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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2건
2012. 10. 9. 03:00

1.

부산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김이설의 소설 <환영>을 읽었다. 햇볕에 빨래가 빠짝 마르는 순간 같은 때가 살면서 얼마나 될까. 너무 좁아 섹스를 하다 몸을 기이하게 구길 수 밖에 고시원에서 옥탑으로 이사갈 때, 옥탑에서 방 2개 딸린 반지하로 이사 갈 때 느꼈던 그 빠짝한 감정을 느끼는 날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 날들이 나아진 날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아졌다고 믿고 싶은 환각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최선인지 최악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순간. 아니다. 판단하지 말자. 생이라는 것 버티면 못 버틸게 없는 게 생이고, 익숙해지면 못할 것이 없는 것이 생이다. 서영은 살고 있다. 죽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니까 사는 것이다. 서영은 살고 있다. 그저 살고 있음을, 하루하루 증명하는 서영 곁에 아무 말 없이 우직하니 서 있고 싶었다. 

 

'어느 겨울이든 그러하겠지만, 지난 겨울은 유난히 더 춥고, 지난했다. 진작 봄인데, 아직도 겨울의 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어느 계절이 되어도, 지난 겨울을 아파할 것이다. 그것의 나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 소설 <환영> 작가의 말 中에서 

 

작가의 말에 있는 이 구절이 박힌다. 그리고 공감을 한다. 헌데 나는 도리를 지키고 사는 사람인지 생각해본다. 그러하지 못한 것같다. 내가 지켜야 할 도리를 너무 쉽게 변명이라는, 자기정당화라는 봉투에 담아 잘도 내다버린다. 나는 좋은 사람인지, 도리를 지키는 사람인지 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 말뿐인, 순간만 있는 사람이고 싶지 않은데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일단은 삶에 충실해야하는데 그것이 어렵다. 너무도 어렵다.

 

2.

부산에서 3편의 영화를 봤다. <장군과 황새>라는 이탈리아 영화와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와 <온화한 일상>이라는 일본 영화 두 편을 봤다. <장군과 황새>를 보면서 얼마 전에 읽은 김혜리 기자의 인터뷰 글이 떠올랐다. 배우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묻는 후배들에게 인터뷰이 이병헌은 '철들지마라'란 말을 한다고 했다. 이병헌과 실비오 솔디니 감독은 '철들지 않았다.'라는 교집합을 가지고 있었다. '철들지않고 산다는 것' 그것은 창작의 원천이고, 예술의 시작이라는 것을 느꼈다. 철들지 않음으로부터 오는 실비오 솔디니 감독의 말랑이는 상상력과 위트가 좋았다. 특히 황새 아우구스티나와 교감하는 소년의 그 감수성이 좋았다. 그러한 감수성을 살면서 잃지 않고 유지하며 산다는 것은 감사한 일일 것이다.

어쩌다보니 일본영화, 그리고 3.11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게 되었다. <웃는 남자>를 보고 싶었는데 바로 코 앞에서 표가 매진되었다. 켄로치 감독의 영화를 볼까?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를 볼까? 고민하다 켄로치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든 보게 되지 않을까 싶어 제목이 매력적인 일본 영화를 택했다. 일본에서는 3.11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을 상당히 제작하고 있는 것같다. 지난 4월 여성영화제 때도 그렇고, 이번 부산 영화제에도 3.11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이 여러 편있었다.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를 보면서 여자 주인공이 해일로 뒤덮힌 마을의 잔재가 그대로인 해변가를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행위를 반복하는, 조깅 장면이 인상깊었다. 공통의 경험, 생을 뒤흔드는 천재지변의 트라우마를 겪어도 생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 위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오는 순간이 덧해지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이를 죽인 이를 사랑하게 되는 쉬이 받아들 수 없는 순간이 덧해지기도 한다. 답을 구하는 과정도, 시간도 없이 그저 덧하고 덧하고, 직면하고 직면하는 것이라고 후나하시 아츠시 감독은 말하고 있었다. 특히 감독은 다쿠미와 시오리의 '사랑'에 집중한다. 벚꽃은 망설임이라고 말하던 겐지, 망설이고 망설이다 어느 순간의 타이밍에 만개하는 벚꽃은 다쿠미와 시오리의 관계를 은유한다. 극장을 나오면서 내가 느끼는 이 어정쩡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생각했다. 영화제 프로그램북에 쓰여있는 영화 소개에는 '3.11'의 단어와 '사랑'이라는 언어가 동시에 쓰여 있었고 '3.11'쪽에 분명 부등호가 향해 있다고 나는 이해했는데 정작 영화는 '사랑'에 확실한 부등호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속은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정쩡하다고 느꼈다.

<온화한 일상>은 인터넷 예매를 성공한 영화다. 예매가 시작되고 한참 후에 예매를 했는데 다행히도 표가 있었다. 3.11 지진 이후 사람들이 가지는 공포와 불안함, 그 공포와 불안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드러내는 사람과 그 공포와 불안함을 애써 보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지진 이후 사에코는 딸 키요미가 방사능에 노출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방사능측정기를 가지고 키요미의 유치원을 찾아간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사에코가 불안을 조장한다며 그녀를 집단적으로 무시하고 매도한다. 지진 이후의 불안함과 관계의 일방적 폭력을 견디다 못한 사에코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사에코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유카코 역시 걱정과 불안으로 마스크 상자를 들고 무작정 집근처 어린이 집으로 찾아가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착용할 것을 요청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지진이 일어난 이후 마트엔 밥한끼 지을 수 있는 생수 한통조차 남아있지 않다. 지진지역에서 피난 온 이들에게 방사능을 몰고 왔다며 피난민의 차에 '돌아가라'라는 종이를 사람들은 붙인다.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무정함. 두렵지만 두렵다고 말하지 않는, 그러나 슬픔과 두려움이 결집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 영화는 집단적으로 겪는 엄청난 사건에 있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온화한 일상>의 필름엔 당시의 두려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온화한 일상>은 온화하지 못한 일상의 역설적 표현이다. 그리고 <온화한 일상>은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회피, 침묵에 대한 직설적 표현이다. 우치나노부테로 감독은 언제 또 이 공포의 순간이 또 닥쳐올지 모르지만, 여전히 두렵지만 그 순간이 왔을 때 있는 힘껏 "두렵다."라고 말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있을 것이라고. 그 손을 잡고 그 다음을 생각해보자고.  

 

3.

부산국제영화제를 몇 번 다니면서 '달맞이 고개'라는 곳을 처음 알았다. 미포항 근처에 있는 달맞이 고개. 달맞이 고개에 있는 해월정을 향해 걷다보면 광안대교와 해운대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뷰포인트를 만날 수 있다. 광안대교는 광안리 해변에 가야지만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해운대에서도 광안대교를 볼 수 있었다. 밤에 바라보는 광안대교는 예뻤다. 달맞이 고개는 이름 그대로 고개를 오르면 오를 수록 달에 점점 더 가까워져 정말 달을 마중하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달맞이 고개에서는 바라보는 풍경은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과는 다른 묘미를 전했다. 순간 제주에 온줄 알았다. 섬에서 바다를 보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넓고 푸른 바다와 끝없는 수평선을 볼 수 있다. 왜 몰랐을까. 걸으면서 "좋다. 좋다."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 길을 걷다보면 부산 해운대는 역시 부자 동네라는 것을 확실히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데 뭔가 기분이 찜찜했다.  

 

4.

2008년, 2010년, 2011년 그리고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2008년에 본 영화들 중에는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이 기억난다. 2010년에는 지아장커 감독의 <상해전기>를 비롯해 총 4편의 영화를 봤다. 2011년에도 분명 부산에 다녀왔는데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당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뭘 봤었지? ㅠ 정말 기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진짜 뭘 봤지? 영화를 본 것이 맞았던 것일까?

 

2012. 9. 23. 23:13

 

 

 

 

지난 금요일 밤엔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다. 그래서 어제는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만 있었다. 집에 있으면서 텔레비전을 이것저것 많이 봤다. <쇼! 음악중심>도 보고, 정말 오랜만에 <우리결혼했어요>도 보고, 금요일밤에 못본 <슈퍼스타K4> 재방송도 보고, <무한도전>도 봤다. <무한도전>을 보면서 막 웃고 있는데 웃는게 마냥 즐겁지만 않았다. 유재석과 박명수를 보면서 마음 한 켠이 짠해졌다. 캐릭터를 만들고, 다지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는데 그렇게 만들고 다져온 캐릭터만으로 밀고가기엔 이제 불안하다는 그들의 심정이 느껴졌다. 그들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유재석은 파업전후로 캐릭터가 달라진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업 후 다시 한 번 'cheer up'하겠다는 그의 각오와 다짐이 보이는데 그 각오와 다짐에 눌려 그가 즐기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무한도전>을 보고 있는데 마냥 즐겁지가 않더라. 내가 막 유재석과 박명수에게 휴가를 주고 싶더라. ㅠ

 

<우리결혼했어요>는 욕하면서 계속 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처음 <우결>이 방송에 나왔을 때 "뭐 이딴 프로그램이 다 있어?" 욕을 하면서도 보게되는 것이다. 이번 <우결>커플은 시크릿의 선화와 제국의 아이들의 광희인데 이 아이들은 뭐 하나만 툭 건드려도 꺄르르 즐겁고 신나라한다. 그런 캐릭터의 조합이 정신 없지만 귀엽더라. 역시 예능프로그램의 관건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어떻게 만드냐인 것 같다. <우결>은 끊임없이 연애와 결혼의 말도 안되는 환상각본을 재생산하는데 이것이 말도 안되는 '환상'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빠져든다. 오밀조밀한 집에서 이쁜 홈웨어 입고, 아기자기 요리를 하고 꺄르르 웃고 떠드는 것이 일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런 집과 시츄에이션을 쉬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욕망의 싹을 보면서 틔우는 것이다! 상상력이 제한 된 시대, 제한 된 세계에서 누구나 한 번 즘 다 욕망하는 그것을 자극하는 것, 그 포인트가 이 방송의 장수 비결이다. 이건 P.S, 요즘 시크릿의 노래가 계속 귓속을 맴돈다. 자기 전에도 계속 맴돈다. 시크릿의 송지은은 참 이쁘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보면볼수록 참 이쁘다는 생각이 든다. ;

 

<슈퍼스타K 4>는 예전만큼 재미있지 않다. 그땐 참 재미있었는데 요즘엔 왜 그때만큼 재미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동생 말에 의하면 올해 <슈스케4>는 출연자의 감동스토리가 과하다는 것이 재미없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그렇지만 감동스토리는 작년에도 상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일에 이제 내가 너무 익숙해진걸까? 그래서 이젠 신선하지 않은 것인가? 그래도 올해 출연자 중 로이킴과 정준영은 정말 내 눈을 훈훈하게 하는 이들이다. 보고 있으면 어미가 잘 키워놓은 자식을 보는 기분?  -_-; 둘이 동시에 한 프레임 안에 잡히면 "아이쿠! 이뻐서 어째!" 그런 심정이 절로 든다. 지난 <슈스케4>에서는 한 무대에 나란히 기타를 품에 안고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데 막 좋았다. <슈스케>는 재미없어도 편집이 짜증나도 그래도 '속는 셈 치고' 보자 라는 생각이 드는 프로그램이다.

 

 

<슈스케4>가 지난 시즌보다 재미없는 이유 하나가 퍼득 떠올랐다. 장재인, 투개월의 김예림, 신지수, 이정아, 크리스티나같은 매력적인 여인들이 없다는 것이다. <슈스케4>의 이지혜가 눈에 들어오는데 엠넷에서는 그녀를 싸가지와 외모로만 캐릭터를 만들고 있었다. 여자들도 분명 천재형, 엄청난 카수형들이 많을텐데! 왜 엠넷은 그렇게 밖에 안만드는거지? 그나마 내가 눈여겨보는 이는 '안예슬', 엠넷은 그녀를 또 어떻게 재조할런지...재미없어진 이유 중 또다른 하나는 지난 시즌에서 화제를 모았던 이들에 대한 모방과 변형이 거듭되다보니 그것이 이제는 신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요네즈는 뭔가 투개월스럽고. 또 소위 가수라고 말하는 이들이 다분한(?) 목적성을 가지고 출연하는 것이 재미의 반감을 떨어뜨렸다. 오디션프로그램의 목적이 무엇인지 기획자도 참가자도 서로 까먹어버린 시츄에이션.

 

여튼 <슈스케4>를 보고 채널을 돌려 <음중>을 보니 내가 좋아라하는 백아연의 무대가 나왔다. 그런데 그 무대를 보고 뭔가 상당히 심이 상했다. 그 심이 상하는 이유는 박진영에 대한 분노! 백아연의 노래와 무대를 보면서 "이 쉑!" 하기 싫은 숙제 하루빨리 해치우겠다는 심정으로 백아연을 데뷔시킨 것같았다. 박진영이 곡을 주고 안주고가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어떻게 백아연 앨범엔 그가 작곡한 곡은 하나도 없는지.(작사 한 곡만 딱 한 곡있다.) 무대와 의상도 <케이팝 스타>의 무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좋아라하는 백아연이 준비도 잘 하고, 좋은 곡 많이 받아(절대 박진영 곡이 좋은 곡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기획사에서 그 가수를 얼만큼 신경쓰느냐 여부는 누구에게 곡을 얼마나 받는지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저것 모든 면에서 백아연이 공을 들여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의 무대를 보며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박진영에게 더 화가난다. 그딴식으로 아이들 데려다가 무의미하게 소비할 것이라면 박진영, 다음 시즌에선 제발 아니나오면 좋겠소! 백아연이 오랫동안 활동하면 좋겠는데...그녀의 무대를 보면서 마음이 속상했다. 여튼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보며 든 생각들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본다.

 

2012. 9. 16. 22:54

'시간'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기에 사람들은 그 시간이 무한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 착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르기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 <늑대아이>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봤다. 두 영화의 공통된 주제는 아마도 '시간'이지 않을까?

 

<늑대아이>는 늑대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진 하나가 그의 부재 속에서 두 아이 유키와 아메를 기르는 13년의 시간을 순서대로 차곡차곡 기록한 영화다. 반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우연히 타임리프 방법을 습득한 마코토가 며칠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는 반복의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 <늑대아이>에 대한 평을 보면 주로 '성장'이라는 키워드 중심으로 글이 서술된다.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치열하게 그 시간에 함께 개입한 하나도 결국 성장하는 영화가 <늑대아이>이다. 감독 호소다 마모루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를 동경한다고 어느 잡지에서 말하면서 이 영화가 '성장'에 관한 영화임을 피력하고 있었다. 밭에 씨를 뿌리고 그 다음날 바로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니라사키 할아바지의 말처럼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시행착오와 기쁨, 슬픔, 괴로움, 고난 등 온갖가지의 경험이 축적된 시간의 흐름을 거치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늑대아이>에서 유키와 아메의 성장을 함축과 은유를 배제하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또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아이들의 성장이 단순히 부모와 아이라는 일대일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서술하고 있었다. 성장의 흐름 속에서 유키는 세상의 '여자아이'들이 어떻게 길러지는지를 온 몸으로 체험하며 여자답게 살아가기를 은연 중에 습득하며 결국에는 여자사람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늑대의 습성을 아메보다 적극적으로 습득하며 발휘하며 살아가던 어린 유키에게는 '늑대'와 '사람'이라는 이중의 정체성 외에도 '여성'이라는 젠더의 옷이 하나 더 있었다. 유키의 삶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젠더의 옷은 쉬이 벗어던질 수 없는 옷이었기에, 유키는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는 삶을 영화 속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아메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그 누구도 그가 '어때야 한다.'라는 특별한 강요나 요구의 제약없이 당연한 성장의 과정을 거치고 자연스럽게 늑대가 되어 숲으로 돌아간다.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유키, 늑대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아메. 그리고 두 아이로 부터 새로운 독립을 감행해야하는 하나. 영화는 그렇게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선택하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아빠 미소로 보았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보다는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의 생각이 나는 더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러 온 아이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세상의 부모들이 이 영화를 더 많이 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독립'이라는 개념은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라, 부모들 또한 반드시 각오하고 거쳐하는 과정이기때문에 그 과정을 온 몸으로 겪고 지나는 하나의 모습을 세상 부모들이 보고 공감하면서 함께 '독립'을 준비하기를 아이들은 바라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그저 본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보고싶어졌고 그래서 연달아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보았다. 만약 내게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나는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릴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결과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밟지 않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순차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늑대아이>와 달리 시간의 역행과 순행을 반복하는 영화이다. 주인공 마코토는 우연히 타임리프 방법을 습득하여 10시간 넘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일상에서 겪게 되는 작은 불행들을 피해가고, 치아키의 고백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녀가 시간을 역행하면 할수록, 그녀가 피해갔던 순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결국 내가 된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살면서 분명 그런 순간이 온다. 후회되거나 혹은 맞이하고 싶지 않은,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은 그런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역행하여 그 순간을 회피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나는 그 순간을 직면해야 하는 순간을 반드시 다시 맞이하고 그 시간을 뚫고 지나가야지만 내 생이 흘러간다는 명제를 영화를 보면서 느꼈다.

 

 

'Time waits for no one' 칠판에 쓰여있는 그 말처럼 시간은 내가 바라는대로의 속도로 흘러가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역행하지도 않고, 기다려주지도 않은채 그렇게 흘러간다. 때로는 나보다 먼저 앞서 흘러가기도 한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성취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그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배운다. 산다는 것은 시간에 나를 맡기고 그 흐름의 속도에 맞춰 유영해야한다는 것을 배우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온 존재를 다해 있는 그대로 시간을 겪어야 성장한다는 그 의미를 배우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나쳐와야하는 것일까? 내가 직면해야하는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 순간 나는 마코토처럼 타임리프를 통해 다시 주말 토요일 아침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주말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다. 이렇게 말도안되는 상상력으로 나는 시간을 뚫고 월요일로 향해간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월요일로! 꺅! (-_-;)

 

+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리뷰 '삶을 연장하는 편법, <시간을 달리는 소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6875

 

+ 조조로 <늑대아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차려먹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고, 저녁을 만들어 먹고 <정글의 법칙>과 <런닝맨>을 보고 오늘 본 영화들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글을 썼다는 나의 행위에 만족하며 호소다 마모루 감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고생스럽지만 2차원의 애니메이션을 고집을 가지고 아름답게 만드는 그가 참 고마웠다. 그의 2차원 애니메이션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기에.

 

+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OST도 참 좋다. OST를 재생해둔 채로 내내 글을 썼다. :)

2012. 9. 16. 00:20

 

 

 

오랜만에 동영상들을 검색해서 보고 듣고 있는 중이다. 양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늘 공개된 gd의 노래를 들었다. 'missing you'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다. 그 노래가 선명했던 이유 중 하나는 피처링한 김윤아의 파트가 인상깊었기때문이다. 노래의 도입은 팝풍인데, 김윤아가 피처링한 부분은 트롯트의 느낌이 느껴지는. 2ne1의 'I love you'를 들을 때도 '트롯풍의 곡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요즘 yg의 트랜드인가?

 

여튼 그동안 보고 듣고 접하지 못한 아이돌 그룹들의 영상들을 집중해서 봤다. 남자아이돌 그룹보다 여자아이돌 그룹들이 더 좋다. 오늘은 주로 카라와 컴백한 시크릿의 동영상을 봤다. 그렇게 재생에 재생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소녀시대로! 소녀시대는 일본에서 더욱 다양한 시도들을 하는 것같다. 의상, 춤, 화장, 노래 등 여러면에서 한국에서 보여주는 무대와 다른 무대를 많이 선보인다. 일본 정서에 기반한 시도들은 소녀시대를 낯설게 하면서 동시에 신선함을 전달한다. 소녀시대는 언제즘 한국에 컴백하는 걸까? 'The great escape' 노래와 무대가 좋다.

2012. 9. 2. 17:39

 

 

이 영화의 원제는 <Bonsai>, 한국말로 번역하면 '분재'다. 영화를 수입하면서 영화는 다시 <훌리오와 에밀리아>로 번역되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영화 제목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첫인상'이기에 내심 재해석 혹은 상업적 이용에 의해 영화 제목이 가급적 바뀌지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훌리오와 에밀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지만 감독은 훌리오와 에밀리아를 빌어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고, <훌리오와 에밀리아>로 번역된 영화제목은 관객들을 그 안에 가둬버리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감독 크리스티안 히메네즈는 '자연'을 좋아하고, '문학'과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 속에 머물고, 나란히 누워 문학 작품들을 읽고, 거의 매일밤 사랑을 나누는 이가 '한 때' 곁에 있었다는 것을 감독은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이 단지 '한 때'가 아니라 그가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영화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장은 프루스트로 시작한다. 2장은 피(8년 후), 3장은 몸(8년 전), 4장은 다시 8년 후(4장의 소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6장의 소제목도 불확실하다.), 5장은 탄탈리아(8년 전), 6장은 분재(8년후)로 시간이 구성되고 교차된다. 1장을 제외하고는 소제목 아래에 '8년 전' 또는 '8년 후'라고 시간도 함께 기록된다. 소제목 아래의 시간 표시를 보면서 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8년 전'이라고 하면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를 말하는 것이고, '8년 후'라고 하면 '8년 전'을 기준으로 시간이 지난 미래의 '8년 후'로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화자는 두 개의 시간영역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사랑을 나누고, 이별하고, 다시 고독과 외로움을 견디다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그 과정들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감독은 소제목 아래의 시간 표시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책들과 훌리오와 에밀리아가 머물렀던 공원과 노닐었던 나무, 강(江) 즉 자연의 풍경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분재도. 감독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이고, 자연을 좋아하는 이라는 것을 영화에서 느껴졌다. 우디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을 알게되었다. 그책이 7권이나 된다는 것과 그 책을 다 읽는 것은 보통 작업이 아니라는 것은 고래씨를 통해 알게되었다. 영화 시작에 교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사람?"이라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영화 중반에 훌리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장을 에밀리아에게 읽어주고, 영화 마지막에 훌리오가 읽었던 그 구절이 다시 한 번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때로는 촛불을 끄자마자 즉시 눈이 감겨서 '잠드는 구나'하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 시간 후,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각이라는 생각에 깨어난다. 아직 손에 들고 있으려니 여기는 책을 놓으려고 하며, 촛불을 불어 끄려고 한다.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에 대한 회상은 깜박한 사이에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회상은 야릇한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섯

 

그리고 후에 나오는 책들은 제임스 엘로이의 <아메리칸 타블로이드>,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조류쥬 페렉의 <잠든 남자>,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등 처음 들어보는 낯선 책들도 있었고 익숙한 책도 있었다. 그동안 감독이 접했을 책들, 감독 자신의 경험과 연관할 수 있는 책들, 칠레의 상황을 말 할 수 있는 책들 등 감독은 문학이라는 코드를 통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책과 더불어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자연과 분재였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공원의 숲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훌리오는 에밀리아에게 네잎 클로버 화분을 선물하고, 그리고 그는 8년 후 에밀리아의 부고를 듣고 분재를 가꾼다. 그리고 훌리아는 분재를 가꾸며 이런말을 한다. "화분에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궁극적으로 둘은 모두 자연이다." 영화를 보면서 문학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감독의 호(好)가 보였다. 그리고 분재라는 소재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이 독특하였다. 분재는 어찌보면 자연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이와 연결하여 문학은 세계에 대한 모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모방은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흠모가 없다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감독은 그렇게 자신을 '사랑' '문학' '식물학'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사랑을, 그를 둘러싼 문학과 식물학을 다시 한 번 소상히 회상하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말하는 것같았다. 영화 <훌리오와 에밀리아>를 통해 크리스티안 히메네즈라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사람이 보이는 영화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보이는 영화다.

 

+ 훌리오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가 일하는 서점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벽면 전체에 책이 빼곡히 꽂혀있다. 세상에는 읽어야 하는 책들 혹은 읽을 수 있는 책들 또는 읽고 싶은 책들이 수없이 많고, 책은 끊임없이 만들어질텐데 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그 책들을 만족할 정도로 읽다가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져야할텐데. 이 게으름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책만 보면 쏟아지는 잠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걱정만 잠시 늘어 놓는다. 영화도 그러할텐데. 세상엔 읽어야 하는 책과 보아야 하는 영화가 무한하다. 내게 딱 1년 정도 영화보고, 책보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재력이 있으면 좋겠다. ㅎ 그러고 나면 1년보다 더 긴 시간이 욕심나겠지. 틈틈이 애써봐야겠다.

 

 

+ 일요일 조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니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 인파 속에서 생각을 했다. '나도 문학과 영화와 자연을 좋아하는 이를 만나 그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다.' 훌리오가 소설가 가즈무리를 만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리 위에는 하얀색 화살표가 계속 따라 다녔다. 인파 속에 "나, 훌리오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도 그 많은 인파들 속에서 머리 위에 화살표를 달고 "나 여기 있어요!"라고 내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여튼 그 장면이 재미있었다. 감독은 왜 유독 그 장면에 머리위 화살표를  붙여 놓은 걸까?

 

 

+ 칠레 영화를 처음 봤다. 얼마전 이태원 산책을 하면서 지리부도를 갖고 싶었다. 칠레 영화를 보고 나니 칠레의 위치와 그 주변의 나라들이 궁금해졌다. 세계지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문학과 식물학, 영화만큼 지리학도 매력적인 공부일 것 같다. 영화 포스터 아래 사랑, 문학, 식물학이라는 세가지 테마가 쓰여있다.(무비꼴라쥬 시네마톡 후기에서 정보를 얻었다.)

 

+ 트리플 불안님의 블로그 : 아트톡 <훌리오와 에밀리아> with 한창호 평론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icskan&logNo=90151101422

 

+ 낯선 나라의 말, 혹은 "고대의 말 라틴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시간과 교감하는 것이다."라는 훌리오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 칠레 영화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유럽감수성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2012. 8. 28. 23:00

 

 

태풍때문에 민우회 사무실은 재량휴업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재택근무를 했다. 정말 하기 싫어서 끝까지 미루고 미루던 보고서를 발송하고 나니 오후 5시 30분이었다. '퇴근 시간이군. 이제 퇴근을 해야겠군.' 생각하고, 집 앞 극장 상영작 리스트를 훑어 보았다. 보고싶은 영화는 딱히 없었고, 그 중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요즘 내가 꽂혀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7>과 연결하여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눈에 들어오는 드라마가 없는 요즘 사무실 활동가들 사이에 화제가 되는 드라마 한 편이 있었다. 드라마 주인공은 "슈스케의 서인국과 에이핑크의 정은지이고, 그들의 사투리 연기가 그렇게 괜찮고, 드라마 속 소품들과 이야기가 그렇게 공감될 수 없다."라는 말이 점심시간에 오갔고, 꼭 이 드라마를 봐야한다며 주변에서 적극 추천하였다. 그래서 어느 주말 컴퓨터 다운로드 속도가 상당히 느림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1화부터 8화까지 드라마를 다운 받고 반나절 내내 이 드라마를 봤다. 횟수가 거듭되면서, 다음편을 계속 클릭하면서 '짠함'에 눈가가 촉촉해지곤 했다. 소녀 시원과 소년 윤제가 살았던 당시의 1997년, 그들은 18살이었고 당시 나는 17살이었다. 시원과 윤제 그리고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었고, 그렇기때문에 드라마 속 배경과 소품, 에피소드들은 그때를 살았던 우리의 기억과 추억을 오롯이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서 눈가가 촉촉해지곤 했다. 당시엔 정말 교실에선 H.O.T팬과 젝스키스팬으로 나뉘어진 패걸이가 있었고, H.O.T와 젝스키스 춤을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그대로 따라 추며 서로를 견제했고, 워크맨엔 90년대 가요들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메이커 청바지를 입고 수학여행을 가고 싶어서 엄마에게 그 청바지를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고(드라마에서는 프랑스 브랜드의 청바지였으나 당시 우리 동네에서는 NIX청바지가 최고의 청바지였다.), 꼬맹이 시절 극장에서 봤던 우뢰매, 영구시리즈가 아닌 '진짜 영화를 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접속>을 봤다. 계속 엇갈리는 두 주인공을 보며 안타까워했고, 영화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노래 a Lover's Concerto를 들으며 가슴 설레여 했다. <접속>을 시작으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기를 직접 보았고, 신예감독 장윤현과 허진호 덕에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처럼 내가 고스란히 겪고 지난 시간들이 사진첩을 펼치는 것처럼 드라마에서 한 회, 한 회 펼쳐지고 있었다. 신경쓰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무심히 화면 한구석에 등장하느 소품들도 나의 추억들을 현재로 소환하는데 한 몫하고 있었다. 전람회의 마지막 앨범 <졸업> 카세트 테이프와 영화 잡지 키노와 스크린, 하드보드지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연예인 사진을 붙여 만든 수제 필통 등이 추억을 돋게했다. (전람회의 <졸업> CD를 그때 좋아했던 친구에게 졸업식 날 주려고 샀지만 결국 전하지 못했었다.)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또한 1990년대가 배경이다. 대만 소년들의 우상이었던 왕조현의 브로마이드가 방에 걸려 있었고, 소년들은 미국의 NBA 농구에 꽂혀있었고, 야구에 열광했던 당시의 그 혹은 그녀가 영화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오버랩 된 동시대를 함께 통과한 이들에게 1990년대를 추억한다는 것은 더욱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서른의 시간 위에 놓여 있는 이들은 '1990년대, 우리는 그땐 그랬지.'라고 말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과거의 그 시간을 곱씹고 그리워하며 가끔은 눈물을 찔끔 흘리는 것이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7>을 재미있게 보고 있으면서도,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보며 킥킥 거리며 극장을 나오면서도 뭔가 찜찜함이 올라왔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건축학개론>을 올 봄에 보고, '70-80년대가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90년대도 영화의 '주'배경으로 등장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시대가 매체에 등장한다는 것이 반가웠다. <건축학개론>은 그렇게 '90년대의 재현'이라는 흐름의 물꼬를 텄고, 이를 시작으로 90년대가 '주'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 다양한 장르를 통해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 특정 시기를 추억하는 사이클이 너무 빨라지고 있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2012년을 기점으로 불과 20년, 15년 전의 이야기가 이제는 추억해야 하는 먼 과거가 되었나 싶기도 하고, 나의 '청춘'들을 소환하기에 아직 나는 '청춘'인 것 같은데 나의 '청춘'을 이렇게 빨리 추억한다면 현재 내가 살아가는 이 시점은 뭐라 정의해야하고, '청춘'이라는 것의 경계는 무엇이고, '청춘'이라는 것이 너무 빨리 '소비되는 무엇'이 되어 버린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소비하는 과거이기 전에 아직 그때의 그 시간은 현재와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가끔은 현재라고 착각하며 현재라고 명명하기도 하는데 매체에서는 이미 '아~지나가버린 옛날이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사이클은 20년 전에서, 15년 전으로, 다시 10년 전으로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속도를 보면 '분명 이 사이클은 5년 혹은 10년 주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빨라질 수 있겠구나.'라고 염려도 되었다. 지난 시간을 곱게 혹은 아프게 또는 슬프게 감정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며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을 트렌드에 맞춰 빨리빨리 '소비하는 무엇'으로 인식하여 그 시절을 맞이하는 것만 같아 불안하였다. 그래서 <응답하라 1997>과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보며 나는 찜찜함을 느꼈다.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 대해 짧게 평을 하자면 대만의 청춘영화는 건강하고 풋풋하다. 또 그 건강함과 풋풋함의 8할은 배우의 힘! 하지만 성실하기만 한 건강한 풋풋함은 영화를 심심하게 만든다.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감독 구파도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성실하고 기교가 없는 영화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대체로 동감하며 너무나도 성실한 캐릭터는 영화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특히 션자이의 캐릭터는 지나치리만 만큼 성실했다. 션자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 격투기 대회를 개최하고, 참가한 커징턴에게 다칠 것 뻔히 알면서 그런 짓을 왜하냐며 마구 화를 내는 션자이의 바른 생활에 화들짝 놀랐다. 엄훠!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두 번째로 본 대만영화이다. 첫 번째 영화는 <청설>이었다. 두 영화다 청춘영화였고 두 영화다 배우 첸옌시가 나오는 영화였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첸옌시는 정말 이쁘고, 엄청난 동안이다. 어쩜!

 

+ '그땐 그랬지.' 과거를 곱씹다보면 말하게 되는 공통의 경험으로 감독은 수업하는 여자선생을 보며 교실에서 자위를 하는 커징텅과 쉬보춘의 에피소드를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즘 이런 경험 있었지."라고 말하며 코믹하게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나는 절대 웃을 수 없었다.

2012. 8. 21. 00:19

 

<나의 작은 연인들> (Mes Petites Amoureuses / My Little Loves, 1974)

장 으슈타슈

 

영화를 보면서 몸과 욕망의 불일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몸과 욕망의 불일치라는 표현보다는 몸과 욕망의 어색함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감독은 이 불일치 즉 어색함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당시 이 영화가 만들어졌던 1974년 프랑스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청년들의 무력감은 무엇에 기인하는지를 질문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당시 프랑스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프랑스와 관련한, 내 방에 있는 유일한 책 <1968(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을 읽어야 겠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다니엘은 사정으로 인해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 근거지를 옮긴 이후 다니엘의 놀이는 변한다. 서커스 구경을 가고 서커스 장면을 모방하거나, 숲 속 나무에서 뛰어내리기 등의 놀이를 하던 다니엘은 근거지 변경 후 극장에 가고, 극장에서 만난이와 키스를 시도하고, 카페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과 무리지어 연애를 할 상대를 찾아 다닌다. 감독의 경험을 근거하여 만들었다던 이 영화는 청년의 욕망이 소상하게 드러난다. 영화를 보면서 당시의 나의 욕망은 어떻게 구성되고 실현되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흔하게 표현되는 남성의 성에 대한 호기심, 욕망과 달리 여성의 성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관련한 이야기가 서서히 흘러나온다. 강이 된다.

(20120815)

 

 

 

 

<야생갈대> (Les Roseaux Sauvages / Wild Reeds, 1994)

앙드레 테시네

 

"너를 만난 것은 네가 내게 안정을 주기때문이야."

"내가 너를 좋아한 것은 나를 지킬 수 있기때문이야."

"전쟁보다 끔찍한 것은 삶이 계속 된다는 것이야."

 

기억나는 대사만, 느낌을 살려 끄적거려본다. 빛의 노란색과 숲의 초록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장면을 감독은 아름답게 연출하고 있었다. 목가적인 풍경 속에 담긴 투명한 인물들이 아름다웠다. 영화는 프랑스와즈와 세르주, 마이테와 앙리라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2연 詩같기도 하였고, 프랑스와즈, 세르주, 마이테, 앙리로 분절된 4연 詩같기도 하였다. 세르주의 형 결혼식과 장례식 장면에서 각각 울리는 '종' 장면을 보면서 특히 영화가 詩같다고 생각하였다.

 

프랑수와즈가 거울을 보며 "나는 호모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프랑수와즈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직면하는 장면은 긍정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인상깊었던 또다른 장면은 마이테의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장면이었다. 감독은 꿈과 현실의 반복 혹은 중복을 통해 '순간' 무엇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도록 하여 그 경계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홍상수 감독이 생각났다. <야생갈대>는 건조하다기보다는 감정이 차고 넘쳤고 그동안 봐온 프랑스 영화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영화인데 줄곧 배경음악으로 팝송이 흘러나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 영화의 감성이 좋다.

(20120819)

2012. 8. 12. 00:30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을 읽었다. 그녀의 소설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그 소설집을 손에 넣고 싶었다. 제주로 떠나는 짐을 싸면서 내 가방에 그녀의 소설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항으로 가기 전 서점에서 그녀의 소설책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공항까지 가는 시간이 빠듯했고 나는 그녀의 소설대신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그>를 가방에 넣었다.

 

<마이너리그> 책장을 펼쳤지만 김애란의 <비행운>을 읽고 싶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행기가 뜨기 전 친구는 담배를 태우러 갔고 나는 그 사이 공항 안을 어슬렁 거리다 서점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을 샀다. 일만이천원에 그녀의 이야기를 샀다. 여름 바캉스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지만 그 안에 내가 그리고 네가 있어 나는 쉬이 그 책을 놓지못했다. 틈틈이 시간이 날 때 마다 제주에서 그녀의 책을 펼쳐 들었다. 서른을 맞이하고 서른을 지나치고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비행운>을 나는 그렇게 만났다.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를 읽었을 때, 그 책에 대한 소감으로 D는 이렇게 말했다."내 친구가 소설을 썼어." 김애란은 자신이 통과한 시간을, 자신이 통과하고 있는 오늘을 그녀의 소설 속에 차곡차곡 담아오고 있었다.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를 읽은지 꽤 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구질구질했지만 유머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2012년에 만난 김애란의 <비행운>의 소설 속 인물들은 쓸쓸했다. 쓸쓸함이 소설집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 한 켠이 답답했고 '나도 이렇게 살다가 생을 마무리하겠지.'라는 느낌이 강렬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소설 속 그 말이 아리게 내 안에 머문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영화잡지에서 실린 그녀의 인터뷰를 보았다. 매체를 통해 그녀의 나이를 확인하였다. 1980년에 태어난 그녀, 그녀의 나이를 확인하고 나니 내 나이가 확인되었고 그순간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우스워지고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언젠가 자라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여전히도 언젠가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찰나 기대한다. 그 기대로 순간 나는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그 부푼, 실체없는 욕망은 금방 '픽'하고 터져버린다. 언젠가 나는 '무엇이' 되기보다는 '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 세계를 부정해본다. 겨우 내가 되어버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나의 진짜 세계를 거짓이라고 말해본다. 하지만 나는 나의 현주소를 그녀의 소설을 통해 확인한다. 모든 것이 쓸쓸했다. 하지만 쓸쓸해도 그 쓸쓸함을 뚫고 나는 오늘도 걸어 나간다. 나와 우리는 파닥거리는 매일의 쓸쓸함을 직면하며, 그 쓸쓸함의 터널을 전생애를 거쳐 통과할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을 우리는 그렇게 통과할 것이다. 쓸쓸함의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오돌오돌 외로움에 떨며, 세계를 부정해보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거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타인의 출생년도를 매체를 통해 접하노라면 

특히 1980년대 초반 출생자들의 숫자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도 '서른의 시간을 거쳐가고 있겠구나.' 생각하면

그것이 거짓일지 모른다고 믿곤한다

그러고나면 사는게 우스워지고 세계가 무의미해진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내 존재가 거짓말같다

 

20120807 am 12:31

 

 

2012. 8. 6. 23:04

 

 

 

4일의 휴가를 끝내고 출근을 했다. 도란도란 둘러 앉아 도시락을 열고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가 k가 물었다. "휴가 어땠어?" 제주의 동, 서, 남, 북 바다를 다 둘러보았고 식도락 여행을 하고 왔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4일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져 여름 휴가가 한 달이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지만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영화 <오루에 쪽으로>를 보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바캉스가 한창이다. 영화제 포스터가 참 여름스럽다. 바캉스를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게 만든다. 시네바캉스에서 상영하는 상영작 리스트를 쭉 보고 <오루에 쪽으로>를 꼭 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바캉스를 다녀오면 정작 몸이 지치고 힘들어 영화를 볼 기력이 없어질 것같다는 마음이 한켠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서 함께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던 친구에게 다음에 같이 영화데이트를 하자고 말하고 일요일 <오루에 쪽으로> 일정을 취소했다. 그리고 맞이한 일요일, 나의 바캉스 마지막 날 찜통같은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이 더 괴로웠다. 그래서 극장으로 더위를 피하러 시네바캉스를 떠났다.

 

여름 휴가가 한 달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 영향력은 아마 영화때문일지도 모른다. 바캉스를 맞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휴가는 20여일이 넘었고, 족히 한 달이 되는 듯하였다. 조엘과 카린, 캐롤린은 양손에 무게가 상당히 나가보이는 트렁크를 손에 쥐고 휴가지로 여행을 떠난다. 배를 타고 도착한 해변가의 한적한 마을. 무거은 트렁크를 낑낑 들고서 사구를 올라서는 그 모습을 보며 휴가에 대한 그녀들의 절박함이 보였다. 영화는 기승전결이 있다기 보다는 휴가지에서 보낸 시간을 일기를 쓰듯 소소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보며 삶에 있어 휴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을 해본다.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기꺼이 해안 사구를 올라갈만큼 절박하고,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일상의 공간을 벗어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며, 시덥지 않은 장난에 배를 잡고 꺼억꺼억 웃기도 하는 것이 휴가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조엘과 카린, 캐롤린이 그녀들이 머무는 그 집을 청소하는 장면이었다.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한 달여 동안 머물 집에 또다른 질감의 일상을 풀기 위해 그 공간을 쓸고 닦는 일상적 행위를 보며, 휴가라는 것을 그저 '일탈'이라고만 생각해왔던 것에 대해 다른 결의 '일상'이라고 말하는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조엘, 카린, 캐롤린의 셋의 조화에서 파트릭의 결합으로 넷으로 그리고 질베르트의 합류로 다섯으로 파트릭이 떠나 다시 넷으로, 질베르트와 카린의 관계가 무너지며 셋에서 결국 조엘과 캐롤린만 남는 흐름을 유난스럽지 않게 담담하게 담고 있었다.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 다섯에서 넷, 다시 넷에서 셋 그리고 둘. 하나 더하기 혹은 하나 빼기 라는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수식을 통해 자크 로지에는 바캉스에서 겪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물결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결국 그 잔잔함이 영화 마지막 조엘의 눈빛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조엘을 좋아하는 파트릭은 우연을 가장하여 조엘이 머무는 휴가지를 찾지만 조엘은 질베르트에게 마음을 둔다. 하지만 질베르트는 카린과 관계를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종종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내는 경이로움에 기대어 관계의 경이로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휴가지를 배경으로 한 한국 상업영화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자크로지에는 그것을 표현하되 그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편안하게 관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었다.

 

자크 로지에는 "바캉스를 왜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 "바캉스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자유의 순간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말에 절대 공감을 하며 나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자유의 순간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바캉스에 대한 프랑스의 관대한 시간 개념이 부러웠다. 바캉스라는 개념이 단순히 시간과 물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되돌아 보고, 그 시간 속에서 의미를 축적하고, 일탈의 공간에서 다시 한 번 일상을 느끼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순간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것을 영화화 한 <오루에 쪽으로>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얼마전 친구들과 함께 떠난 가평으로의 1박 2일의 바캉스가 <오루에 쪽으로>의 바캉스와 조금 닮은 것같다고 생각했다. 가평으로 여행을 함께 떠났던 그 친구들과 함께 <오루에 쪽으로>를 같이 보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오루에 쪽으로>와 관련된 글을 썼다.

자크로지에와 바캉스의 영화들

http://cinematheque.tistory.com/

 

+ <오루에 쪽으로>(1973)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1986)이 떠올랐다. 두 영화는 닮아있었다. 여름 타자기 소리로 가득한 사무실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것과 휴가 기간동안의 일에 대해 날짜가 기록된 화면을 삽입하고 그 안에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하는 구조 또한 닮았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프랑스 영화라는 것도.

 

+ 프랑스 영화가 정말 좋다. 프랑스 말을 배우고 싶다. 프랑스에 가고 싶다.

 

+ 자크 로지에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궁금해졌고, <오루에 쪽으로>를 한 번 더 보고싶다. 원래는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글을 쓰고 싶었는데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어(나머지 상영시간은 모두 평일 낮이다. ㅠ) 영화의 잔상이 내게서 사라지기 전에 기록한다. 한 번 더 음미하기 전에 이렇게 기록해버리면 좋은 영화가 그것으로 규정되어버리는 것이 싫은데 어쩔 수가 없다.

 

+ 여튼 <녹색광선>과 함께 <오루에 쪽으로>도 나의 페이버릿 리스트에 합류했다.

2012. 8. 5. 23:32

날씨가 정말 덥다. 뉴스에서는 '최악의 더위'라고 말하고 있고, 에어컨 사용량을 줄이라는 아파트 관리소장의 안내 멘트가 웅웅 거리며 들린다. 정말 이렇게 더울 수 있는지, 너무 더워서 이 더위가 낯설 지경이다. 도저히 집에 머물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을 뛰쳐 나와 극장으로 찾아갔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가 보고 싶었다. 옴니버스 구성도 흥미롭고, <기담>의 감독이 만든 이야기도 있다고 하고, 배우 남보라가 어떻게 연기하는지도 궁금했고, 한국영화에서 좀비이야기는 어떻게 그려질지 확인하고 싶었다. 헌데 함께 극장에 갈 사람이 없고(공포영화를 잘 보지만 그래도 혼자보기엔 촘 무섭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에 상영을 하는 극장이 없어 못보고 있다가 더위를 핑계로 동생을 꼬셔 늦은밤 <무서운 이야기>를 봤다.

 

집주변엔 <무서운 이야기>를 상영하는 극장이 없어 신사동에 있는 브로드웨이 극장에 갔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판을 치는 요즘, 비멀티플렉스 극장인 브로드웨이 극장은 아주 작은 상영관을 여러 개 보유한 곳이었고 좌석 선택 시스템도 A4용지에 그려진 좌석을 내가 선택하면 매표원이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표를 발행하고 있었고, 화장실도 적당히 지저분했다. 시내 한복판에 이런 정겨운 시스템의 비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다는 것이 괜시리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데맨 뒤 좌석에 앉으면 물결모양의 천장때문에 화면 윗 부분이 툭 잘려 보였다. (-_-;) 그래도 내가 주말 더위를 피해 공포영화를 적절한 시간에 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브로드웨이 극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영화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잡혀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소녀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시작한다. 첫번째 이야기는 전래동화 <해와 달>의 구조를 가지고 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인간의 환상이 빗어내는 공포와 현실의 인간이 실제로 겪는 공포를 엮어 만든 <해와 달>의 스토리가 닫히는 순간 '나쁘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인간의 환상이 빗어낸 공포의 존재였던 택배기사는 현실의 인간이 되어 자신을 고용하고 결국 해고하여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간 사업주의 아이에게 찾아가 복수를 감행한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감독의 욕심이 무엇인지 알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현실의 이야기를 '이용'한다는 것에 대해 "나쁘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인 집이 가장 무서운 공간이 되어 방과 방으로, 문과 문으로 이어지는 공포를 잡아낸 흐름이 좋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노현희씨의 모습도 묘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원버스 안에서 아이들과 해와 달 영어노래를 함께 부르며 대문앞까지 아이들을 데려다주며 "씨유 투마로우"라고 말하던 노현희씨의 맥거핀적 공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아이들과 빨간 입술과 빨간손톱의 노현희씨 공이 컸다.

 

두번째 이야기 <공포비행기>는 밀폐된 공간에서 악마와 같은 존재와 맞서 싸우는 승무원의 이야기인데 특별할 것없는 무난한 이야기였다. 어디론가 달아날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악마와 같은 존재와 함께 있을 때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죽기살기로 그와 맞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죽기살기로 맞서 싸우는 구조 안에 하나의 이야기를 더 접목시킨다. 살인마의 눈에는 체포되기 전 그가 살해 한 승무원의 환영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피칠갑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살인마를 쏘아보며 불쑥불쑥 등장하는 승무원 귀신은 한국 공포영화에는 귀신이 등장해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번째 이야기는 <콩쥐, 팥쥐>이다. 이 에피소드를 보기 전 영화 <장화, 홍련>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자매의 등장과 옛이야기와 연관지어 만든 제목때문인듯하다. 고전적 느낌의 영화세트와 배우들의 의상 또한 두 영화를 연결하여 사고하도록 하였다. 외향은 그렇게 연결이 되는데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장화, 홍련>의 이야기가 잘 기억이 나지않아 연결하지 못한다. 여튼 <콩쥐, 팥쥐>로 돌아와 민 회장에게 시집을 가기 위해 공지와 박지는 매일 으르렁 거린다. 결국 언니 공지대신 민회장과 결혼하게 된 박지. 하지만 민 회장과의 결혼이 부를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민 회장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음식으로 스스로가 활용된다는 것을 두 자매는 알게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시점은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십여명의 민회장 아내들이 입었을 피 묻은 드레스가 보관 된 방의 장면은 동화 <푸른 수염>을 연상케했다. 전체적인 콘셉트는 '잔혹'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지만 콘셉트만 가져왔을 뿐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이야기같다.

 

 

네번재 이야기 <앰뷸런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칭찬하고 있었다. 한국영화에서 좀비를 그려낸다는 것이 우선 흥미로웠다. 이야기에는 좀비에게 물렸는지 물리지 않았는지 확실치 않은 아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엄마. 좀비에게 물렸다고 확신하고 앰뷸란스에서 아이를 내보내려고 하는 의사, 아직 확실치 않으니 일단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가 백신을 맞히도록 하자는 간호사가 등장한다. 감독은 각각의 인물들의 입장이 부딪히는 시점을 포착하고 그 입장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압착하고 있었다. 감독은 이야기를 어디에 집중하고 풀어가야하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에피소드들 보다 밀도있게 이야기를 풀어낸 <앰뷸런스>는 공포를 흉내내려고 하지 않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비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좀비의 모습이 제대로 화면에 포착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저 요란스런 소리와 정신없는 팔동작, 멀리서 뛰어오는 모습만으로 그려진 좀비의 존재는 한국영화에서는 좀비를 어떻게 그릴것인가라는 나의 궁금증을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다.

 

영화는 살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소녀와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그럼 이제 내가 해줄까? 무서운 이야기?"라고 말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우리가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공포와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접하게 된 사건으로 파생된 공포를 적절하게 버무린 영화 <무서운 이야기>는 극장을 나온 관객들에게 귀신이 더 무섭냐, 사람이 더 무섭냐라는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었다. 

 

+ <인간극장>의 남보라가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도 나는 신기하다. 그녀의 동생들이 생각나서 그런지 배우 남보라가 잘됐으면 좋겠다. (^-^;) <콩쥐, 팥쥐>에는 전직 아나운서 임성민씨도 나온다. 내가 누군가의 연기를 운운할 수 있을까 싶긴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아직 많이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임성민씨도 얼마전에 <인간극장>에 나왔다.

 

+ 옴니버스식 구성을 통해 다채로운 형식의 공포를 드러내는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으나 너무 나열한 듯한 인상이 강해 108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살찌기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