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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에 해당되는 글 6건
2013. 9. 27. 01:05


1. 

지난 주말에 <우리 선희>를 봤다. 영화와 관련된 글을 읽으면서 이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야겠다싶었다. 씨네21 921호 표지 타이틀은 '아름다워라 <우리 선희>였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한 지나친 기대때문이었을까? 나는 '아름다워라.'라는 수식어가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영화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2.

<우리 선희>를 보면서 공간이 보였다. 제일 먼저 들어온 공간이 재학(정재영)의 방이 었고, 그리고 예지원의 '아리랑'이었다. 그의 영화에서는 남자들의 공간은 자주 등장한다. 홍상수 감독의 지인들이 실제로 거주하거나 작업하는 공간이 영화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 공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곳에 거주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느낌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여자들의 공간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홍상수 영화 속 여자들의 공간을 더듬어 봤다. 떠오르는 곳은 <하하하>의 성옥(문소리)의 집과 <북촌방향> 경진(김보경)의 집뿐이다. 성옥의 집은 주로 외관만 나온다. 경진의 집은 경진의 흔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계속 생각하다보니 <옥희의 영화> 옥희(정유미) 방도 있군.) 그외 여자들의 공간은 <북촌방향>의 예전(김보경)이 운영하는 술집 '소설'이나 <우리 선희>의 예지원이 운영하는 주점 '아리랑'과 같은 곳이다. 홍상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의 공간에 대해 고민해보면 재미있을 것같다. 남성의 공간과는 어떻게 다른지. 단선적으로 말하면 홍상수 감독이 그리는 여성의 공간을 보고 있노라면 홍상수 감독은 여자를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3.

<우리 선희>에서 최교수, 재학, 문수가 창경궁 호수 앞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그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가을 창경궁 호수가 실제가 아니라 회화같았다. 그 장면의 세 인물은 그림(사진)을 배경으로 서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림과 인물을 합성한 것처럼. 배경을 정면으로 잡고, 그 안에 인물을 담으니 배경과 인물이 같은 시공간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요소가 영화 안에서 결합된 것처럼 보였다. 이 장면에 대해 나만의 해석을 해보고 싶어졌다. 여튼 <우리 선희>에 대해 생각만 동동 떠다니는 밤, 그의 영화를 다시 보고 글을 써봐야 겠다.

(20130926)

 

 

협동하여 무언가를 해야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것이 나와 같지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상대가 나와 같은 경험을 했고, 내가 생각하는대로 상대도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착각이다. 기준이 내가 되어서 안되는 것이다. 활동을 하면서 나는 '부담 가지지 말고 가볍게 하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부담가지지 말고 가볍게'라는 것은 나의 기준이다. 이것이 상대방에게는 '부담스럽고 무거운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고려하지 않았다. '올해 나는 과연 좋은 동료였을까?'라고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걱정되고 두렵다.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 과연 나도 성장하고 있는걸까? 

(20130924)



5시 30분 일을 마치고 도시락을 들고 성미산에 갔다. 몇가지 일상적 찬(김치, 멸치, 김자반)을 벤치에 펼쳐놓고 저녁을 먹었다. 밥알을 씹어 삼키는 동안 가을 해가 어스름의 이불을 덮었다. 밤과 낮의 길이가 똑같은 추분이라고 한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부터는 밤이 길어진다고 한다. 날이 선선해져 운동을 하기로 했다. 걸을 작정으로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다. 사무실에서 집까지 걸었다. 가을 단풍이 노랗게 들면 다시 걷자고 여름날 약속했던 아파트 은행나무 길을 지났다. 그리고 불광천을 곁에 두고 걸었다. 불광천 오리에게 작은 시비도 걸고, 운동기구에 몸을 맡겨 스트레칭도 하고, 에어로빅을 하는 무리에 들어가 트로트 음악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추고, 음악분수에 감탄했다. 마지막으로 동네 작은 놀이터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즐거웠다. '즐겁다'라는 말은 오늘 같은 밤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이다.

(20130923)



2013. 3. 11. 00:0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관한 글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글을 시작하고 어떤 내용으로 글을 써야할지 몰라 며칠째 머릿속으로 영화 장면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홍상수 감독의 전작 <밤과 낮>,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를 다시 보았다. 연필을 들고 노트에 영화의 흐름을 쭉 한 번 적어보았다. 해원의 세 편의 일기가 영화의 주된 축이다. 3월 21일 해원의 엄마가 캐나다로 떠났다. 한식당에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해원은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해원은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 샬롯갱스부르의 엄마 제인버킨을 만난다. 해원은 평소에 좋아하던 배우의 엄마를 직접 만나게 되어 미쳐버릴 지경이다. 소리를 지르고, 흥분되어 몸을 마구 흔들어 댄다. 그리고 말한다. 샬롯갱스부르와 같은 배우가 된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고. 그리고 그녀는 "트루아티스트"라고 제인버킨에게 말한다. 해원역의 정은채는 실제로 샬롯갱스부르를 좋아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의 엄마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촬영 현장에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홍감독은 우연을 놓치지 않고 그의 영화 속에 담았다. 그리고 제인버킨은 해원(정은채)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 딸을 많이 닮았어요." 배우 정은채는 실제로도 샬롯갱스부르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였다. 현실이 픽션이 되는 순간을 홍상수는 영화에 담고 그것을 꿈이라고 명하였다.

 

현실계와 환상계의 중간영역을 그는 영화계라고 말한다

현실의 축이 있다. 그리고 환상의 축이 있다. 이 두 축은 별개의 세계이지만 두개의 축이 교집합되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하게 된다. 이를 경험하였을 때 우리는 이것을 현실이라고 해야할지, 환상이라고 해야할지,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묘하다고 표현할 뿐이다. 이런 모호한 영역을 홍상수 감독은 꿈이라고 명명하고, 그는 그것을 필름에 담았다. 나는 이것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계라고 표현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축과 환상의 축을 오고가기 위해 활용하는 장치가 있다. 일단 그는 공간을 빌어 현실과 환상이 교집합되는 영화계를 구축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가짜 공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통영, 제주도, 신두리, 아차산, 모항, 북촌과 서촌, 아차산과 남한산성 등과 같이 진짜 장소에서 영화를 찍고 명확한 지명을 영화 속 배우들이 언급하도록 한다. 그리고 명확한 장소의 명명과 더불어 그 장소에 위치한 구체적 공간을 영화 속에 그대로 등장시킨다. 그가게, 유명장, 사직공원, 아차산 휴게소, 다정, 소설 등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공간, 홍상수 주변의 사람들이 주로 향유하는 공간을 영화 속에 그대로 등장 시킨다. 그 공간은 현실계이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 공간을 토대로 깔고 그 위에 이야기를 쌓는다. 토요일 오후 광화문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고 서촌까지 걸었다. 해원의 엄마가 다녔던 학교와 해원과 엄마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던 찻집을 지나고, 그가게 앞에서 기웃거려 보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가짜 인물이고 그 이야기도 가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고갔던 머물렀던 공간은 진짜로 존재한다. 그 지역에 내가 서 있었을 때 나는 현실계와 환상계의 중간영역인 영화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이야기이지만 이야기는 현실 공간을 빌어 전개된다. 홍상수 감독은 진짜 공간 위에 만들어진 가짜 이야기에 현실계의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였을 것이다. 현실계와 환상계의 통로로 홍상수 감독은 영화계를 구축하였고, 그 공간을 아는 이들이은 그곳을 통해 현실계와 환상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아는 이들만이 오고갈 수 있는 암호같은 비밀의 통로를 만든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서촌을 산책할 때 환상계에 초대된 유령이 된 것처럼 나는 유유히 서촌을 어슬렁 거렸다. 

 

진화하는 홍상수 감독 영화 속 그녀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는 내내 긴장감에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특별히 긴장이 될만한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영화 속에 잠식되어 있는 불안의 공기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왜 그토록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경직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해원의 대사가 대답이 되었다. "외롭고 슬프다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해원은 이십대이다. 함께 살고 있는 이가 없다. 엄마는 캐나다로 떠나버렸다. 학교는 재미없다. 학교에서 무언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해원은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삶의 섭리를 스스로 통달하고 있다. 해원은 튼튼하다. 해원은 스스로 생각해도 본인이 너무 튼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원은 외롭다. 그리고 슬프다. 외롭고 슬퍼서 옛 애인인 성준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성준은 해원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성준은 애인이(었)지만 해원과 영혼을 교감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해원과 성준은 술집에서 학교 동기들을 만나고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된다. 성준은 해원과의 관계가 탄로날까봐 조마조마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해원은 그 긴장을 깨고 일어난다. "오늘 엄마가 캐나다로 떠났어. 내가 슬퍼서 선생님을 불렀거든. 그게 진실이라고. 믿던 안믿던. 거짓말해서 미안해." 이렇게 해원의 첫번째 일기가 끝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해원의 뒤로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흘러 나온다. 해원의 슬픈 마음을 음악이 대신하여 말한다.

해원의 두번째 일기는 성준과 남한산성을 찾아간 이야기로 시작된다. 늦은 오후 햇살이 나즈막이 내려앉는 시간, 해원과 성준은 남한산성의 고건물 계단에 나란히 앉아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을 카세트로 함께 듣는다. 그때 성준은 말한다. "우리 오래 보자. 우리 잘 살자."라고 말한다. 그 말에 해원도 평온한 얼굴이다. 곧이어 성준은 말한다. "정신바짝 차리고 우리 들키지 않도록 잘하자." 그 말에 해원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해원은 받아친다.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결국 다 알아요. 다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에요. 다 죽으면 돼요." 성준은 일차적이고 거짓말을 만드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해원은 복잡다단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그렇기때문에 해원은 성준을 사랑하지만 외롭고 슬프다. 그러다가 산다는 것 자체가 무서워지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해원은 솔직하다. 튼튼하다. 하지만 불안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진화하고 있다.    

 

해원의 세번째 일기에 관하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세번째 일기는 해원의 긴 꿈에 관한 일기이다. 해원은 학교 도서관에서 잠이 든다. 꿈 속에서 해원은 친구 유람이에게 이 감독과의 관계에 대해 다 털어 놓는다. 하지만 꿈이다. 해원은 꿈에서 깨어 "미친년. 미친년"이라며 자기를 질책한다. 해원은 그것이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교를 나와 해원은 혼자 서촌을 산책한다. 서촌을 산책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대학교수를 우연히 만난다. 대학교수는 용기를 내어 해원에게 차 한잔 함께 할 것을 권한다. 해원은 흔쾌히 그와 대화를 나눈다. 대학교수는 해원에 대해 말한다. "해원씨는 알고 싶어해요. 자기가 누군지. 절대적 진실을 해원씨는 사람들을 만나고 직접 부닥치면서 채워나가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대학교수는 독특하다. 마틴스콜세지와 아주 절친한 듯하고, 염동력으로 택시를 부른다. 해원은 그 장면을 신기해하며 그와 헤어진다. 이후 해원은 남한산성에서 친한 언니를 만난다. 언니와 언니의 애인, 해원은 안개로 가득한 길을 걷는다. 안개로 가득한 풍경은 마치 비현실적이다. 해원은 그곳에서 성준을 만나고 그에게 하고팠던 말들을 시원하게 내뱉는다. "선생님은 왜 원하는대로 다 하려고 하세요. 왜 다하려고만 해요. 선생님이 잘못됐어요." 그렇게 성준과 헤어진 해원은 전에 걷지 못했던 남한산성의 길 끝까지 걷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친절한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에게 두 잔의 막걸리를 얻어 마신다. 어떤 질문도 없이, 술을 청하는 해원에게 그는 그저 술을 따라 줄뿐이다. 해원은 그의 배려에 위로를 느낀다. 그리고 친절한 아저씨는 길을 걷다 성준을 만나고 그에게 질문한다. "남한산성 좋았습니까?" 그는 답한다. "네 좋았습니다." 성준은 거짓말을 한다. 해원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좋았을리가 없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또 홀로 남아 운다. 해원은 울고 있는 성준을 발견하고 그를 위로한다. "조금만 기다려요. 괜찮아질거에요." 순간 장면은 바뀌어 학교 도서관 책상에 엎드려 잠든 해원을 비춘다. 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꿈에 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같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꿈 속의 해원이 꿈 안에서 깨어 다시 꿈을 꾼 해원의 긴 꿈에 관한 것이다. 해원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가 아니라 꿈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관객에게 이것이 꿈이라는 장치를 틈틈이 전달하고 있었다. 마틴스콜세지와 염동력,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해원, 안개로 가득했던 풍경이 그러한 것이다. 해원의 세번째 일기에 관하여 많은 이들이 허탈해 했다. 꿈이었어? 왜 굳이 모든 이야기를 꿈으로 시작하여 꿈으로 매듭지은 거지? 홍상수 감독은 마지막 이야기를 쓸 때 어떤 심정이었던 걸까? 어쩌면 홍상수 감독에게 그것이 꿈이든 진짜 이야기이든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해원이 느끼는 감정들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그런 장치를 활용한 것이지 않을까? 해원은 꿈속에서 자유롭다. 친구에게 솔직하게 성준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는다. 미국에서 온 대학교수와 결혼을 해볼까 상상을 하며, 연주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준에게도 담아두었던 말들을 다 한다. 담아두었던 말, 하지못했던 말을 해원은 꿈을 빌어서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홍상수 감독은 해원이 감정을 원없이 풀 수 있도록 그녀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꿈이다. 해원은 깨어나서 생각했을 것이다. '아, 꿈이었구나. 하지못한 말들, 하고 싶은 말들은 아직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구나.' 그래서 해원은 외롭고 슬프다가 갑자기 무서워졌을 것이다.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까?"라고 해원은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녀는 예상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런 상태는 지속되고 반복되겠지." 그래서 해원은 무서웠을 것이다. 외롭고 슬픈, 그리고 무서운 삶의 길 위에서 말없이 술 한잔을 따라주던 그 아저씨가 해원은 더더욱 생각났을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녀의 일기는 "꿈에서 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같았다."라고 끝난것이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짓는 실력은 기가 막힌다. 이런 제목은 그의 사유에 기인한다. 영화 속 대사도 정말 죽인다.

+ 영화를 보고 나는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비교하였고, <다른 나라에서>가 더 좋은 영화라고 떠들고 다녔다. 오늘 <다른 나라에서>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본 후 그 영화는 여전히도 좋은 영화라고 또 생각하였고,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별개의 영화라는 것을 확인하였고, 그리하여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각각 너무나도 좋은 영화라고 결론지었다.

+ 해원과 엄마의 관계도 재미있었다. 이 둘의 관계는 현실세계의 모녀의 관계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매력있었고 이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고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인 <우리 선희>라는 영화도 기대된다.

+ 못 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썼다. 썼다는 것에 일단은 의미를 두려고 한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3. 3. 1. 22:57



남쪽 나라에는 봄이 성큼 왔다. 화개장터와 쌍계사 중간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민우회 지부 대표 선생님들과 함께 워크샵을 다녀왔다. 조용히 햇빛에 등을 내어놓으면 나른하고 따스워져 다정했던 순간들이 생각났다. 그렇게 봄이 오고 있었다. 남쪽에서부터. 벚꽃이 피는 계절에 섬진강 근방을 다시 한 번 오고 싶다. 모든 길들에 벚나무가 촘촘히 심어져 있었다. 화개에서 하동으로 1시간 남짓 시골버스를 타고 달렸다. 넉넉하고 포근한 땅과 산의 모양새가 마음을 너르게 만들었다. 기분이 좋아 절로 웃음이 나오는 시간이었다. 화개에서 1박, 사천 할매댁에서 1박, 2월의 배웅과 3월의 마중을 남쪽에서 하였다. 

(20130227-20130301)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예고편을 보다가 해원과 이 선생의 대화 씬에서 깜짝 놀랐다. 고민이 닮아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가나보다. 여하튼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곧 개봉한다. 기대된다. 극장에 가서 경건히 봐야지. ㅎ

+ 씨네21 배우 정은채의 인터뷰 글을 읽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질투가 느껴졌다. 질투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남자 배우는 주인공으로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여자 배우는 주인공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다. 홍상수 감독을 좋아하지만 이 부분은 솔직히 마음에 안든다.

+ 맥주 마시고 싶다.


얼마전에는 내가 살다 간 흔적을 세상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존재에 대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 사람들은 아이를 만드는 것일까? 그래서 결혼하는 걸까?' 영화 엔딩크레딧에 쓰여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보며, '저 사람은 저렇게 흔적을 남겼네.'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내가 살다간 흔적을 세상에 남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지인에게 말 했더니 지인은 논문을 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며칠은 '정말 공부를 해볼까?'라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일단은 살아봐야겠다. 살면서 계속 글을 써봐야겠다. 살다보면, 글을 쓰다보면 어떻게든 존재의 흔적을 남길 수 있겠지. 

(20130226)



왜 상집 회의만하고 나면 모든 의지력이 상실되는 것일까?

(20130225)

2012. 6. 9. 02:27

 

 

산다는 것이 참 찌글스럽다. 오늘 하루는 진창같은 하루였다. 자책도 하고, 울기도 하고, 정신차려야 겠다, 다짐도 하고 여튼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나 오르고 내리고 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가는 길 적절히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서 좋았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한참 서서 멍하니 비내리는 장면을 봤다.

 

한참 비나리는 장면을 보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 좌석에 앉는다. 영화 시작 전 10여분을 앞둔 시간. 나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그 순간이 좋다. 어떤 장면들이 내 앞에서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늘 설렌다.

 

영화 엔딩이 끝나는 순간, '역시 홍상수다.'라고 생각을 했다. 홍상수 감독의 초기작은 본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이다. <밤과 낮>,  <잘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오늘 본 <다른 나라에서>를 제외하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섰던 기억은 있는데 솔직히 영화의 장면들과 이야기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감정들을 일괄적으로 표현하자면 좋았다는 것. 별로인 영화들도 있었던 같긴 하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홍상수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하하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했고, <옥희의 영화>를 보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대가 컸다. 나의 저질스러운 기억력때문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다른 나라에서>"라고 무식하게 답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아름답다.'라고 연신감탄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왜 아름다운 영화인가?

<다른 나라에서>는 크게 세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등장한다. 세개의 에피소드 중 첫번째 에피소드가 끝나는 순간 영화가 너무나 아름답고 슬퍼서 혼이 났다.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안느와 안전요원은 등대가 어디에 있는지 서로 물으며 대화를 나누게 되고, 안전요원의 텐트 안에서 또 대화를 나눈다. 안전요원은 뷰티풀네임을 가진 안느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 안느는 안전요원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안전요원은 그 편지를 읽지 못한다. 그 장면이 어찌나 슬프고 아름다운지. 홍상수 감독은 첫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불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안전요원은 안느에게 뷰티풀이라고 말하지만 뷰티풀의 b를 p로 잘못보고 그 언어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 이후의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안느와 안전요원은 거기에서 그냥 끝을 맺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동일한 언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행간에 함축된 의미를 읽지 못해, 혹은 같은 단어와 문장을 보고 들어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서 겪게 되는 불통의 비극을 우리는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홍상수 감독은 그 불통의 비극을 너무나도 위트있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비극은 극대화되었다.

 

꿈과 상상, 현실의 변주_그 무경계함을 말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를 모르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이것이 영화 속 주인공의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시간이 있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씨는 홍상수 감독에게 '꿈'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현실이라는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이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그는 답했다. 그 말에 '아, 그래서 홍감독 영화를 만드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본다.'라고 생각했다. 진창같았던 하루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권해효씨를 보며, 유준상의 "아윌프로텍트유"를 들으며 극장에서 내내 큭큭 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영화의 엔딩이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지면서 찌글스러웠던 오늘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 중 하나로 술을 마시고 취했을 때도 언급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엔 술을 마시고 취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두번째 에피소드의 문성근씨 또한 그랬다. 그는 만취하여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귀엽게 질투를 했다. 문의 연기는 징그러울 정도로 리얼해서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문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그의 행보와 무관하게 연기하는 순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던져버리고 있었다. 대단하다.

 

요즘엔 꿈을 상당히 많이 꾼다. 꿈 속에선 다양한 이들이 등장하고 내게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나의 꿈 이야기를 스승님에게 말했더니 스승님은 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모두 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승님도 하루는 꿈 속에 5명의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5명의 사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꿈 속의 각기 다른 등장인물이 결국엔 다 자기였던 것같다라고 했다. 현실과 꿈은 경계를 가지고 있는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경계가 없는 것이다. 현실을 경험하는 이도 나인 것이고, 꿈을 꾸는 주체도 나이기때문에 현실과 꿈을 경험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꿈이든 현실이든 하나의 경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이것이 현실이다, 혹은 꿈이다라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이러한 무경계함을 진작에 알고 있었고 그는 꿈과 현실의 무경계함을 적극적으로 다양한 변주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었다. 두번째 에피소드가 특히 현실과 꿈의 무경계함을 열심히 표현하고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과 꿈의 무경계함을 말하는 동시에 생의 다양한 변주를 그의 영화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사실에 근거하여 존재한다기 보다는 믿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 인상 깊었던 것 등 제각각 주관적 기억력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인간들이 비슷한 어쩌면 동일한 경험들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렇기에 첫번째 에피소드 해변가의 소주병은 한국사람이 버린 것있을 수도 있고, 안느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안느가 쟁여두었던 우산은 어쩌면 세번째 에피소드의 안느가 숨겨 둔 것일 수도 있고. 모항의 좋은 풍경을 안내해주겠다던 첫번째부터 세번째 에피소드의 원주는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고.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세번째 에피소드까지 모항해변에서 수영을 하던 안전요원의 시간은 분절된 시간일 수도 있고 연속된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별개의 시간이면서도 뭉개진 시간일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세번째 에피소드 모두가  한사람의 경험일 수도 있고 수많은 인간군상의 동시다발적 경험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철학을 논하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첫번째 두번째 에피소드에 비해 상당히 튄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올 김용옥이 등장하는 것도 낯설었고, 안느와 스님(김용옥), 박숙(윤여정)의 대화장면도 뜬금없었다. 하지만 그 장면은 달리 표현하면 명쾌하고 시원했다. 살아가면서 생각없이(?) 마구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우리는, 누군가가 뜬금없어한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제대로 묻지 못하며 살아간다. 묻는이도 그러하지만 답하는 이도 그러하다. 나의 답변에 대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이렇게 답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강박에 갇혀 침묵하는 경우도 왕왕한 것이다. 하지만 안느와 스님은 그런 강박에 벗어나 묻고 싶은 것을 묻고 답하고 싶은대로 답한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옳고 그런지를 떠나 그 과정속에서 제 나름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의 영화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었다.

 

나도 홍상수 감독에게 강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질문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하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묻지않고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하고픈대로 행하였다. 그 행함이 나를 더욱 자유롭게 만든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책임'에 관한 안느, 금희(문소리), 종수(권해효)의 대화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감독의 하고픈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감독은 말하지 않는다. 그 대화를 보고 듣는 관객이 그저 판단할 뿐. 홍상수 감독은 그의 영화를 통해 관객 각자가 각자의 진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제시하고 있었다.

 

결론은 좋은 영화를 보고 진창같은 현실을 어느 정도 위로할 수 있었고, 이번 영화를 보고 장면없는 영화 시나리오를 하나 생각했고-제목은 <관객과의 대화>-홍상수 감독을 더욱 애정하게 되었고, 그와 친해지고 싶다 생각하며 그와 술 한 잔 걸치는 날을 상상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나는 모항에 갈 것이다.

 

+ 홍상수 감독은 GV를 시작하면서 관객들에게 한가지 당부를 했다. 본인은 영화를 본 후 영화에 대해 그저 느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를 그는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굳이 질문을 짜내어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고 영화를 본 느낌을 말해주면 좋겠다고 관객들에게 부탁했다. 직관과 느낌으로 생을 살아가는 홍상수 감독의 면모를 그 짧은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직관과 느낌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다. 부럽다.

2012. 5. 13. 21:48

 

5월 31일 개봉.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곧 볼 수 있게 되어 좋다.

<다른 나라에서>

2010. 10. 30. 23:24


홍상수 감독 '옥희의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아차산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홍상수 감독은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일상의 공간을 카메라에 담고 그 공간에 인물을 얹히고 그 인물들에게 말을 하게 함으로써 공간과 인물 그리고 말의 묘한 조화를 훌륭하게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해변의 여인'과 신두리,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제주도, '하하하'와 통영, '옥희의 영화'와 아차산, 그의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 나도모르게 "그곳에 한 번 가봐야 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10월의 마지막자락 그래서 나는 아차산을 다녀왔다.

'옥희의 영화'의 네번째 영화 '옥희의 영화'의 촬영지 아차산, 영화 속 그녀처럼 운동화에 점퍼 차림으로 물병 하나 손에 들고 산에 오른다. 나이든 남자와 옥희, 젊은 남자와 옥희가 차를 주차한 주차장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다. "산에 오면서 차가지고 오는 사람, 잘 이해가 안되요." 그 주차장을 바라보며 영화 장면을 다시 한 번 그려본다.

그리고 산 입구에 있는 사슴동상도 한 번 바라본다.  나이든 남자와 옥희는 사슴을 보고 한마디씩 했고, 젊은 남자와 옥희는 사슴을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나는, "이 사슴 쇠로 만든걸까요? 아님 종이? 밤에는 조명도 들어오나봐요." 그리고 별 생각하지 않고 걷는다. 어느 위치에서 카메라를 잡았을까? 비오는날 옥희와 옥희의 친구가 우산을 들고 함께 걷던 길이 이 길일까? 생각을 하며 내가 돌아온 길을 다시 되돌아 본다.



얼마 안가니 나이든 남자와 옥희가 올려다 봤을 법한 잘생긴 소나무가 보이고, 젊은 남자와 옥희가 키스를 한 바위 언덕이 보인다. "아니 이 사람들 여기까지 밖에 안 오고 돌아간거야. 나이든 남자는 정말 '나이'때문에 산행을 시작한지 30여분도 안된 시점에서 내려가자고 한 것일까?" 영화 속 시간 개념과 현실 시간 개념을 따져 묻다가 굳이 뭐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을 하며 잘생긴 소나무에 집착을 한다. "잘생긴 소나무라면 어떤 소나무일까?" '하하하'에서 성옥(문소리)이 문화재 해설을 하던 통영 제승당에 있는 소나무 정도되야지 잘 생긴 소나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통영 제승당의 소나무처럼 붉은 표피에 쭉쭉 뻗은 소나무는 아차산 바위언덕자락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이든 남자의 소박함에 괜시리 마음이 짠해진다. 

주차장, 아차산 입구, 잘생긴 소나무, 바위언덕 그리고 화장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경은 30분이라는 현실 시간 개념안에서 모두 등장한다. 세인물이 모두 다녀갔던 화장실은 공사 중인 듯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30분, 영화에 얽힌 걸음을 그만두고, 영화 속 시간을 탈피하여 나의 시간 속 아차산 길을 오른다. 높지 않지만 능선을 따라 걸으면 꽤 장시간 걸을 수 있을 듯한 산, 서울의 동서남북이 한 눈에 다 들여다 보이는 산, 한강과 가까이 있는 아차산은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총 1시간 30분 정도 걸었을까? 운동화에 점퍼 그리고 청바지, 간단한 차림이어 장시간 걷진 못했다. 아니 의상의 핑계라기보다는 그 이상 걸을 의지가 없었다. 탁트인 풍경을 눈앞에 두고 생각을 했다. "나도 영화 만들고 싶다." 한강이 시원하게 보이는 산 어디즘에 앉아 그에게 제안을 했다. "졸업하기 전에 영화 한 편 같이 만들어 보는 것 어때요?" 연애가 끝나고 상대에게 계속해서 질척거리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가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다. 영화 생각을 해야겠다. 아차산 휴게소에서 잔치국수 두그릇에 막걸리 한병을 시켜 먹고 살짝 알딸딸한 기운에 산을 내려온다.

땡스, 옥희의 영화! 땡스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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