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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2건
2017. 3. 28. 01:10

<컨택트>

토요일 아침 일어나자 마자 영화를 봤다. 순차적으로 단어를 나열하여 소통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단번에 통합적으로 문자화하는 외계의 존재들이 등장하는 영화였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순차적으로 시간을 인지하는 지구인들과 달리 외계의 존재들에게 시간은 통합되어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외계의 존재들은 소통의 방식을 단번에 통합적으로 하기때문에 시간을 순차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방식으로 인지하고 그렇기때문에 현재에 미래의 순간이 오버랩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영화는 루이스가 초능력을 소유한 존재이기때문에 미래의 시간을 인지하는 것이아니라 외계의 존재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익혔기때문에 시간을 인지하는 방식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한다." 이런 메시지가 나는 항상 흥미롭다. <컨택트>는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는 서사에서 한층 더 나아가, 소통의 접근 방식(다른 사고방식)이 시간을 체득하는 방식을 변형시킨다고 한다. 그 지점이 좋았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개인적으로 <옥희의 영화>를 시작으로 그 이후의 홍상수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홍상수 영화의 포인트들이 잘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내가 좋아하는 홍상수 영화의 포인트는 '무언가에 매진하고 싶은 자의 에튀튜드에 대해 곱씹게하는 부분'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속 영희, 김민희의 연기는 멋졌다.

 

<히든피겨스>

순간 울컥하는 장면들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녀들은 '각별하게' '스마트하고' '잘나고' '훌륭함'으로 뚫고 지나간거잖아.'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각별하게' '스마트하고' '잘나고' '훌륭한' 그녀들은 '거뜬히' 사랑도 챙겨갔단다라는 이야기는 진부했다. 

  

 

2013. 3. 23. 21:38

<함께가는 여성> 213호가 나왔어요. 계간지로 바뀌고 2013년 봄, 세상에 인사하는 <함께가는 여성>에 오랜만에 글을 썼어요. :D




노년들의 영화에서, 든든하게 나이 들 수 있는 길을 찾다!

이소희(바람) /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노년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제목은 <아무르>, <내일을 위한 길>이다. <아무르>는 프랑스 영화다. 음악교사였던 노년의 부부 안느와 조르주는 음악회를 다니며 평화롭게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안느의 병은 그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내일을 위한 길>은 1937년 미국 영화다. 은퇴 후 다정하게 지내오던 노년의 부부 바크와 루시는 부채로 인해 그들의 집이 저당 잡히자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의 집에서 흩어져 지내게 된다. 자식들은 부모의 존재가 불편하다. 


<아무르>를 보며 엄마의 나이 듦이 오버랩 되다

영화의 잔상이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영화 속 인물들이 내 곁에 계속 머물렀다. 왜일까? 내가 나이 든다는 것, 가족이 나이를 먹고 늙는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에 영화 속 그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아무르>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아팠다. 평생 사용한 근육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채 계속 사용하다보니 결국 탈이 났다. 엄마는 오른손이 고장나버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혼자서 옷을 입고 벗을 수 없었고, 왼손으로 어설프게 밥을 뜨고 힘들게 찬을 집었다. 엄마대신 가사 일을 하고, 엄마의 거동을 도우면서 속상했다. 그리고 짜증이 치고 올라오기도 했다. 이 짜증은 무엇일까?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동안 지켜왔던 습관을 유지하고 싶기에 억지로 손을 움직여 본다. 몸은 마음과 달리 움직인다. 내 곁에 있는 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면, 그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성질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치고 올라오는 짜증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감정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일까? 


<내일을 위한 길>에서 ‘타인의 친절’이 의미하는 것

영화 <내일을 위한 길>은 가족 안에서 느끼는 노년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다. 나이든 부부는 빠르게 움직이는 자식들의 시간을 따라갈 수 없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그들의 시계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부부의 느려진 사고와 나약해진 몸은 자식들에겐 불편하고 귀찮은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자식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싶지만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이 흐른다. 이러한 시간의 강을 ‘세대차이’, ‘갭’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세대차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느 정도 힘이 있을 때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존재가 투명해지는 것 같다. <내일을 위한 길>의 노부부는 자식들의 공간에서 화분처럼 지낸다. 가족 안에서 쓸쓸한 노부부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들은 ‘타인’이다. 뉴욕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행을 보내던 바크와 루시에게 자동차 판매자는 자동차를 ‘파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도시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빠른 음악을 지휘하던 연회장의 지휘자는 그들을 위해 느린 템포의 음악을 연주한다. 


‘타인의 친절’을 통해 <내일을 위한 길>의 레오 맥캐리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이 든다. 늙는다.’ 회피할 수도, 정지할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노인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고민했을 것이다. 젊은 자식들은 제 살기에 바쁘다. 노인에게 가족은 쓸쓸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은 관계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내일을 위한 길>은 ‘노인을 공경하라!’라는 텍스트로 시작된다. 교과서적이고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영화를 보고 극장에 나올 때 이 말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중에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각주:1], ‘두 존재의 공존이 가능한, 즉 사회적 관계성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물었을 때 영화 시작의 텍스트가 의미로 다가왔다. 그 텍스트는 관계의 윤리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든든하게 나이 들기 위하여

<아무르>를 보면서 나의 노후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교직생활을 했기 에 노후의 삶이 보장되었던 안느와 조르주와 달리 나의 노후는 연금도 녹록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사(私)보험을 들 형편도 안 되는데 나의 노후는 어떻게 될까 불안했다. 지인은 본인이 나이 들면 폐지 줍는 할머니로 살아갈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집이 저당 잡혀 갈 곳이 없는 <내일을 위한 길>의 바크와 루시가 ‘젊을 때 저축하라.’는 거리의 간판을 보며 씁쓸하게 지나치는 모습이 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것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늙어서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회경제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무르>를 보며 느낀 불안감을 <내일을 위한 길>을 보며 다독이려고 했다. 


“가족 안에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어. 사회적 관계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해!” 나도 언젠가 나이가 들 것이고 흐릿해질 것이다. 나이가 들고 흐려진다고 하여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존재에 대한 인식과 관계의 연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싶다. 노인의 경험이 세대의 강 때문에 단절되지 않도록 징검다리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특히 할머니의 경험이 전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 일본의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아흔이 넘어 쓰기 시작한 시를 모아 아흔 여덟 살에 <약해지지 마>라는 시집을 세상에 내 놓았다. 할머니는 지금 이곳에 없지만 할머니의 삶은 할머니의 시집을 통해 공유되고 있다. ‘할머니 시(詩) 교실을 열고, 할머니들의 시(詩)를 모아 시집 한권을 내놓으면 어떨까?’ 든든한 나의 노후를 위해서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할머니의 커뮤니티는 곳곳에 많이 존재해야 한다.


貯金 (저금)

私ね 人から 나 말야, 사람들이

やさしさを貰ったら 친절하게 대해주면

心に貯金をしておくの 마음속에 저금해 두고 있어


さびしくなった時は 외롭다고 느낄 때

それを引き出して 그걸 꺼내

元気になる 힘을 내는 거야


あなたも 今から 당신도 지금부터

積んでおきなさい 저금해봐

年金より 연금보다

いいわよ 나을 테니까


- 시바타 도요 시집 <약해지지 마>

  1. 나이 권력으로 젊은 사람을 뭉개는 늙은 가부장을 많이 보았기에, 늙음과 젊음의 힘의 관계를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늙음과 젊음에 있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소수자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싶었다. [본문으로]
2013. 3. 16. 20:06

시인의 책을 보았습니다. 시인의 책 제목은 <자고 있어, 곁이니까>이었습니다. 시인의 책이 시집이 아닌 것이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책에는 시인의 시심이 가득히 담겨있습니다. 김경주 시인이 기록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의 숨결로 만들어진 아이에 관한 기록입니다. 자궁 안에 아기가 머물었던 278일의 시간이 책 안에 고스란히 묶여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떠할까 상상했습니다. 아비의 바람이, 아비의 고백이, 아비의 두려움과 다짐이 담긴 책을 먼훗날 아이가 읽는다면 아이는 그 시간이 아름다워 눈물을 흘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기억할 수 없는 본인의 시간을 아비가 대신 기록해 주어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아이라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뱃속에 술과 음식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심장을 가진 아이를 품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 안에 하나의 심장이 아니라 두개의 심장이 뛰고 있다면 어떠할까. 문득 상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무한히 믿는 존재를 품에 안고, 그 존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시간이 내 삶에 있다면 덜 외로울까.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적어 놓은 친구의 육아일기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붉은 하늘 위로 어둠이 내려 앉는 시간, 친구는 왈칵 외로워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든 꼬맹이의 손을 지그시 잡고 잠을 청했다고 합니다. 곁에 꼬맹이가 있어 다행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품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두개의 심장을 가지는 시간을 거칩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하지만 나는 그때를 경험했지만 기억하지못합니다. 내 안에 두개의 심장이 뛰는 시간을 나는 다시 맞이할 수 있을까요? 확신할 수 없는 생이지만 경이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내가 사내 아이였다면 나는 두 번 다시 그 경험을 할 수 없었겠지요. 이것은 막연히 가지는 동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막연히 가지는 동경으로 나도 아름다워지고 싶습니다. 


김경주 시인을 초대하였습니다. 아이를 갖기 시작한 사내의 소심한 시심을 직접 듣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4월 4일 목요일 저녁 작은극장에서 그를 만날 생각하니 조금은 흥분되기도 합니다.



2013. 3. 15. 01:12

<기억의 촉감>이라는 책을 알게되었습니다. 책의 존재를 알고, 당장 읽고 싶어 퇴근길에 서점을 찾았습니다. 첫번째 서점에는 이 책이 없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못했을 때 찾아오는 조바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방문한 집근처 서점에는 다행히 책이 있었습니다. 나는 왜 그리도 이 책을 갈급했던 것일까요? 그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선이 많은, 정성스러운 그림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접한 '에필로그'라는 이야기의 아련함이 잔물결처럼 남았습니다. 책을 보면서 공감하고 싶었고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4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책을 쓰고, 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봅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그의 첫 단행본 <소년의 밤>은 죄의식과 미성숙함에 관한 우화들이었다고. <기억의 촉감> 또한 죄의식이 작품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작품 속 '진석'은 작가 그 자신일 것 입니다. 스스로를 왜곡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곧게 자신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르시시즘에 자만하지 않고, 자격지심에 척박해지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를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에게 솔직하고,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용기있는 일입니다. <기억의 촉감>은 그렇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입니다. 신기하게도 책은 "지금부터 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끝납니다. 살아오면서 품고 있었던 기억에 관한 곧은 풍경을 그는 오롯이 담으면서 묻습니다. "당신의 <기억의 촉감>은 어떠합니까?" 용기있는 그의 이야기에 조심스럽게 나를 들여다 보고 싶은 밤입니다. 



저마다 스쳐 가는 삶들 속에 생채기 흔적처럼 새겨진 몇 개의 기억들을 담았을 뿐이다. 한 사람의 삶을 널찍한 도화지에 비유하자면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몇 개의 도화지 위에 대충 겹쳐 찍힌 작은 점 몇 개, 동시에 감정을 통해 몸에 새겨진 기억의 파편들이기도 하다. 그 기억은 죄책감, 두려움, 회환 등의 감정을 수반하며 과거라는 깊은 우물로부터 길어올려지는 것이다.

과한 욕심이겠지만 내 작업의 독자가 되어 주시는 분들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 담긴 기억들을 읽고 난 뒤에 이야기 속 화자들의 보여지지 않은 삶까지 상상하게 되길 바란다. 밤 하늘에 두서없이 찍힌 별들을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이어 별자리를 만들듯이 말이다. 모범 답안은 없으며 다만 저마다 살아오며 몸에 새겨진 기억들이 각기 다른 별자리 그림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김한조 작가의 그림체는 내가 좋아하는 <리틀 포레스트>의 작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그림체가 닮았다. 난 대체적으로 선이 많고, 투박한 얼굴을 그리는 이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의 책을 보고 있으면 그림에, 이야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김한조 작가의 죄의식은 남성성에 기반한 죄의식이다. 그의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존재를 멀리 상상하고, 객관화하는 사유에도 놀랐다.

2013. 3. 13. 01:05






지인의 블로그에서 담아왔다. 몇번을 보고 또 보았다. 


출처 http://sanchokim.khan.kr



2013. 3. 11. 00:0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관한 글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글을 시작하고 어떤 내용으로 글을 써야할지 몰라 며칠째 머릿속으로 영화 장면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홍상수 감독의 전작 <밤과 낮>,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를 다시 보았다. 연필을 들고 노트에 영화의 흐름을 쭉 한 번 적어보았다. 해원의 세 편의 일기가 영화의 주된 축이다. 3월 21일 해원의 엄마가 캐나다로 떠났다. 한식당에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해원은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해원은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 샬롯갱스부르의 엄마 제인버킨을 만난다. 해원은 평소에 좋아하던 배우의 엄마를 직접 만나게 되어 미쳐버릴 지경이다. 소리를 지르고, 흥분되어 몸을 마구 흔들어 댄다. 그리고 말한다. 샬롯갱스부르와 같은 배우가 된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고. 그리고 그녀는 "트루아티스트"라고 제인버킨에게 말한다. 해원역의 정은채는 실제로 샬롯갱스부르를 좋아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의 엄마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촬영 현장에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홍감독은 우연을 놓치지 않고 그의 영화 속에 담았다. 그리고 제인버킨은 해원(정은채)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 딸을 많이 닮았어요." 배우 정은채는 실제로도 샬롯갱스부르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였다. 현실이 픽션이 되는 순간을 홍상수는 영화에 담고 그것을 꿈이라고 명하였다.

 

현실계와 환상계의 중간영역을 그는 영화계라고 말한다

현실의 축이 있다. 그리고 환상의 축이 있다. 이 두 축은 별개의 세계이지만 두개의 축이 교집합되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하게 된다. 이를 경험하였을 때 우리는 이것을 현실이라고 해야할지, 환상이라고 해야할지,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묘하다고 표현할 뿐이다. 이런 모호한 영역을 홍상수 감독은 꿈이라고 명명하고, 그는 그것을 필름에 담았다. 나는 이것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계라고 표현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축과 환상의 축을 오고가기 위해 활용하는 장치가 있다. 일단 그는 공간을 빌어 현실과 환상이 교집합되는 영화계를 구축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가짜 공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통영, 제주도, 신두리, 아차산, 모항, 북촌과 서촌, 아차산과 남한산성 등과 같이 진짜 장소에서 영화를 찍고 명확한 지명을 영화 속 배우들이 언급하도록 한다. 그리고 명확한 장소의 명명과 더불어 그 장소에 위치한 구체적 공간을 영화 속에 그대로 등장시킨다. 그가게, 유명장, 사직공원, 아차산 휴게소, 다정, 소설 등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공간, 홍상수 주변의 사람들이 주로 향유하는 공간을 영화 속에 그대로 등장 시킨다. 그 공간은 현실계이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 공간을 토대로 깔고 그 위에 이야기를 쌓는다. 토요일 오후 광화문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고 서촌까지 걸었다. 해원의 엄마가 다녔던 학교와 해원과 엄마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던 찻집을 지나고, 그가게 앞에서 기웃거려 보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가짜 인물이고 그 이야기도 가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고갔던 머물렀던 공간은 진짜로 존재한다. 그 지역에 내가 서 있었을 때 나는 현실계와 환상계의 중간영역인 영화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이야기이지만 이야기는 현실 공간을 빌어 전개된다. 홍상수 감독은 진짜 공간 위에 만들어진 가짜 이야기에 현실계의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였을 것이다. 현실계와 환상계의 통로로 홍상수 감독은 영화계를 구축하였고, 그 공간을 아는 이들이은 그곳을 통해 현실계와 환상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아는 이들만이 오고갈 수 있는 암호같은 비밀의 통로를 만든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서촌을 산책할 때 환상계에 초대된 유령이 된 것처럼 나는 유유히 서촌을 어슬렁 거렸다. 

 

진화하는 홍상수 감독 영화 속 그녀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는 내내 긴장감에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특별히 긴장이 될만한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영화 속에 잠식되어 있는 불안의 공기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왜 그토록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경직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해원의 대사가 대답이 되었다. "외롭고 슬프다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해원은 이십대이다. 함께 살고 있는 이가 없다. 엄마는 캐나다로 떠나버렸다. 학교는 재미없다. 학교에서 무언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해원은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삶의 섭리를 스스로 통달하고 있다. 해원은 튼튼하다. 해원은 스스로 생각해도 본인이 너무 튼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원은 외롭다. 그리고 슬프다. 외롭고 슬퍼서 옛 애인인 성준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성준은 해원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성준은 애인이(었)지만 해원과 영혼을 교감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해원과 성준은 술집에서 학교 동기들을 만나고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된다. 성준은 해원과의 관계가 탄로날까봐 조마조마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해원은 그 긴장을 깨고 일어난다. "오늘 엄마가 캐나다로 떠났어. 내가 슬퍼서 선생님을 불렀거든. 그게 진실이라고. 믿던 안믿던. 거짓말해서 미안해." 이렇게 해원의 첫번째 일기가 끝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해원의 뒤로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흘러 나온다. 해원의 슬픈 마음을 음악이 대신하여 말한다.

해원의 두번째 일기는 성준과 남한산성을 찾아간 이야기로 시작된다. 늦은 오후 햇살이 나즈막이 내려앉는 시간, 해원과 성준은 남한산성의 고건물 계단에 나란히 앉아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을 카세트로 함께 듣는다. 그때 성준은 말한다. "우리 오래 보자. 우리 잘 살자."라고 말한다. 그 말에 해원도 평온한 얼굴이다. 곧이어 성준은 말한다. "정신바짝 차리고 우리 들키지 않도록 잘하자." 그 말에 해원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해원은 받아친다.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결국 다 알아요. 다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에요. 다 죽으면 돼요." 성준은 일차적이고 거짓말을 만드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해원은 복잡다단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그렇기때문에 해원은 성준을 사랑하지만 외롭고 슬프다. 그러다가 산다는 것 자체가 무서워지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해원은 솔직하다. 튼튼하다. 하지만 불안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진화하고 있다.    

 

해원의 세번째 일기에 관하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세번째 일기는 해원의 긴 꿈에 관한 일기이다. 해원은 학교 도서관에서 잠이 든다. 꿈 속에서 해원은 친구 유람이에게 이 감독과의 관계에 대해 다 털어 놓는다. 하지만 꿈이다. 해원은 꿈에서 깨어 "미친년. 미친년"이라며 자기를 질책한다. 해원은 그것이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교를 나와 해원은 혼자 서촌을 산책한다. 서촌을 산책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대학교수를 우연히 만난다. 대학교수는 용기를 내어 해원에게 차 한잔 함께 할 것을 권한다. 해원은 흔쾌히 그와 대화를 나눈다. 대학교수는 해원에 대해 말한다. "해원씨는 알고 싶어해요. 자기가 누군지. 절대적 진실을 해원씨는 사람들을 만나고 직접 부닥치면서 채워나가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대학교수는 독특하다. 마틴스콜세지와 아주 절친한 듯하고, 염동력으로 택시를 부른다. 해원은 그 장면을 신기해하며 그와 헤어진다. 이후 해원은 남한산성에서 친한 언니를 만난다. 언니와 언니의 애인, 해원은 안개로 가득한 길을 걷는다. 안개로 가득한 풍경은 마치 비현실적이다. 해원은 그곳에서 성준을 만나고 그에게 하고팠던 말들을 시원하게 내뱉는다. "선생님은 왜 원하는대로 다 하려고 하세요. 왜 다하려고만 해요. 선생님이 잘못됐어요." 그렇게 성준과 헤어진 해원은 전에 걷지 못했던 남한산성의 길 끝까지 걷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친절한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에게 두 잔의 막걸리를 얻어 마신다. 어떤 질문도 없이, 술을 청하는 해원에게 그는 그저 술을 따라 줄뿐이다. 해원은 그의 배려에 위로를 느낀다. 그리고 친절한 아저씨는 길을 걷다 성준을 만나고 그에게 질문한다. "남한산성 좋았습니까?" 그는 답한다. "네 좋았습니다." 성준은 거짓말을 한다. 해원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좋았을리가 없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또 홀로 남아 운다. 해원은 울고 있는 성준을 발견하고 그를 위로한다. "조금만 기다려요. 괜찮아질거에요." 순간 장면은 바뀌어 학교 도서관 책상에 엎드려 잠든 해원을 비춘다. 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꿈에 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같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꿈 속의 해원이 꿈 안에서 깨어 다시 꿈을 꾼 해원의 긴 꿈에 관한 것이다. 해원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가 아니라 꿈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관객에게 이것이 꿈이라는 장치를 틈틈이 전달하고 있었다. 마틴스콜세지와 염동력,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해원, 안개로 가득했던 풍경이 그러한 것이다. 해원의 세번째 일기에 관하여 많은 이들이 허탈해 했다. 꿈이었어? 왜 굳이 모든 이야기를 꿈으로 시작하여 꿈으로 매듭지은 거지? 홍상수 감독은 마지막 이야기를 쓸 때 어떤 심정이었던 걸까? 어쩌면 홍상수 감독에게 그것이 꿈이든 진짜 이야기이든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해원이 느끼는 감정들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그런 장치를 활용한 것이지 않을까? 해원은 꿈속에서 자유롭다. 친구에게 솔직하게 성준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는다. 미국에서 온 대학교수와 결혼을 해볼까 상상을 하며, 연주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준에게도 담아두었던 말들을 다 한다. 담아두었던 말, 하지못했던 말을 해원은 꿈을 빌어서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홍상수 감독은 해원이 감정을 원없이 풀 수 있도록 그녀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꿈이다. 해원은 깨어나서 생각했을 것이다. '아, 꿈이었구나. 하지못한 말들, 하고 싶은 말들은 아직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구나.' 그래서 해원은 외롭고 슬프다가 갑자기 무서워졌을 것이다.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까?"라고 해원은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녀는 예상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런 상태는 지속되고 반복되겠지." 그래서 해원은 무서웠을 것이다. 외롭고 슬픈, 그리고 무서운 삶의 길 위에서 말없이 술 한잔을 따라주던 그 아저씨가 해원은 더더욱 생각났을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녀의 일기는 "꿈에서 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같았다."라고 끝난것이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짓는 실력은 기가 막힌다. 이런 제목은 그의 사유에 기인한다. 영화 속 대사도 정말 죽인다.

+ 영화를 보고 나는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비교하였고, <다른 나라에서>가 더 좋은 영화라고 떠들고 다녔다. 오늘 <다른 나라에서>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본 후 그 영화는 여전히도 좋은 영화라고 또 생각하였고,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별개의 영화라는 것을 확인하였고, 그리하여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각각 너무나도 좋은 영화라고 결론지었다.

+ 해원과 엄마의 관계도 재미있었다. 이 둘의 관계는 현실세계의 모녀의 관계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매력있었고 이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고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인 <우리 선희>라는 영화도 기대된다.

+ 못 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썼다. 썼다는 것에 일단은 의미를 두려고 한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3. 2. 11. 23:17


운동권 가부장 최해갑은 왜 지지받는 걸까?


영화 <남쪽으로 튀어>를 보고 노트에 최해갑의 가계도를 그리고 가족들의 특징들을 열거해 보았다. 최해갑의 조부와 아버지는 들섬에서 영웅 같은 존재다. 그들은 왜구를 물리치고, 자기 소유의 땅을 마을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탈북 한다. 그런 집안의 내력을 이어 받아 최해갑은 뼛속까지 빨갱이다. 1980년대 '최게바라'로 불리는 혁명분자였고, 그 이후에도 <주민등록을 찢어라>라는 영화를 만들며 국가 권력에 끊임없이 딴지를 건다. 1980년대 이후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잘 그려지지 않지만 그는 어떤 단체에 소속되지 않고, '동지'라는 말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며, 국가가 국민에게 부여하는 국민의 의무-일방적 KBS 수신료 납부 거부, 국민연금 납부 거부, 지문 날인 거부 등-에 일일이 거부하며 산다.

안봉희 또한 1980년대 최해갑과 함께 열혈운동권으로 '안다르크'로 불렸다. 외유내강의 캐릭터로 최해갑과 쿵짝이 맞다. 최해갑이 학교 급식 당번을 하며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돈의 흐름이 누구에게 집중되고 있는지 물을 때, 안봉희는 돈의 흐름의 종결지인 학교장을 만나 정상가족 중심의 학교 프로그램에 문제제기를 하며, 돈의 흐름에 대한 돌직구를 던진다. 하지만 안봉희의 뜨거운 피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안봉희는 동네에서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최해갑 가계에서 유일하게(?) 경제활동을 한다. (첫째 딸 민주도 경제활동을 한다. 민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본인의 생계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최해갑의 가계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이들은 여자들이다. 안봉희는 직접 차를 말리고, 손수 만든 것으로 보이는 퀼트 소품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소일거리로 퀼트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안봉희는 최해갑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인물로서, 자식들도 안봉희를 최해갑의 팬이라고 인정한다.

최해갑의 첫째 딸 최민주는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자퇴를 하고 디자인 학원에서 의상 디자인을 배운다. 감각도 있고 재능도 있지만 고등학교 자퇴라는 학력이 걸림돌이 된다. 최해갑이라는 존재에 대해 대립 선을 긋는 인물이지만 그나마 저항하는 인물이지 절대적 대립자는 아니다. 영화 후반부 민주는 최해갑의 지시를 잘 따르는 첫째 딸이다. 둘째 아들 나라는 최해갑이 알려준 싸움의 기술을 실생활에서 활용한다. 나라는 여차저차한 문제로 하루 가출을 한다. 가출 후 돌아온 나라에게 최해갑은 헤드락을 걸며 본인을 이기라고 한다. 본인을 이기는 그땐 가출을 해도 된다고 한다. 막내 딸 나래는 최해갑의 지론에 대해 의심 없이 습득하고 배포하는 인물이다. 나래는 학교에서 집안의 가훈인 '배우지 말고, 가지지 말자.'를 자랑스럽게 발표한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현실 세계를 기반 하여 만들어진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해갑의 가계도를 그리면서 이런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의아했다. 최해갑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인물이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가족이라는 범주에선  골칫덩어리 같은 인물이다. 최해갑은 특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큰 불만을 가지지 않고 산다. 가부장이 반드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며,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삶은 신경 쓰지 않으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가부장과 함께 산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그리고 민주와 나래는 고졸 자퇴라는 학력이 생의 걸림돌이이 됨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아빠의 일방적 선택으로 단절됨(전학이라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학교를 떼려 치라고 하는 최해갑에 대해 "운동권 아빠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만날 자기 마음대로야!"라고 토를 달지 않는다. 최해갑은 세상을 향해 저항하지만 최해갑의 일가는 최해갑에게 딱히 저항하지 않는다. 가부장의 존재와 권력을 지지하고 순순히 따른다. 운동권 가부장 최해갑이 가족 내에서 이토록 지지받는 이유가 미스터리다.   


최해갑은 정말 <남쪽으로 튀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여기에 있다.


극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매력은 감정을 함께 표출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국가 시스템에 저항하는 최해갑의 행위를 보며 극장 안을 가득 채운 우리들은 환호했고, 그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KBS 수신료 거부 의사를 밝히며 텔레비전을 집어 던지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꼈고, 국민연금을 내야 한다는 마음은 있지만 '나의 노후에도 별탈 없이 국민 연금을 받을 수 있겠지...?'라는 불안함을 대신해 대차게 한마디 하는 최해갑을 통해 시원함을 가졌다. 그리고 한나라당을 연상시키는 로고의 유니폼을 입은 티브로 건설사 직원들에게 앉아서 당하지 않고 꾀를 부려 그들을 골리는 최해갑을 보며 "맞아! 저렇게 해야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를 뻥뻥 터트리며 꽃병을 던지면서, 들섬을 삼키려는 4선 의원 김하수를 절절매게 하는 최해갑과 안봉희를 보며 환호했다. 

거대한 자본과 국가권력에 맞서 대응하는 최해갑을 보며, 들섬을 지키고자 하는 최해갑을 보며, 2MB에 대응하며 끊임없이 "여기 사람이 있다."를 외쳐 온 용산과 강정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통쾌해 하고 환호 할 수록 무언가 씁쓸했다. 최해갑과 맞서는 김하수는 우둔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 김하수가 존재한다면 그는 영화 속 존재처럼 절대 그렇게 우둔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죽어나가도, 뭇 생명들의 삶의 터전이 시멘트에 매장되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이들이 현실 세계의 김하수인 것이다. <남쪽으로 튀어>가 잠시나마 용산의 사람들, 강정의 사람들을 언급하지만 거기까지일 뿐이기에, 현실 세계의 그놈들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기에, 영화를 보며 웃는 웃음은 말 그대로 웃펐다. 

그리고 최해갑은 끝까지 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안봉희와 단 둘이서 그의 부모가 찾았다는 지도에는 없는 섬 <남쪽으로 튀어>버린다. "어, 어? 최해갑씨 현실을 두고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요? 그럼 남아 있는 우리들은 뭐가 되는 거지요?" 파란 바다를 가로지르는 최해갑을 향해 질문을 던지지만 그는 대답이 없다. 최해갑이 떠난 후 들섬은 평화롭다. 봉희가 없지만 국어 선생으로 인해 학교는 다시 열리고, 나라는 만덕이 아저씨와 여유롭게 낚시를 한다. 최해갑의 일가는 들섬에 남아 꿈꾸던 일상을 맞이한다. 그렇게 최해갑과 최해갑의 일가는 이야기 안에서 평화롭지만 이야기 밖 우리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도 여기에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 아직 우리는 여기에 있다. 


"<남쪽으로 튀어>버린 해갑씨 그대는 어떻게 그렇게 지지받고, 아무렇지않게 막 싸울 수 있었던 가요? 우리에게 그 노하우라도 알려주고 떠나시지요."


"네? 다, 김윤석씨 덕분이라고요? 잉? 음-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알겠어요. -_-; 허허-"

(그런데 해갑씨 해갑씨 혼자 좀 많이 튀어. 그렇지 않나요?)


"해갑씨와 봉희씨 그럼 안녕히. 그대는 남쪽으로 떠났지만 우린 여기에서 남루하지만 씩씩하게 잘 살 것이어요."


+ 쓰긴 썼으나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코미디를 말하고 싶었는지, 사람들의 오늘을 말하고 싶었는지. 후자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결국은 전자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남쪽으로 튀어>는 은근히 재미있는 영화이다.


+ 그냥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임순례 감독님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라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 민주역의 배우 한예리씨 예쁘다. <은교>의 김고운씨 만큼 이쁜 것 같다.  

2013. 2. 3. 11:42


어린 시절 나는 왕국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을까? 사천 할머니 댁에서 어렸을 때 장시간 머문 적이 있었다. 동네 또래들과 뒷산에 올라가 종일 놀다 내려온 기억이 있다. 뒷산에는 붉은 바위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 있었고, 바위를 도마로, 테이블로 활용하며 놀거나 바위틈에 들어가 숨어 있는 것을 즐겼다. 도시에서는 은신의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집안에서 책장의 책을 다 꺼내어 몸을 웅크리고 누우면 딱 맞는 작은 요새를 만들어 그 안에서 안락을 느꼈다. 왕국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난 그렇게 나, 우리만의 비밀공간에서 소박하게 노닐었다.


그런데 여기 정말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여정을 떠난 아이들이 있다. 실제 그들만의 왕국을 만든 샘과 수지의 <문라이즈 킹덤>을 보았다. 달이 뜨는 왕국,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이고 설렌다. 영화는 수지의 집, 즉 비숍  부부의 집, 집의 분절된 공간을 수직에서 수평으로 담는 것으로 시작된다. 분절된 공간에 비숍 부부와 수지, 그리고 삼형제가 제각각 존재한다. 안락하지만 단절된 공간에서 수지는 다른 왕국을 상상한다. 그곳은 수지의 왕국이 될 수 없다. 문제아로 각인된 까마귀 수지에게 그곳은 새장인 것이다.  샘은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위탁 가정에서 자랐다. 위탁 가정에서 샘은 골치 아픈 존재다. 모두가 그를 싫어하는 눈치다. 여름방학 동안 샘을 스카우트에 보낸 것도 그를 한동안 보지 않기 위해서다. 샘은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스카우트 대장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는 규율의 세계가 따분하기만 하다. 그리고 다른 스카우트 대원들은 말썽만 일으키는 샘을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너구리 샘은 텐트를 파고(?) 탈출을 감행한다. 문제아 까마귀 수지와 부적응자 너구리 샘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는 서로뿐이다. 그렇게 1년간의 오랜 서신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들은 그들의 왕국을 만들 것을 계획한다.


샘은 캠핑 장비를 야무지게 챙기고 수지는 고양이와 읽을 책, 레코드 플레이어를 챙긴다. 그들의 물품을 통해 생에 있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육체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샘의 물건과 영혼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수지의 물건이 조화를 이룬다. 왕국으로 향한 여정이 녹록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피도 보고, 죽음(웨스 앤더슨 감독은 왜 스누피를 죽였던 것일까?)도 접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들만의 왕국에 도착한다. 인디언의 수확기 이동경로인 그곳의 지명은 어느 지방 국도의 이름처럼 번호로만 명명되는 곳이다. 샘과 수지는 그곳을 '문라이즈 킹덤'이라고 새롭게 명명하고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한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수영을 한다. 이 장면이 재미있었다. 만(灣)의 양쪽 끝에 선 샘과 수지.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전경으로 잡다가 갑자기 얼굴로 향해 클로즈업 한다. 그 장면은 1965년을 배경으로 한 2012년에 만든 영화가 아니라 정말 1965년에 촬영한 1965년 영화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비숍 부부의 집과 아이반호 캠핑장은 '현실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샘과 수지는 '사이코'로 명명된다. 하지만 샘과 수지는 그들의 특이성이 그 어떠한 것에도 제약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음껏 발현될 수 있는 공간으로 간다. 분절되고 규율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뻥 뚫린 열린 공간에서 그들은 존재에 대한 자유를 만끽한다. 수영을 하고, 무언가를 선물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그들의 방식으로 왕국을 채운다. 그들의 낭만이 귀엽고 예뻤다. 그리고 부러웠다. 


하지만 그들의 왕국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유지 기간은 단 하루. 위탁 가정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샘은 고아원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수지에게는 샘을 만날 수 없다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샘을 데려갈 사회복자사가 오기 전까지 샘은 샤프소장과 하룻밤 지내게 된다. 그 시각 아이반호 캠프에서 아이들은 샘이 고아라고 하더라도 고아원에 보내져 '뇌가 잘려나가게' 그냥 둘 수 없다면서, 그 정도로 샘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라며 샘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샘을 구원할 것을 감행한다. 이 순간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미덕이지 않을까. 연민 혹은 타인의 처지에 대한 공감,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일시. 이런 '유연한 존재'들에 대해 웨스 앤더슨 감독은 애정을 표했다. 고통에 대한 공감은 이상(理想)에 가닿을 수 있게 하고, 상상(想像)을 가능하게 한다. 샘과 수지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갇힌 '현실 세계'의 탈출을 다시 한 번 감행한다. 그리고 또 이 순간에서 영화 속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애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이 든 배우들. 그들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내가 축 처진 빌 머레이의 배와 점점 더 물렁해지는 브루스 윌리스와 우둔해 보이는 에드워드 노튼과 회색빛이 더 찐해진 틸다 스윈튼을 보며 짠함을 느꼈다. 시간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며 현실적 인간이 되어버린 그들이더라도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의 범람을 받아들이며 서로의 삶에 대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아이들에 대해 연민을 발휘하고 있었다. 


샘과 수지, 그들의 친구들의 두 번째 탈출은 다양한 사건과 사고 등으로 위트 있게 그려진다.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는데 유쾌한 연출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샘은 어느 순간부터 수지를 본인의 아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둘은 친구들 앞에서 그들만의 결혼식을 치른다. 부부가 되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헷갈렸다. 사랑의 완결, 낭만의 통과의례로 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때문이다. 비숍 부부의 오늘이 샘과 수지가 겪게 될 먼 훗날(그들의 상대가 샘에겐 수지, 수지에겐 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의 오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굳이 어른들의 세계를 답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샘과 수지가 결혼이라는 어른들의 세계를 구현하며 그들의 독창성을 잃을 필요가 있었을까? 끝까지 그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칙하기를 바랐다. 


홍수로 샘과 수지, 그들의 친구들은 더 이상 숲에 남을 수 없게 된다. 교회로 은신한다. 그리고 대피소인 교회에 모두가 모인다. 결국 궁지에 몰린 샘과 수지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주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그들은 교회 첨탑으로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을 수도 있는 선택을 한다. 물이 너무 얕으면 뼈가 부러지는 고통으로 죽을 수도 있고, 수영을 하지 못하는 샘덕에 둘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 앞에서 그들은 두 번째 구원을 받는다. 샤프 소장은 샘에게 제안한다. "내가 너의 위탁 가정이 되어도 괜찮겠니?" 그 제안에 대해 샘과 수지는 제안을 받는 주체가 되어 샤프의 제안을 승낙한다. 샤프가 샘을 입양하는 것이 아니라 샘과 수지가 그들의 행보에 대해 결정하는 주체로 그려지는 것이 반가웠다. 그들만의 왕국 건설에 대한 일화는 이렇게 일단락된다. 홍수 후 그들의 '문라이즈 킹덤'은 퇴적물로 인해 지도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왕국 건설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샘의 그림 속 '문라이즈 킹덤'이 총천연색으로 그려지듯이 그들의 <문라이즈 킹덤>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 귀여운 영화이다. 영화 속 음악도 좋다. 촌빨나는 소품과 화면도 재미있다. 하지만 은근히 남자 냄새가 솔솔 나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엽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하고 싶은 것은 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30202) 

2013. 1. 30. 00:12


2011년 겨울 영화 <카페 느와르>를 보고, 2013년 1월 <카페 느와르>를 다시 보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198분이다. 상영시간이 꽤 긴 영화, 하지만 그 길이가 길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다. <카페 느와르>의 부제는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이다. 영화의 부제가 원제보다 영화를 더 잘 설명해준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집중해서 보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러닝타임 198분의 영화는 시작점부터 110분까지, 그리고 그 이후부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까지 두개의 다른 이야기가 하나의 제목으로 묶여있는 것과 같은 형식을 띄고 있다. 거칠게 나누면 두개의 이야기로 나눠질 수 있지만 조금 더 세분화하면 네개의 이야기로 나뉘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소녀가 화면 앞에 햄버거를 들고 등장한다. "하느님, 저를 보살펴주소서."라고 말하고 슬픈 얼굴로 햄버거를 우악스럽게 먹는다. 화면이 바뀐다. 서울의 이곳저곳이 영화 속에 담긴다. 허물어짐과 재건을 반복하는 서울의 풍경을 담으면서 '뒤엉켜버린' 서울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뒤엉킴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순간이 덕수궁 앞에서 수문장을 해야하는 이들이 남산 서울타워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허물어지고 세워지는 끝없는 반복 속에서 근원이 무엇인지 알수없게되어버린 서울 풍경을 뒤로하고 신하균과 문정희가 등장한다. 영수(신하균)는 담임을 맡고 있는 정윤의 엄마 미연(문정희)을 사랑한다. 하지만 미연의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오자 미연은 서울천년타임캡슐이 묻혀 있는 장소에서 그만 만날 것을 선언한다. 영화 시작부터 110분까지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근거로 서술된다. 영수는 미연을 사랑하지만 영수와 미연은 만날 수 없는 운명에 갇혀있고, 또다른 미연2는 영수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망하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미연2는 동물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지만 기다리는 누군가는 오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미연2에게 낯선 사내가 접근한다. 미연2와 낯선사내는 의미도, 의도도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다. 의미도 의도도 없는 대화이지만 '주제'는 존재한다. 어느덧 21세기가 왔고 우리는 쓸쓸하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전환하여 영수는 카페에서 미연2를 기다린다. 낯선 여인이 낯선 사내처럼 느닷없이 영수에게 말을 건넨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체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많은 지옥 중 체념이라는 지옥은 그나마 나은 지옥일 것이어요. 미연2와 영수는 길을 걷는다. 그리고 미연2는 말한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일부가 되어 예정되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쓸쓸하잖아요. " 영수는 음악실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친다. 정윤이 다가와 곁에서 엘리제를 위하여를 친다. 그러다 뽕짝버전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고, 정윤은 영수에게 말한다. "선생님, 살면서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여자 한명즘은 분명 존재할 것이에요. 그러니 선생님, 포기하지마세요. 노력해보세요." 영화를 보러가자던 미연2의 제안을 거절하고 영수는 미연을 만난다. 그리고 미연은 정윤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 넓은 세상 천지에 당신의 마음의 소원을 총족시켜 줄만한 여자가 한 사람도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결단코 한번 찾아 보셔요. 틀림없이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요즈음 스스로 그러한 옹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벌서부터 당신을 위해서나 우리들을 위해서 걱정을 하고 있답니다.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한 번 해보셔요! 여행을 하면 기분전환이 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럴겁니다! 구해보셔요.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자를 발견하여 돌아오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다함께 참다운 우정의 큰 환희를 맛보도록 해요.


영수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한강 유람선에 몸을 싣고 아무렇지 않게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 상황을 목격하던 햄버거 먹던 소녀는 놀라고, 그 죽음을 보고 살기를 결정한다. 그리고 영수는 물속에서 종종 만나는듯한 물속의 벙어리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 벙어리 소녀의 대사는 자막으로 처리되고 그 대사 또한 문어체의 대사이다. 이처럼 영화 <카페 느와르>는 문학 작품 속 말들을 그대로 가져와 영화 속 인물들이 말하게끔 하였다. 문어체의 대사는 어색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배우들의 입을 통해 다시 재생될 때는 고전 속 인물들이 되살아나 내 주변을 맴도는 듯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마치 내가 고전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상상하고 나름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영화가 고전 작품을 재현하는 독자가 되어 하나의 독창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정성일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재현인 것이다.


이렇게 세계소년소녀교양문학전집의 1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끝이 난다. 그리고 2부가 시작된다. 영화의 타이틀이 뜨고 영화는 언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냐는듯 태연스럽게 또다른 시작을 알린다. 물속에서 걸어나온 영수는 종로 점쟁이의 작은 천막에서 점을 보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리라."는 말을 듣고 서점을 찾는다. 물속을 유영하듯 젖은 채로 서점가를 거닐던 영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책장에서 꺼냈다가 다시 다른 서가에서 <백야>를 꺼낸다. 두번째 이야기는 도스프도예스키의 <백야>를 원작을 기반으로 서술된다.  도스프도예스키의 <백야>는 읽지 않았다.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재현을 통해 접한 <백야>가 나의 첫번째 <백야>이다. 한 여인이 한 사내를 기다린다. 하지만 사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백야, 하얀밤의 시간. 여인은 하얀밤이 찾아오는 시간에 사내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여인은 우연히 영수를 만난다.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영수에게 여인은 마음을 연다. 영수 또한 그녀에게서 또다른 사랑을 느낀다. 영수는 미연이 말했던 것처럼 영수의 마음의 소원을 충족시켜줄만한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여인을 연기한 배우는 정유미다. 그녀는 꽤 긴 시간동안 여인과 사내의 이야기를 문어체로 말한다. 배우 정유미가 텍스트를 읽는다. 소설<백야>를 읽는다. 그리고 배우 정유미가 음성으로 소설<백야>를 관객, 독자에게 전달한다. 텍스트가 눈앞에서 이미지화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이 영화는 구현하는 것이다. 정유미를 통해 구현되는 <백야>는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느낀다.


<카페 느와르> 2부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정유미의 독백 장면과 정유미의 독무 장면이다.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하는 정유미는 카페의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게 정유미의 독무 장면을 통해 배우 정유미에 대한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사랑이 여실히 드러났다. 친구는 배우 정유미를 보며 그녀는 '사랑받는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말에 걸맞게 배우 정유미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독무 장면에서 마음껏 드러낸다. 


이처럼 <카페 느와르>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사랑하는 것들'의 스크랩북이기도 하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사랑하는 고전작품들과 음악, 시(브레히트), 영화. 그는 그의 영화 속에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빛을 잃지 않도록 고결하게 스크랩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존경하는 영화 감독들에 대한 경의를 그는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 허우 샤오시엔과 아핏차퐁위라세타쿤을 연상시키는 소품과 장면을 보며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마음을 보았다. 그리고 <올드보이>, <괴물> 등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에선 한국영화에 대한 그의 칭찬도 읽혔다. 또한 그는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영화 속에 스크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이들까지도 영화 속에 봉인하고 있었다. 영수가 서점을 유영하는 장면에서 많은 보조출연자들이 등장한다. 새벽 시간에 촬영된 그 장면의 보조출연자들은 정성일 영화평론가를 사랑하는 팬카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 '사랑'을 영화로 매듭짓고 있었다.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스크랩북 <카페 느와르>의 숨은 코드를 나는 극히 일부분만 알고 확인할 수 있을 뿐, 엄청난 지식과 교양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사유하는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심어 놓은 '날 것 그대로의 것들'과 상징을 모두 읽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누군가가 내곁에서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 설명을 해주었으면 하고 소망했고, 동시에 소위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나도 섭렵하고 싶다고 욕망했다.


<백야>파트에서 영수는 미연이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 여인은 그의 환각 속에 만들어진 여인이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는 시간 동안, 사경을 헤매이다 사경의 어디즘에서 만난 여인인 것이다. 다시 사랑하게 된 여인이 기다리던 사내에게 작은 새처럼 포로로 날아가자 영수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나이든 노모만이 소리없이 울고, 언제나 그의 곁에서 맴돌던 남산타워가 그의 방 창밖에 있다. 영화는 끊임없이 남산타워를 등장시킨다. 인물이 어디를 걸어도 보이고, 서울의 중심가에서 촬영된 영화의 공간은 남산타워 바운더리에 속해있다. 남산타워가 고개를 돌리면 어디에나 볼 수 있는 도심의 붉은 십자가를 닮았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은연중에 관객들에게 '종교'에 관하여 묻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초반 "하느님 저를 보살펴주소서."라고 말했던 소녀의 구원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남산타워는 십자가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대부분 이 영화가 두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네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원치않은 아이를 품은 소녀의 이야기, 미연과 영수의 이야기, 영수와 여인(정유미)의 이야기, 미연2와 은하(요조)의 이야기. 이 네개의 이야기는 분절되면서도 하나로 묶여있다. 원치않은 아이를 품은 소녀가 남산을 오른다. 친구가 묻는다. "이제 어떻게 할건데?" "낳아야지." "낳아선 어떻게 할건데?" "키워야지." "키워서는 어떻게 할건데." 


"살아야지."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최종적으로 이 말을 하고싶었던 것은 아닐까. 


"살아야지."


 체념도 아닌, 그렇다고 다부진 각오도 아닌, "살아야지"라는 한마디를 통해 그는 산다는 것에 대한 소박한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깊은 밤, 내부순환도로를 함께 달리는 미연2와 은하(요조)의 덜덜거리는 질주는 불안하지만 위로가 되었다.  


19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이 영화는 나의 머리를 끊임없이 자극했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아주 훌륭한 영화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카페 느와르>는 곁에 두고 기억해야할 영화로 나와 인연을 맺었다.


+ 다이알로그와 텍스트의 불일치. 소리의 존재와 이미지의 부재도 생각해보자.


+ 정성일씨의 영화에 대해 기록한다는 것이 왜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지만(부끄럽지. 뭘 모르겠지만이야!), 

다시 정정해서,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영화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 부끄럽다. 하지만 기록해본다. 얼마전 영상자료원에서 2011년 화제작을 재상영했었다. 상영작 리스트 중 하나가 <카페 느와르>였다. 극장이 많이 멀었지만 좋은 상영관에서 공짜로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기뻤다. 영상자료원을 종종 찾아야겠다.


+ 쓰다가 만 글. 일주일만에 다시 썼다. 나는 이글을 매듭지은 것에 대해 스스로 칭찬한다. 잘했다! ㅎ

(20130119)

2013. 1. 6. 20:51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볼 예정이라면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씨네21에서 2012년도 영화 결산을 하면서 알랭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극찬하는 것이 눈에 계속 들어왔다. 그리고 정한석씨도 이 영화에 대해,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않은) 이들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관련된 기사와 글을 꾹 참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관련한 글을 읽고 싶지만 일단 글을 마무리 짓고 읽기로 한다. 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을 나누며 다시 한 번 영화의 희열을 느끼고자 아끼고 있다. 해를 넘기고 극장에 찾았다. 상영하는 극장은 거의 없었고, 아마 오늘이 마지막 상영이 될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사무실 근처엔 얼씬도않는 내가 홍대에 가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보았다.

 

영화는 연극 <에우리디스>의 극작가 앙뜨완과 함께 작업을 했던 배우 13인에게 앙뜨완의 부고를 알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앙뜨완이 죽었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앙뜨완의 집에 모여 그를 추모한다. 영화는 앙뜨완의 죽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앙뜨완은 죽기 전 새로운 극단에서 그의 작품을 진행하고 싶다는 부탁을 받았고, 새로운 극단의 배우들이 연기한 연극 <에우리디스> 필름을 과거 함께 작업한 배우들에게 보여주며 이 연극을 진행할지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앙뜨완의 유언을 시작으로 영화 속 연극 <에우리디스>가 시작된다. 한 자리에 모인 배우들은 연극 <에우리디스>의 필름을 보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기억 속으로 몰입한다. 몰입의 순간 영화는 경계를 잃게 된다. 영화와 연극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잃고, 새로운 극단의 배우들의 연극 <에우리디스>의 필름과 그 필름을 보고 필름 속 배우들과 교차하며 연기하는 현실과의 경계를 잃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잃고, 세대의 경계를 잃고, 육신과 영혼의 경계를 잃으며 영화는 연극 <에우리디스>의 스토리를 이어간다. 무너진 경계 속에서 각각의 만날 수 없는 요소들이 융합되어 영화는 진행된다. 그 무경계함의 향연이 보는 내내 감탄을 연발하게 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경계있는 것들의 경계를 잃어버린 융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막바지에는 거기에서 예상할 수 없는 장면들을 연출하며 저만치 앞서 내달린다.

 

영화는 앙뜨완의 죽음 전제하고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전제하고 들어간다는 것은 즉 그 전제를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앙뜨완의 유언이 끝남과 동시에 필름으로 시작 된 연극 <에우리디스>를 다 본 배우들은 그들 각자의 기억 속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앙뜨완이 갑자기 등장한다. 앙뜨완의 모습을 본 배우들은 놀라고 그의 환생과 같은 등장에 그저 환호 할 뿐이다. 거짓과 사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감독 알랭레네는 자신을 영화 속 집사의 위치에 두고 배우와 관객들을 바라본다. 알랭레네는 영화 속의 배우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동일한 위치에 두면서 필름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못했다> 속 배우들과 필름 밖 관객들의 경계를 다시 한 번 무너뜨리며 관객을 영화 속으로 쑥 끌어들이며 관객들에게 엄청난 희열을 전달하는 것이다. '정말, 이 사람 미친 것 아니야?' 놀람과 환희 속에서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을 때 영화는 순식간에 장면을 전환시킨다. 다시 앙뜨완이 등장하고 앙뜨완은 재빠른 걸음으로 숲길을 헤쳐 걷고 어떤 망설임도 없이 물 속에 몸을 던진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화는 앙뜨완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가장 영화적인 장면으로 연출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그 어떤 틈을 주지 않고, 새로운 극단의 연극 <에우리디스>에서 에우리디스를 연기한 배우를 등장 시키고, 황급히 앙뜨완의 묘지를 찾는 장면으로 전환한다. 에우리디스 역의 배우는 그보다 먼저 앞서 연기한 연극 <에우리디스>의 배우들을 앙뜨완의 묘지가 멀리 보이는 어둠 속에서 지켜본다. 과거와 현재가, 필름 <에우리디스>와 현실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헤깔리는 것이다. 이것을 시간적 흐름대로 순순히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앙뜨완은 죽었다는 영화 시작의 그 전제가 진짜였을까? 그렇게 헤깔려하고 있는 순간 다시 장면이 바뀐다. 이번에는 연극 <에우리디스>가 공연되고 있는 극장의 전경이 나오고 영화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가 올리브 숲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어느 순간을 분절의 순간으로 두고 해석해야하는 지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영화의 제목이 왜 그렇게 만들어 졌는지 어떤 저항감 없이 그저 이해되었다.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아, 알랭레네 엄청난 사람이다.' 나는 이 영화를 왜 이리 늦게 본 것일까. 영화를 보며 희열을 느낀 순간은 처음인 듯하다.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극장에서, 낙원동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이 영화는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와도 아주 잘 어울리는 영화인 것같다.

 

+ 무언가를 전제한다는 것은 믿게 만든다는 것과 동시에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우게 만들기도 한다.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를 각각 3명이 연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각각의 시대의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를 연기한 배우였다는 전제는 각각의 배우들이 동일한 대사를 읊고, 교차 편집되는 장면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은 전제의 전부만은 아니겠지. 배우들의 연기가 또 한 몫햇다.

 

+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할 말이 많다는 것은 관객을 자극한다.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는 훌륭한 영화인 것같다. 그런데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면 나는 무지하게 행복하다. 오늘이 그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 메모장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저리 주저리 적어내려 가는 그 순간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