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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에 해당되는 글 5건
2013. 3. 5. 01:31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접하면 나도 반짝이는 것 같아 즐겁다. 민우회에서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여성주의 영감을 얻게 된 당신의 책 38페이지를 함께 읽는 액션 위크를 기획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책장의 책들을 펼쳐본다. 여성주의 영감을 얻게 된 나의 책 38페이지엔 어떤 글이 쓰여 있을까? 페미니즘 서적을 펼쳤다가, 독립에 관한 에세이를 펼쳤다가, 만화책을 펼쳤다가, 진은영 시인의 시집 <훔쳐가는 노래>를 펼쳤다. 그녀의  시집 38페이지에는 좋아하는 시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가 있다. 천천히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生은 어쩌면 神이 전하는 유일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진은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 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대접해주는 예절 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말이 아니더라도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나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 하면서, 그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넥타와 같다는거

어릴 적 소뭉 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넥타를

나는 아매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 놓았나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득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되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2013. 2. 19. 00:24


이다님의 그림 : 어느 날 노을을 [보다]

http://2daplay.net/


트위터에서 이다님을 팔로잉하고 있다. 타임라인에 "어느 날 노을을 [보다]"라는 글과 함께 사진이 첨부되어 올라왔다. 뷰포토를 클릭하는 순간, 펼쳐지는 화면 속 노을 풍경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와아, 아름답다.' 이다님 노을 그림을 보다, 시집을 펼쳤다. 마침 진은영 시인의 시집 <훔쳐가는 노래>에 '노을'이라는 시가 담겨있다.



노을

진은영


하늘이 저기 있다

입은 채로 자신의 나일론 치마를 불태우는 여자처럼


벽에 걸린 그림 속에는 전나무의 녹색 바늘, 옥수수알의 노란빛이

눈을 찌르는 오후가 있다


불꽃, 너는

내부에 젖은 눈동자가 달린 동물 하나를 키우고 있다.

2012. 11. 10. 23:36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진은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 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대접해주는 예절 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말이 아니더라도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나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 하면서, 그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넥타와 같다는 거

어릴 적 소풍 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넥타를

나는 아마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 놓았나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득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2012. 10. 30. 22:51

시인의 사랑

 

진은영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2012. 4. 17. 00:04

삼십

 

서른.

서른을 맞이할 때 나는 30이라는 숫자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스물아홉의 날들에는 빨리 서른의 날들이 오기를 바랬다.

그리고 서른의 나를 맞이했을 때 기뻤다.

 

서른하나.

서른하나를 맞이하고 서른하나의 날들을 보낼 때는

3과 1의 조합이 마음에 들어 그 날들을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의 기준은 상대적이겠지만 내 기준에 빗대었을 때

약간의 열정과 약간의 매너리즘이 적절히 조합되어 무탈히 그 시간을 보냈다.

 

서른둘.

서른둘의 날들을 맞이한 나는 나의 서른둘에 대해 삼십대의 사춘기라 표현한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이 시간들이 나의 얼굴을 결정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간과 이마가 매일밤 움찔움찔, 꿈틀거린다.

미간과 이마에 생겨날 주름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모양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십대의 사춘기 그 시절은, 그 시간을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뼘 자라 있었다.

그것은 회피가 아니었다.

삼십대의 사춘기 이 시절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쩌면 회피일지도 모른다.

서른둘 나는 항상 선택과 직면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두렵고 피곤한 선택과 직면,

서른둘을 맞이하며 나는 삼십대의 사춘기를 맞이한다.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나의 서른둘을 어떻게 기억할까.

서른둘을 지나온 여자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서른둘을 지나온 여자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서른 살

 

진은영

어두운 복도 끝에서 괘종시계 치는 소리
1시와 2시 사이에도
11시와 12시 사이에도
똑같이 한 번만 울리는 것
그것은 뜻하지 않은 환기, 소득 없는 각성
몇 시와 몇 시의 중간지대를 지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
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듯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서른 둘의 밤, 날 웃게 만드는 꽃개. 봄개.

:)

이소정 페북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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