중 첫번째 에피소드가 끝나는 순간 영화가 너무나 아름답고 슬퍼서 혼이 났다.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안느와 안전요원은 등대가 어디에 있는지 서로 물으며 대화를 나누게 되고, 안전요원의 텐트 안에서 또 대화를 나눈다. 안전요원은 뷰티풀네임을 가진 안느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 안느는 안전요원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안전요원은 그 편지를 읽지 못한다. 그 장면이 어찌나 슬프고 아름다운지. 홍상수 감독은 첫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불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안전요원은 안느에게 뷰티풀이라고 말하지만 뷰티풀의 b를 p로 잘못보고 그 언어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 이후의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안느와 안전요원은 거기에서 그냥 끝을 맺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동일한 언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행간에 함축된 의미를 읽지 못해, 혹은 같은 단어와 문장을 보고 들어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서 겪게 되는 불통의 비극을 우리는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홍상수 감독은 그 불통의 비극을 너무나도 위트있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비극은 극대화되었다.

 

꿈과 상상, 현실의 변주_그 무경계함을 말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를 모르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이것이 영화 속 주인공의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시간이 있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씨는 홍상수 감독에게 '꿈'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현실이라는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이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그는 답했다. 그 말에 '아, 그래서 홍감독 영화를 만드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본다.'라고 생각했다. 진창같았던 하루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권해효씨를 보며, 유준상의 "아윌프로텍트유"를 들으며 극장에서 내내 큭큭 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영화의 엔딩이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지면서 찌글스러웠던 오늘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 중 하나로 술을 마시고 취했을 때도 언급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엔 술을 마시고 취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두번째 에피소드의 문성근씨 또한 그랬다. 그는 만취하여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귀엽게 질투를 했다. 문의 연기는 징그러울 정도로 리얼해서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문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그의 행보와 무관하게 연기하는 순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던져버리고 있었다. 대단하다.

 

요즘엔 꿈을 상당히 많이 꾼다. 꿈 속에선 다양한 이들이 등장하고 내게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나의 꿈 이야기를 스승님에게 말했더니 스승님은 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모두 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승님도 하루는 꿈 속에 5명의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5명의 사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꿈 속의 각기 다른 등장인물이 결국엔 다 자기였던 것같다라고 했다. 현실과 꿈은 경계를 가지고 있는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경계가 없는 것이다. 현실을 경험하는 이도 나인 것이고, 꿈을 꾸는 주체도 나이기때문에 현실과 꿈을 경험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꿈이든 현실이든 하나의 경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이것이 현실이다, 혹은 꿈이다라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이러한 무경계함을 진작에 알고 있었고 그는 꿈과 현실의 무경계함을 적극적으로 다양한 변주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었다. 두번째 에피소드가 특히 현실과 꿈의 무경계함을 열심히 표현하고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과 꿈의 무경계함을 말하는 동시에 생의 다양한 변주를 그의 영화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사실에 근거하여 존재한다기 보다는 믿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 인상 깊었던 것 등 제각각 주관적 기억력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인간들이 비슷한 어쩌면 동일한 경험들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렇기에 첫번째 에피소드 해변가의 소주병은 한국사람이 버린 것있을 수도 있고, 안느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안느가 쟁여두었던 우산은 어쩌면 세번째 에피소드의 안느가 숨겨 둔 것일 수도 있고. 모항의 좋은 풍경을 안내해주겠다던 첫번째부터 세번째 에피소드의 원주는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고.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세번째 에피소드까지 모항해변에서 수영을 하던 안전요원의 시간은 분절된 시간일 수도 있고 연속된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별개의 시간이면서도 뭉개진 시간일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세번째 에피소드 모두가  한사람의 경험일 수도 있고 수많은 인간군상의 동시다발적 경험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철학을 논하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첫번째 두번째 에피소드에 비해 상당히 튄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올 김용옥이 등장하는 것도 낯설었고, 안느와 스님(김용옥), 박숙(윤여정)의 대화장면도 뜬금없었다. 하지만 그 장면은 달리 표현하면 명쾌하고 시원했다. 살아가면서 생각없이(?) 마구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우리는, 누군가가 뜬금없어한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제대로 묻지 못하며 살아간다. 묻는이도 그러하지만 답하는 이도 그러하다. 나의 답변에 대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이렇게 답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강박에 갇혀 침묵하는 경우도 왕왕한 것이다. 하지만 안느와 스님은 그런 강박에 벗어나 묻고 싶은 것을 묻고 답하고 싶은대로 답한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옳고 그런지를 떠나 그 과정속에서 제 나름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의 영화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었다.

 

나도 홍상수 감독에게 강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질문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하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묻지않고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하고픈대로 행하였다. 그 행함이 나를 더욱 자유롭게 만든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책임'에 관한 안느, 금희(문소리), 종수(권해효)의 대화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감독의 하고픈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감독은 말하지 않는다. 그 대화를 보고 듣는 관객이 그저 판단할 뿐. 홍상수 감독은 그의 영화를 통해 관객 각자가 각자의 진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제시하고 있었다.

 

결론은 좋은 영화를 보고 진창같은 현실을 어느 정도 위로할 수 있었고, 이번 영화를 보고 장면없는 영화 시나리오를 하나 생각했고-제목은 <관객과의 대화>-홍상수 감독을 더욱 애정하게 되었고, 그와 친해지고 싶다 생각하며 그와 술 한 잔 걸치는 날을 상상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나는 모항에 갈 것이다.

 

+ 홍상수 감독은 GV를 시작하면서 관객들에게 한가지 당부를 했다. 본인은 영화를 본 후 영화에 대해 그저 느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를 그는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굳이 질문을 짜내어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고 영화를 본 느낌을 말해주면 좋겠다고 관객들에게 부탁했다. 직관과 느낌으로 생을 살아가는 홍상수 감독의 면모를 그 짧은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직관과 느낌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다. 부럽다.

2012. 5. 28. 21:35

 

 

Tyrannosaur, 2011 디어 한나
감독 : 패디 콘시딘
피터뮬란, 올리비아 콜맨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고, 그 장면에 음악을  덧입힌 그 연출이 좋았다. 영화 속 인물을 위로하는 듯하여. 조셉에겐 한나가 한나에겐 조셉이 생을 살아가면서 오롯이 그 존재를 직시하고, 의지할 수  있는 서로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영화의 원제는 <Tyrannosaur>이다. 왜일까? (20120505)

 

 

 

 

A Dangerous Method, 2011 데인저러스 메소드
감독 : 데이빗 크로넨버그
키이나 나이틀리, 비고 모텐슨, 마이클 패스벤더

 

감독님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거나, 아니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몰랐거나. 키이나 나이틀리의 턱이 빠지는 줄 알았다. 영화를 본 후 칼 융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김영사) 진도가 영 안나간다. 칼의 3-4살적 꿈에만 머물고 있다. (20120512)

 

 

 

 

The Future, 2011 미래는 고양이처럼
감독 : 미란다 줄라이
미란다 줄라이, 해미쉬 링클레이터

 

<미래는 고양이처럼>은 슬픈 영화이다. 소피보다는 제이슨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영화를 봤다. 다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면 달리 보이겠지. 달이 뜬 밤, 소피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시간을 멈추게 하는 제이슨. 시간은 멈추었으나 또 한 축으로 소피의 시간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듯하다. 그때의 제이슨이 슬프고 애처로웠다. 이 영화는 다시 봐야 할듯하다. 개인적 감정에 너무 치우치다보니 보지못하고 놓친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20120519)

 

 

 

 

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 영향 아래의 여자
감독 : 존카사베츠
지나 롤랜즈, 피터포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존카사베츠 감독 회고전을 했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존카사베츠에 대한 애정을 트윗에 끊임없이 늘어놓곤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과거 존카사베츠 감독의 <사랑의 행로>를 본 적이 있었다. 저급한 기억력으로 영화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상당히 강렬했던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본 <영향 아래의 여자>를 보고 멍해졌다. 묘했고, 슬펐고, 화났고, 짜증났고, 씁쓸했고 이런게 사는건가 싶고. 극장을 나오는데 울고 싶어졌다. 지나 롤랜즈라는 배우는 미친 배우인것같다. 문소리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지나 롤랜즈를 자신의 교과서로 삼고싶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20120520)

 

 

 

 

키사라기 미키짱

연출 : 이해제

출연 : 김한, 이인호, 권재원, 정상훈, 최재섭

 

연극은 주로 초대권을 얻어서 보곤 했는데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연극을 봤다. 대학로에 <정상가족관람불가전>을 보고 대학로 나온 김에 연극 한 편 보자고, 4인이 보면 할인해준다는 연극이 있다고 하여 연극 마니아 지인의 추천으로 <키사라기 미키짱>을 봤다. 연극을 보기 전 소극장도 영화관처럼 공연 전에 광고를 한다는 사실에 놀랬다. <키사라기 미키짱>을 한 마디로 평하자면 "음-이 연극은 지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연극이였어. 내 취향은 아니여."였다. 1년 전 자살한 아이돌 키라사기 미키짱을 추모하며 모인 5인의 오타쿠 삼촌들. 이들은 미키짱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고 말하며 미키짱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밝혀 나간다. 이 연극의 미덕은 5명의 등장인물이 어느 누구도 도구화되지 않고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5명의 이야기를 다 하려고 하니 극은 지루했고, 배우들의 연기가 안타까웠다. 연극인에게 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번 연극을 보며 다시 한 번 느꼈다. (20120526)

 

 

The catcher in the rye, 1951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나디아의 추천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홀든 코울필드를 지금의 내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과거의 내가 만났더라면 좋았을까? 시간이 지난 뒤의 내가 다시 홀든 코울필드를 만나면 다르게 그를 인지하겠지. 지금 현재 나는 '그대가 바라보는 세상의 사람들이 시시하고 모두가 적과 같이 느껴진다면 나는 홀든 코울필드 그대 또한 그러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주인공 홀든이 학교를 떠나 학교도 집도 아닌 뉴욕에서의 몇시간(?)을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해 나간 것은 문자로 형성된 소설이라기보다는 영화적 표현이 느껴지는 소설같았다. 영화 <파수꾼>은 <호밀밭의 파수꾼>에 영향을 받아 제목을 그리 만든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20120528)

2010. 11. 30. 17:22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첫번째 작품인 카페느와르 포스터가 나왔다는 것을 그의 트위터를 통해 알게되었다. 정성일 평론가를 마음에 품고 있는 B군은 이 영화 촬영 당시 엑스트라로 출연했었다. 부산에서 카페느와르를 보고 B군은 그 영화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덩달아 나도 궁금해졌던 영화 카페느와르, 12월 30일에 개봉한다. 그리고 영화포스터가 나왔다. 포스터에 대한 느낌을 말하고 싶어 포스팅을 한다.

첫번째 포스터 속 사진은 마치 홍상수 영화 포스터를 닮았다. 흑백사진에 정유미가 등장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첫번째 포스터 속 두번째 사진은 음-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전면 거울을 향해 바라보고 무표정으로 셀카를 찍는 모습, 영화 속 한 장면인 것 같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전면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일까? 실제의 내가 거울에 비친 나를 응시하고, 거울 속 내가 다시 실제의 나를 응시하고, 내가 나를 응시하는 순간을 스스로 카메라에 포착한다는 행위의 설정이 재미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포스터에 감도는 붉고 푸른 기운이 뭔가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담백하게 포스터에 영화 속 장면이 담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네이놈에 기록되어 있는 카페느와르 소개글을 잠시 가져온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취하면서,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깔아놓으면서, 다양한 한국 영화를 영화 속에 인용하는 작품.' 영화는 허우샤우시엔 감독의 빨간 풍선도 일정정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두가지 버전의 포스터에 모두 빨간 풍선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빨간 풍선은 어떤 의미로 등장하는 걸까? 카페느와르 포스터를 보면서 허우샤우시엔 감독의 영화 빨간 풍선이  떠올랐다. 카페느와르 포스터는 빨간 풍선에 대한 오마주인 것일까?

여튼 12월 30일 정성일 감독의 영화 카페느와르가 개봉한다. 3시간이 넘는 영화 카페느와르, 궁금하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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