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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30. 00:12


2011년 겨울 영화 <카페 느와르>를 보고, 2013년 1월 <카페 느와르>를 다시 보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198분이다. 상영시간이 꽤 긴 영화, 하지만 그 길이가 길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다. <카페 느와르>의 부제는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이다. 영화의 부제가 원제보다 영화를 더 잘 설명해준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집중해서 보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러닝타임 198분의 영화는 시작점부터 110분까지, 그리고 그 이후부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까지 두개의 다른 이야기가 하나의 제목으로 묶여있는 것과 같은 형식을 띄고 있다. 거칠게 나누면 두개의 이야기로 나눠질 수 있지만 조금 더 세분화하면 네개의 이야기로 나뉘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소녀가 화면 앞에 햄버거를 들고 등장한다. "하느님, 저를 보살펴주소서."라고 말하고 슬픈 얼굴로 햄버거를 우악스럽게 먹는다. 화면이 바뀐다. 서울의 이곳저곳이 영화 속에 담긴다. 허물어짐과 재건을 반복하는 서울의 풍경을 담으면서 '뒤엉켜버린' 서울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뒤엉킴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순간이 덕수궁 앞에서 수문장을 해야하는 이들이 남산 서울타워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허물어지고 세워지는 끝없는 반복 속에서 근원이 무엇인지 알수없게되어버린 서울 풍경을 뒤로하고 신하균과 문정희가 등장한다. 영수(신하균)는 담임을 맡고 있는 정윤의 엄마 미연(문정희)을 사랑한다. 하지만 미연의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오자 미연은 서울천년타임캡슐이 묻혀 있는 장소에서 그만 만날 것을 선언한다. 영화 시작부터 110분까지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근거로 서술된다. 영수는 미연을 사랑하지만 영수와 미연은 만날 수 없는 운명에 갇혀있고, 또다른 미연2는 영수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망하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미연2는 동물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지만 기다리는 누군가는 오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미연2에게 낯선 사내가 접근한다. 미연2와 낯선사내는 의미도, 의도도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의미도 의도도 없는 대화이지만 '주제'는 존재한다. 어느덧 21세기가 왔고 우리는 쓸쓸하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전환하여 영수는 카페에서 미연2를 기다린다. 낯선 여인이 낯선 사내처럼 느닷없이 영수에게 말을 건넨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체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많은 지옥 중 체념이라는 지옥은 그나마 나은 지옥일 것이어요. 미연2와 영수는 길을 걷는다. 그리고 미연2는 말한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일부가 되어 예정되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쓸쓸하잖아요. " 영수는 음악실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친다. 정윤이 다가와 곁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친다. 그러다 뽕짝버전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고, 정윤은 영수에게 말한다. "선생님, 살면서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여자 한명즘은 분명 존재할 것이에요. 그러니 선생님, 포기하지마세요. 노력해보세요." 영화를 보러가자던 미연2의 제안을 거절하고 영수는 미연을 만난다. 그리고 미연은 정윤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 넓은 세상 천지에 당신의 마음의 소원을 총족시켜 줄만한 여자가 한 사람도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결단코 한번 찾아 보셔요. 틀림없이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요즈음 스스로 그러한 옹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벌서부터 당신을 위해서나 우리들을 위해서 걱정을 하고 있답니다.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한 번 해보셔요! 여행을 하면 기분전환이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럴겁니다! 구해보셔요.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자를 발견하여 돌아오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다함께 참다운 우정의 큰 환희를 맛보도록 해요.


영수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한강 유람선에 몸을 싣고 아무렇지 않게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 상황을 목격하던 햄버거 먹던 소녀는 놀라고, 그 죽음을 보고 살기를 결정한다. 그리고 영수는 물속에서 종종 만나는듯한 물속의 벙어리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 벙어리 소녀의 대사는 자막으로 처리되고 그 대사 또한 문어체의 대사이다. 이처럼 영화 <카페 느와르>는 문학 작품 속 말들을 그대로 가져와 영화 속 인물들이 말하게끔 하였다. 문어체의 대사는 어색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배우들의 입을 통해 다시 재생될 때는 고전 속 인물들이 되살아나 내 주변을 맴도는 듯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마치 내가 고전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상상하고 나름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영화가 고전 작품을 재현하는 독자가 되어 하나의 독창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정성일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재현인 것이다.


이렇게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의 1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끝이 난다. 그리고 2부가 시작된다. 영화의 타이틀이 뜨고 영화는 언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냐는듯 태연스럽게 또다른 시작을 알린다. 물속에서 걸어나온 영수는 종로 점쟁이의 작은 천막에서 점을 보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리라."는 말을 듣고 서점을 찾는다. 물속을 유영하듯 젖은 채로 서점가를 거닐던 영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책장에서 꺼냈다가 다시 다른 서가에서 <백야>를 꺼낸다. 두번째 이야기는 도스프도예스키의 <백야>를 원작을 기반으로 서술된다.  도스프도예스키의 <백야>는 읽지 않았다.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재현을 통해 접한 <백야>가 나의 첫번째 <백야>이다. 한 여인이 한 사내를 기다린다. 하지만 사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백야, 하얀밤의 시간. 여인은 하얀밤이 찾아오는 시간에 사내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여인은 우연히 영수를 만난다.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영수에게 여인은 마음을 연다. 영수 또한 그녀에게서 또다른 사랑을 느낀다. 영수는 미연이 말했던 것처럼 영수의 마음의 소원을 충족시켜줄만한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여인을 연기한 배우는 정유미다. 그녀는 꽤 긴 시간동안 여인과 사내의 이야기를 문어체로 말한다. 배우 정유미가 텍스트를 읽는다. 소설<백야>를 읽는다. 그리고 배우 정유미가 음성으로 소설<백야>를 관객, 독자에게 전달한다. 텍스트가 눈앞에서 이미지화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이 영화는 구현하는 것이다. 정유미를 통해 구현되는 <백야>는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느낀다.


<카페 느와르> 2부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정유미의 독백 장면과 정유미의 독무 장면이다.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하는 정유미는 카페의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정유미의 독무 장면을 통해 배우 정유미에 대한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사랑이 여실히 드러났다. 친구는 배우 정유미를 보며 그녀는 '사랑받는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말에 걸맞게 배우 정유미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독무 장면에서 마음껏 드러낸다. 


이처럼 <카페 느와르>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사랑하는 것들'의 스크랩북이기도 하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사랑하는 고전작품들과 음악, 시(브레히트), 영화. 그는 그의 영화 속에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빛을 잃지 않도록 고결하게 스크랩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존경하는 영화 감독들에 대한 경의를 그는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 허우 샤오시엔과 아핏차퐁위라세타쿤을 연상시키는 소품과 장면을 보며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마음을 보았다. 그리고 <올드보이>, <괴물> 등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에선 한국영화에 대한 그의 칭찬도 읽혔다. 또한 그는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영화 속에 스크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영화 속에 봉인하고 있었다. 영수가 서점을 유영하는 장면에서 많은 보조출연자들이 등장한다. 새벽 시간에 촬영된 그 장면의 보조출연자들은 정성일 영화평론가를 사랑하는 팬카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 '사랑'을 영화로 매듭짓고 있었다.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스크랩북 <카페 느와르>의 숨은 코드를 나는 극히 일부분만 알고 확인할 수 있을 뿐, 엄청난 지식과 교양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사유하는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심어 놓은 '날 것 그대로의 것들'과 상징을 모두 읽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누군가가 내곁에서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 설명을 해주었으면 하고 소망했고, 동시에 소위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나도 섭렵하고 싶다고 욕망했다.


<백야>파트에서 영수는 미연이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 여인은 그의 환각 속에 만들어진 여인이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는 시간 동안, 사경을 헤매이다 사경의 어디즘에서 만난 여인인 것이다. 다시 사랑하게 된 여인이 기다리던 사내에게 작은 새처럼 포로로 날아가자 영수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나이든 노모만이 소리없이 울고, 언제나 그의 곁에서 맴돌던 남산타워가 그의 방 창밖에 있다. 영화는 끊임없이 남산타워를 등장시킨다. 인물이 어디를 걸어도 보이고, 서울의 중심가에서 촬영된 영화의 공간은 남산타워 바운더리에 속해있다. 남산타워가 고개를 돌리면 어디에나 볼 수 있는 도심의 붉은 십자가를 닮았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은연중에 관객들에게 '종교'에 관하여 묻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초반 "하느님 저를 보살펴주소서."라고 말했던 소녀의 구원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남산타워는 십자가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대부분 이 영화가 두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네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원치않은 아이를 품은 소녀의 이야기, 미연과 영수의 이야기, 영수와 여인(정유미)의 이야기, 미연2와 은하(요조)의 이야기. 이 네개의 이야기는 분절되면서도 하나로 묶여있다. 원치않은 아이를 품은 소녀가 남산을 오른다. 친구가 묻는다. "이제 어떻게 할건데?" "낳아야지." "낳아선 어떻게 할건데?" "키워야지." "키워서는 어떻게 할건데." 


"살아야지."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최종적으로 이 말을 하고싶었던 것은 아닐까. 


"살아야지."


 체념도 아닌, 그렇다고 다부진 각오도 아닌, "살아야지"라는 한마디를 통해 그는 산다는 것에 대한 소박한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깊은 밤, 내부순환도로를 함께 달리는 미연2와 은하(요조)의 덜덜거리는 질주는 불안하지만 위로가 되었다.  


19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이 영화는 나의 머리를 끊임없이 자극했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아주 훌륭한 영화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카페 느와르>는 곁에 두고 기억해야할 영화로 나와 인연을 맺었다.


+ 다이알로그와 텍스트의 불일치. 소리의 존재와 이미지의 부재도 생각해보자.


+ 정성일씨의 영화에 대해 기록한다는 것이 왜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지만(부끄럽지. 뭘 모르겠지만이야!), 

다시 정정해서,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영화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 부끄럽다. 하지만 기록해본다. 얼마전 영상자료원에서 2011년 화제작을 재상영했었다. 상영작 리스트 중 하나가 <카페 느와르>였다. 극장이 많이 멀었지만 좋은 상영관에서 공짜로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기뻤다. 영상자료원을 종종 찾아야겠다.


+ 쓰다가 만 글. 일주일만에 다시 썼다. 나는 이글을 매듭지은 것에 대해 스스로 칭찬한다. 잘했다! ㅎ

(20130119)

2012. 6. 9. 02:27

 

 

산다는 것이 참 찌글스럽다. 오늘 하루는 진창같은 하루였다. 자책도 하고, 울기도 하고, 정신차려야 겠다, 다짐도 하고 여튼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나 오르고 내리고 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가는 길 적절히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서 좋았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한참 서서 멍하니 비내리는 장면을 봤다.

 

한참 비나리는 장면을 보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 좌석에 앉는다. 영화 시작 전 10여분을 앞둔 시간. 나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그 순간이 좋다. 어떤 장면들이 내 앞에서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늘 설렌다.

 

영화 엔딩이 끝나는 순간, '역시 홍상수다.'라고 생각을 했다. 홍상수 감독의 초기작은 본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이다. <밤과 낮>,  <잘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오늘 본 <다른 나라에서>를 제외하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섰던 기억은 있는데 솔직히 영화의 장면들과 이야기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감정들을 일괄적으로 표현하자면 좋았다는 것. 별로인 영화들도 있었던 같긴 하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홍상수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하하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했고, <옥희의 영화>를 보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대가 컸다. 나의 저질스러운 기억력때문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다른 나라에서>"라고 무식하게 답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아름답다.'라고 연신감탄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왜 아름다운 영화인가?

<다른 나라에서>는 크게 세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등장한다. 세개의 에피소드 중 첫번째 에피소드가 끝나는 순간 영화가 너무나 아름답고 슬퍼서 혼이 났다.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안느와 안전요원은 등대가 어디에 있는지 서로 물으며 대화를 나누게 되고, 안전요원의 텐트 안에서 또 대화를 나눈다. 안전요원은 뷰티풀네임을 가진 안느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 안느는 안전요원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안전요원은 그 편지를 읽지 못한다. 그 장면이 어찌나 슬프고 아름다운지. 홍상수 감독은 첫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불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안전요원은 안느에게 뷰티풀이라고 말하지만 뷰티풀의 b를 p로 잘못보고 그 언어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 이후의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안느와 안전요원은 거기에서 그냥 끝을 맺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동일한 언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행간에 함축된 의미를 읽지 못해, 혹은 같은 단어와 문장을 보고 들어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서 겪게 되는 불통의 비극을 우리는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홍상수 감독은 그 불통의 비극을 너무나도 위트있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비극은 극대화되었다.

 

꿈과 상상, 현실의 변주_그 무경계함을 말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를 모르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이것이 영화 속 주인공의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시간이 있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씨는 홍상수 감독에게 '꿈'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현실이라는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이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그는 답했다. 그 말에 '아, 그래서 홍감독 영화를 만드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본다.'라고 생각했다. 진창같았던 하루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권해효씨를 보며, 유준상의 "아윌프로텍트유"를 들으며 극장에서 내내 큭큭 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영화의 엔딩이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지면서 찌글스러웠던 오늘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 중 하나로 술을 마시고 취했을 때도 언급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엔 술을 마시고 취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두번째 에피소드의 문성근씨 또한 그랬다. 그는 만취하여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귀엽게 질투를 했다. 문의 연기는 징그러울 정도로 리얼해서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문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그의 행보와 무관하게 연기하는 순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던져버리고 있었다. 대단하다.

 

요즘엔 꿈을 상당히 많이 꾼다. 꿈 속에선 다양한 이들이 등장하고 내게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나의 꿈 이야기를 스승님에게 말했더니 스승님은 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모두 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승님도 하루는 꿈 속에 5명의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5명의 사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꿈 속의 각기 다른 등장인물이 결국엔 다 자기였던 것같다라고 했다. 현실과 꿈은 경계를 가지고 있는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경계가 없는 것이다. 현실을 경험하는 이도 나인 것이고, 꿈을 꾸는 주체도 나이기때문에 현실과 꿈을 경험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꿈이든 현실이든 하나의 경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이것이 현실이다, 혹은 꿈이다라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이러한 무경계함을 진작에 알고 있었고 그는 꿈과 현실의 무경계함을 적극적으로 다양한 변주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었다. 두번째 에피소드가 특히 현실과 꿈의 무경계함을 열심히 표현하고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과 꿈의 무경계함을 말하는 동시에 생의 다양한 변주를 그의 영화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사실에 근거하여 존재한다기 보다는 믿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 인상 깊었던 것 등 제각각 주관적 기억력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인간들이 비슷한 어쩌면 동일한 경험들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렇기에 첫번째 에피소드 해변가의 소주병은 한국사람이 버린 것있을 수도 있고, 안느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안느가 쟁여두었던 우산은 어쩌면 세번째 에피소드의 안느가 숨겨 둔 것일 수도 있고. 모항의 좋은 풍경을 안내해주겠다던 첫번째부터 세번째 에피소드의 원주는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고.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세번째 에피소드까지 모항해변에서 수영을 하던 안전요원의 시간은 분절된 시간일 수도 있고 연속된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별개의 시간이면서도 뭉개진 시간일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세번째 에피소드 모두가  한사람의 경험일 수도 있고 수많은 인간군상의 동시다발적 경험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철학을 논하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첫번째 두번째 에피소드에 비해 상당히 튄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올 김용옥이 등장하는 것도 낯설었고, 안느와 스님(김용옥), 박숙(윤여정)의 대화장면도 뜬금없었다. 하지만 그 장면은 달리 표현하면 명쾌하고 시원했다. 살아가면서 생각없이(?) 마구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우리는, 누군가가 뜬금없어한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제대로 묻지 못하며 살아간다. 묻는이도 그러하지만 답하는 이도 그러하다. 나의 답변에 대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이렇게 답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강박에 갇혀 침묵하는 경우도 왕왕한 것이다. 하지만 안느와 스님은 그런 강박에 벗어나 묻고 싶은 것을 묻고 답하고 싶은대로 답한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옳고 그런지를 떠나 그 과정속에서 제 나름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의 영화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었다.

 

나도 홍상수 감독에게 강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질문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하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묻지않고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하고픈대로 행하였다. 그 행함이 나를 더욱 자유롭게 만든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책임'에 관한 안느, 금희(문소리), 종수(권해효)의 대화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감독의 하고픈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감독은 말하지 않는다. 그 대화를 보고 듣는 관객이 그저 판단할 뿐. 홍상수 감독은 그의 영화를 통해 관객 각자가 각자의 진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제시하고 있었다.

 

결론은 좋은 영화를 보고 진창같은 현실을 어느 정도 위로할 수 있었고, 이번 영화를 보고 장면없는 영화 시나리오를 하나 생각했고-제목은 <관객과의 대화>-홍상수 감독을 더욱 애정하게 되었고, 그와 친해지고 싶다 생각하며 그와 술 한 잔 걸치는 날을 상상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나는 모항에 갈 것이다.

 

+ 홍상수 감독은 GV를 시작하면서 관객들에게 한가지 당부를 했다. 본인은 영화를 본 후 영화에 대해 그저 느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를 그는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굳이 질문을 짜내어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고 영화를 본 느낌을 말해주면 좋겠다고 관객들에게 부탁했다. 직관과 느낌으로 생을 살아가는 홍상수 감독의 면모를 그 짧은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직관과 느낌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다. 부럽다.

2012. 5. 13. 21:48

 

5월 31일 개봉.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곧 볼 수 있게 되어 좋다.

<다른 나라에서>

2010. 11. 30. 17:22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첫번째 작품인 카페느와르 포스터가 나왔다는 것을 그의 트위터를 통해 알게되었다. 정성일 평론가를 마음에 품고 있는 B군은 이 영화 촬영 당시 엑스트라로 출연했었다. 부산에서 카페느와르를 보고 B군은 그 영화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덩달아 나도 궁금해졌던 영화 카페느와르, 12월 30일에 개봉한다. 그리고 영화포스터가 나왔다. 포스터에 대한 느낌을 말하고 싶어 포스팅을 한다.

첫번째 포스터 속 사진은 마치 홍상수 영화 포스터를 닮았다. 흑백사진에 정유미가 등장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첫번째 포스터 속 두번째 사진은 음-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전면 거울을 향해 바라보고 무표정으로 셀카를 찍는 모습, 영화 속 한 장면인 것 같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전면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일까? 실제의 내가 거울에 비친 나를 응시하고, 거울 속 내가 다시 실제의 나를 응시하고, 내가 나를 응시하는 순간을 스스로 카메라에 포착한다는 행위의 설정이 재미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포스터에 감도는 붉고 푸른 기운이 뭔가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담백하게 포스터에 영화 속 장면이 담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네이놈에 기록되어 있는 카페느와르 소개글을 잠시 가져온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취하면서,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깔아놓으면서, 다양한 한국 영화를 영화 속에 인용하는 작품.' 영화는 허우샤우시엔 감독의 빨간 풍선도 일정정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두가지 버전의 포스터에 모두 빨간 풍선이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빨간 풍선은 어떤 의미로 등장하는 걸까? 카페느와르 포스터를 보면서 허우샤우시엔 감독의 영화 빨간 풍선이  떠올랐다. 카페느와르 포스터는 빨간 풍선에 대한 오마주인 것일까?

여튼 12월 30일 정성일 감독의 영화 카페느와르가 개봉한다. 3시간이 넘는 영화 카페느와르, 궁금하다. 기대된다.

2010. 10. 30. 23:24


홍상수 감독 '옥희의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아차산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홍상수 감독은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일상의 공간을 카메라에 담고 그 공간에 인물을 얹히고 그 인물들에게 말을 하게 함으로써 공간과 인물 그리고 말의 묘한 조화를 훌륭하게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해변의 여인'과 신두리,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제주도, '하하하'와 통영, '옥희의 영화'와 아차산, 그의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 나도모르게 "그곳에 한 번 가봐야 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10월의 마지막자락 그래서 나는 아차산을 다녀왔다.

'옥희의 영화'의 네번째 영화 '옥희의 영화'의 촬영지 아차산, 영화 속 그녀처럼 운동화에 점퍼 차림으로 물병 하나 손에 들고 산에 오른다. 나이든 남자와 옥희, 젊은 남자와 옥희가 차를 주차한 주차장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다. "산에 오면서 차가지고 오는 사람, 잘 이해가 안되요." 그 주차장을 바라보며 영화 장면을 다시 한 번 그려본다.

그리고 산 입구에 있는 사슴동상도 한 번 바라본다.  나이든 남자와 옥희는 사슴을 보고 한마디씩 했고, 젊은 남자와 옥희는 사슴을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나는, "이 사슴 쇠로 만든걸까요? 아님 종이? 밤에는 조명도 들어오나봐요." 그리고 별 생각하지 않고 걷는다. 어느 위치에서 카메라를 잡았을까? 비오는날 옥희와 옥희의 친구가 우산을 들고 함께 걷던 길이 이 길일까? 생각을 하며 내가 돌아온 길을 다시 되돌아 본다.



얼마 안가니 나이든 남자와 옥희가 올려다 봤을 법한 잘생긴 소나무가 보이고, 젊은 남자와 옥희가 키스를 한 바위 언덕이 보인다. "아니 이 사람들 여기까지 밖에 안 오고 돌아간거야. 나이든 남자는 정말 '나이'때문에 산행을 시작한지 30여분도 안된 시점에서 내려가자고 한 것일까?" 영화 속 시간 개념과 현실 시간 개념을 따져 묻다가 굳이 뭐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을 하며 잘생긴 소나무에 집착을 한다. "잘생긴 소나무라면 어떤 소나무일까?" '하하하'에서 성옥(문소리)이 문화재 해설을 하던 통영 제승당에 있는 소나무 정도되야지 잘 생긴 소나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통영 제승당의 소나무처럼 붉은 표피에 쭉쭉 뻗은 소나무는 아차산 바위언덕자락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이든 남자의 소박함에 괜시리 마음이 짠해진다. 

주차장, 아차산 입구, 잘생긴 소나무, 바위언덕 그리고 화장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경은 30분이라는 현실 시간 개념안에서 모두 등장한다. 세인물이 모두 다녀갔던 화장실은 공사 중인 듯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영화에 얽힌 걸음을 그만두고, 영화 속 시간을 탈피하여 나의 시간 속 아차산 길을 오른다. 높지 않지만 능선을 따라 걸으면 꽤 장시간 걸을 수 있을 듯한 산, 서울의 동서남북이 한 눈에 다 들여다 보이는 산, 한강과 가까이 있는 아차산은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총 1시간 30분 정도 걸었을까? 운동화에 점퍼 그리고 청바지, 간단한 차림이어 장시간 걷진 못했다. 아니 의상의 핑계라기보다는 그 이상 걸을 의지가 없었다. 탁트인 풍경을 눈앞에 두고 생각을 했다. "나도 영화 만들고 싶다." 한강이 시원하게 보이는 산 어디즘에 앉아 그에게 제안을 했다. "졸업하기 전에 영화 한 편 같이 만들어 보는 것 어때요?" 연애가 끝나고 상대에게 계속해서 질척거리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가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다. 영화 생각을 해야겠다. 아차산 휴게소에서 잔치국수 두그릇에 막걸리 한병을 시켜 먹고 살짝 알딸딸한 기운에 산을 내려온다.

땡스, 옥희의 영화! 땡스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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