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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책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2건
2012. 7. 27. 00:33

 

 

영화 <도둑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씨네21을 펼치고 정한석 기자가 쓴 <도둑들> 프리뷰를 봤다. 그의 프리뷰에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프리뷰에 "아니요. 잠깐만요! 달리 생각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생각에 빌어 나의 생각을 말해보려고 한다. 그전에 영화를 보며 내가 신기해했던 지점을 짚고 넘어가보려고 한다. 

 

<도둑들>을 보며 신기했던 부분 중 하나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9명(도둑으로 위장한 경찰 줄리는 제외)의 도둑들 중 첸(임달화)을 제외하고는 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도 직접 총을 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점이 재미있었다. 마카오 카지노에서 스위트룸에 들어간 예니콜(전지현), 뽀빠이(이정재), 팹시(김혜수), 옥상에 있던 잠파노(김수현)을 제외하고는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손에 총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카지노에서 경찰들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총을 한 번즘 쏠 법도 한데 그들은 쏘지 않았다. 그리고 부산에서도 위홍일당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끊임없이 총을 쏘았고, 경찰들도 계속해서 총을 쏘아댔지만 도둑들의 손에는 총이 없었다. 왜 그들은 총이 있어도 총을 쏘지 않았고, 상대는 총이 있는데 왜 그들은 총이 없었던 것일까? 허리우드 영화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상대가 총을 쏘면 당연히 나도 총을 쏴야 한다는  단순 화법에 익숙해져있던터라 도둑들이 총을 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도둑들이 총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들에게 총은 '쏘기'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기때문이었고, 둘째 그들의 목적은 허리우드 영화 화법에서 종종 등장하는 적을 두고 '적과 싸우기'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말그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뭔가를 훔치기'위한 것이기때문에 굳이 총이 필요 없었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미쿡사람도, 홍콩 사람도 아닌 '한쿡' 도둑들이기때문에 총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홍콩 사람이었던 첸(임달화)만이 총을 들고, 총을 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본인이 정체가 무엇인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고 옆길로 세지 않고 맡은바 임무에 '충실한' <도둑들>이 기특했다.

사람들이 이유없이 무차별적으로 죽어나가는 영화를 싫어 한다. 밑도 끝도 없이 일단 죽이고 보자는 그 무자비함이 싫다. 그렇다고 이유있는 살인은 또 무엇인가 물으면 할말은 없지만...'태양의 눈물'을 넘보는자, '태양의 눈물'을 빌미로 자신에게 접하는 자를 무조건 죽이고 보겠다는 위홍일당과 달리 '훔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총알 세례를 맨몸으로 받아내는 도둑들이 순박해서 좋았던 것이다. 결론은 허리우드의 정서가 아니라 '한쿡 정서를 담뿍 품은 오락영화'라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정한석 기자는 '작전이 실행 되자 의아하게도 서사의 활력이 갑자기 무뎌진다. 특히 보석을 탈치하는 장면에서는 이 영화의 장르적 성격상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할 서사적 아이디어가 무디거나 없다. 그렇다고 그 자리를 특기할 만한 물리적인 흥분감 또는 신속함이 대신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대해 나는 "비교집단을 두고 영화를 보게 되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허리우드 영화라는, 특히 <오션스일레븐>이라는 확연한 비교군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는 턱없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겠지요. 하지만 비교하지 않고 한쿡 오락영화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면 이 영화는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고, 충분히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장르적 성격을 가진 영화에 대한 나의 기대치가 너무 소박한 것일까? -_-;) "기자님, 보석 탈치 장면이 아쉬웠다 손 치더라도 건물외벽씬은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았나요?"

 

두번째로 그는 '인물들 사이에 여러 가지 감정적인 인간관계를 걸어놓고 있지만 그걸 맺고 푸는 과정도 유연하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첸(임달화)과 씹던껌(김해숙)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들을 어떻게 퇴장시킬 것인가 고민하다 내린 서사적 극약 처방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감독 또한 "첸(임달화)과 씹던껌(김해숙)의 감정에 대해서는 영화의 속도를 위해서 빼야 맞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감정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 사소한 감정때문에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도 분명 있는 것 아닐까? 수십년 전 친구를 배신하고 스스로 비겁하다 생각하며 살아온 첸(임달화)에게 "당신 비겁하지 않았다."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위로였고, 평생 도둑질을 하며 번 돈을 딸과 사위에게 쏟아부었지만 남는 감정이라곤 '외로움'밖에 없었던 씹던껌(김해숙)에게 "내일 아침엔 내곁에 있어요."라고 말하는 이는 의미인 것이었다. 이런 사소한 감정을 욕망하고, 이런 사소한 감정에 흔들리는 이들이 우리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홍콩에서 4년만에 처음 만난 팹시(김혜수)와 마카오박(김윤석)의 눈빛에서, "복희야 사랑해."라고 외치며 결국 체포되는 잠파노(김수현)에게서, 앰뷸런스 안에서 '태양의 눈물'을 손에 쥐고 "아 근데 내 기분은 왜 이러냐?"라고 말하던 예니콜(전지현)에게서 쿨하지못해 미안한 한쿡적 사소한 감정이 오롯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이것이 <도둑들>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정한석 기자는 '<도둑들>은 금고가 있는 방에는 들어갔으나 정작 금고를 여는 데는 실패한 금고털이범 같다. 금고 안에 어떤 보석이 들어 있는 줄은 아는데 그걸 갖지는 못했으므로 그러하다.'라고 쓰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는 분명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성격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의 표현일 것이다. 거기에 대해 난 또 물어본다. "그래도 한쿡 오락영화로서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전 최동훈 감독에게 말하려고요. <도둑들>은 한쿡 1급 오락영화에요." 더위로 지치는 목요일 오후 '한쿡 1급 오락영화' 한 편 잘 봤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경향신문(20120730)에 <도둑들> 글을 썼다.

[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최동훈 감독표 종합선물 ‘도둑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7292117285&code=990100

 

+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난 전지현이 반가웠고 오바스럽긴했지만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 장면이 만족스러웠다. 김윤석의 눈은 상당히 섹쉬했고, 김해숙씨는 멋진 배우이다. 임달화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도 좋았다.

 

+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하고 이런 방식으로 글을 써도 되는 걸까?'라고 잠시 생각한다. 아, 나 정한석 기자 글 좋아하는데. ;

 

+ 무더위가 계속 되고 있다. 밤엔 자다가 더워서 지치고, 아침 출근길에 한 번 더 지치고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몸이 녹아내려 일할 기운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름에 왜 휴가를 떠나는지 알  것같다. 그리고 매해 다가오는 이 더위는 겪어도 겪어도 익숙하지 않다. 어제부터 사무실의 k활동가는 단축근무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끊임없이 했고 오늘도 그 말이 나왔다. 그래서 감행했다. 점심식사 시간 멍군에게 "오늘 3시까지만 근무하는 것 어때요?"라고 물었고 멍군은 쿨하게 "오케이!"를 했다. 바로 영화 시간표를 알아보았고, <도둑들>을 보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그 시간이 3시 40분. 단축근무를 쿨하게 제안한 k활동가는 내일까지 마무리해야하는 작업이 있어 사무실에 있었고, 나를 포함한 5명의 활동가들이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기분이 묘했다. 이래도 될까? 사무실에 남아있는 활동가들이 괜시리 생각나고 수업시간 땡땡이 치고 나온 학생이 겪을법한 불온한 불안감이 머물렀다. -_-; 그치만 그 생각은 금방 잊기로 했다. 여튼 단축근무는 기분 좋고, 극장 가는 길은 설렌다. 여름 더위가 쓸만하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 합정동 L시네마가 지난주 목요일에 오픈했다. 사무실을 기점으로 근거리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또 하나 생긴 것이다. 오늘 그곳에서 <도둑들>을 봤다. 몸의 반응이 민감한 사람들은 한동안 합정동 L시네마를 멀리해야하지 않을까? 새건물 냄새가 상당했고, 공기의 시큼함은 눈을 따갑게 맹글었다. ㅠ 

2012. 7. 22. 22:47

1.

일요일이 간다. 7시에 알람을 맞춰두었다. 짧은 일요일을 길게 느끼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다. 그 시간에 일어나니 소나기가 한바탕 시원하게 내린다. 비가 내리는 장면을 보고 싶어서 거실 커튼을 걷고 누웠다. 창밖이 잘 내다보인다. 빗방울이 창문에도 튄다. 그렇게 미친듯이 내리던 비는 아주 잠깐이었다. 그리고 해가 반짝 나왔다. 아침에 시원하게 퍼붓고 종일 흐렸다 개었다 반복한다. 8월이 가까워지니 여름이 본격적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여름이 깊어지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 이미지가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습하고 더운, 덥다 못해 뜨거운 이미지. 그 이미지에 훗-하고 냉소를 날린다. 냉소에 잠깐 그 이미지가 언듯했지만 그 이미지를 이겨내지는 못한다. (20120721)

 

 

 

 

2.

여름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가는 7월의 말미,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다크나이트>보다 웅장했지만 <다크나이트>보다 우아하지 않았고, 베인은 조커와 비교할 수 없었고, 브루스웨인은 <아마겟돈>의 브루스윌리스 코스프레를 하여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더이상 영화를 만들진 않겠지만 언젠가 여름엔 조셉고든 레빗때문에 개봉 당일 베트맨시리즈를 예매하고 극장을 찾을 거라는 기대감에 두근거렸다. 라스알굴의 등장은 <베트맨비긴즈> 때도 그러하였고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다크나이트라이즈>는 확실히 <베트맨 비긴즈>의 자식이었고, <다트나이트>는 돌연변이와 같은 존재이기에 우아했다. <베트맨비긴즈>에서부터 <다크나이트> <다크나이트라이즈>까지 등장하는 킬리언 머피는 아주 짧게 등장하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화 상영 후 극장 옆 편의점에서 동그랗게 둘러앉아 길맥을 하며 영화 이야기로 끊임없이 채워졌던 그 시간이 기분좋았다. 이야기 중 웨인이 마치 예수같이 느껴졌다는 친구의 말이 재미있었다. 종교와 엮어 베트맨 이야기를 풀 수 있을 것같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남자캐릭터는 아주 잘 만들지만 여자 캐릭터는 그렇지 못하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던 또다른 친구의 말도 공감이 갔다. 여튼 개봉당일 아이맥스로 <다크나이트라이즈>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본 것이 만족스러웠다. 헌데 다음날 미국의 뉴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영화적 환상의 경계가 무너져 현실 세계로 도입되었을 때의 무감각함이 무섭다. (20120719)

 

 

 

 

3.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포켓머니>를 봤다. 내 옆옆옆자리에 어떤 할아버지가 앉았다. 할아버지는 영화를 조금 지루해했고, 큰 소리로 웃었고, 틈틈이 크게 헛기침을 했고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갔다. 할아버지에게 <포켓머니>는 어떤 영화였을까? <포켓머니>는 '프랑수아 트뤼포에 대한 나의 딴지를 해제해볼까?'라는 생각이 들게한 영화였다. <포켓머니>를 보고 있으면 아이들에 대한 트뤼포의 잔잔한 애정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일요일은 아이들은 심심해."라고 반복되는 샤를르 트르네의 샹송과 함께 오버랩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확성기를 켜고 창밖으로 "배고파."라고 외치던 실비, 실비에게 먹을 것을 바구니에 담아 도르레로 음식을 전하던 형제 장면을 보며 절로 미소가 나왔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면 고요한 집이 심심하게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심심했지만 나만의 것같아 좋았다.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비적 부비적 눈을 비비며 혼자 만화영화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영화 마지막 아이들을 모아놓고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산다는 것 힘들지만 아름다운 것이며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트뤼포가 아이들에게,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고픈 말인듯했다. (20120721)

 

 

 

 

4.

보고싶었던 영화 <쥴 앤 짐>을 봤다.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내용이었고 마지막 까트린의 행위는 예상이 가능한 행위였기에,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기에 나를 더 놀라게 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중요한 화두는 중 하나는 '비극'인 듯 하다. (20120722)

 

 

 

 

5.

컴퓨터를 켜니 포털사이트 뉴스에 이 사진이 메인 사진으로 떴다. '뭘까? 예쁘다.' 싶어 클릭을 했더니 쌍차 동지들이 평택공장 앞에서 촛불문화제를 진행했다는 기사였다. 평택공장에서 어제 집회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인지만하고 행동하지 않는 시간이 너무 오래 진행되고 있다. 난 뭔가 싶다. 잘 살고 있는 건가 싶다. 마음으로 공감하고, 마음으로 염원하고, 마음으로 함께하며 그 마음을 기반으로 실천하며 살아가야하는데 마음도 실천도 실종되어버린 것 같다. 허망한 말만 뱉으며 살고 싶지는 않다..."정신차리게. 여보게. 말뿐인 하루를 보내지 말게나. 제발." (20120722)

2012. 7. 15. 23:29

 

 

비오는 일요일 아침이다. 어제 오늘 비가 내려 좋다. 어제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두명의 영국여인과 유럽 대륙>을 보았다. 트뤼포의 전작 회고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쥴 앤 짐>과 <두명의 영국여인과 유럽 대륙> 이 두편은 꼭 보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쥴 앤 짐>은 보지못했지만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두명의 영국여인과 유럽 대륙>에 대한 검색을 하다보니 내가 챙겨보려고 했던 두 편의 영화가 모두 앙리 피에르 로셰라는 사람의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재미있다.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한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 앙리 피에로 로셰라는 사람이 궁금해져 네이놈에서 검색을 해보니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이것 저것 검색을 하다가 이것저것을 접하게 된다. 문득 프랑스 말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프랑스문화원도 검색을 해봤다. 중급반부터 운영하고 있는데 테스트를 거친 이후에 통과가 되어야지만 접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난 안돼겠네. 좌절. 하지만 언젠가는 프랑스말을 공부해보겠다는 마음은 버리지 말아야겠다. 그러다 프랑스문화원 주최 시네마테크 시네프랑스에서 아네스바르다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시간을 만들어서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를 보러가야 겠다. 

 

여튼 처음으로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봤다. 트뤼포를 잘 모르기에 그저 내가 보고 느낀대로 기록을 하면 그는 순정한 어린 '남자'애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릿속에 있는 여인에 대한 환상을 접하면서 '정말 그러한 여인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져보고, 영화이기에 존재할 수 있다고 답해보지만 그 환상에 대한 동의가 어려웠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트뤼포의 최고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내게 질문을 해보게 된다. 앞뒤 따지지 않고 그저 누군가를 순수하게 애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앞뒤 따지지 않고 그저 누군가를 순수하게 애정하며 맑디 맑게 '자신을' 드러내는 뮤리엘에게 마음이 갔다. 부모들의 결정으로 함께 할 수 없게 된 뮤리엘과 클로드, 그들 각각의 여름 장면 중 뮤리엘을 묘사한 장면을 보면서 아팠다. 그 장면을 쉬이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된 당시의 연기가 낯설긴했지만 뮤리엘의 감정결이 느껴졌다. 

 

두번째로 좋았던 장면은 일주일간 어느 한적한 섬(?)으로 여행을 떠났던 클로드와 안나의 장면이었다. 배 위에 카메라를 싣고 카메라는 뭍가의 안나를 따라간다. 사다리를 들고 클로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안나, 안나의 발걸음과 안나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속도가 같았다. 카메라가 안나를 따라가고 내가 카메라의 속도를 천천히 따라가다보면 카메라 속에 담긴 바람결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갈대가 흔들리는, 물결이 일렁이는 풍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계산된 속도이었겠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흔들리는 자연을 오롯이 담아내면서 동시에 그 안에 클로드와 안나를 담아내는 장면이 너무 아름다웠다.

 

트뤼포를 생각하다보면 '만약에 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트뤼포는 남자사람이었기에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라는 것, '남자라는 전제가 있었기에 그는 영화에 대한 순정을 그렇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 이 영화에 대해 '이렇다.'라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다시 한 번 더 영화를 보고, 생각을 거듭한 후에 난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헌데 나는 트뤼포를 막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

 

+ 영화를 보고 나오니 극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프랑스 영화를 봤고, 극장엔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아트시네마 화단에는 빨간 나리꽃이 피어 있었다. 2006년에도 아트시네마의 나리꽃을 보고 위로를 얻었는데 2012년에도 나리꽃을 보고 위로를 얻는다. 옥상에서 비내리는 인사동을 잠시 내려다 보았다.

2012. 7. 9. 01:13

1.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봤다. 2시 40분 영화를 보기 위해 2시에 극장에 도착했다. 매진이다. 예매를 하지 않은 나의 안일함에 화가 났다. 6시 35분 표를 예매하고 열기가 가득한 서울의 한복판을 다시 반복해서 걷는다. 종로에서 시네큐브까지 다시 시네큐브에서 종로까지. 오랜만에 들른 서점에서 아드리안느 리치의 책을 사려고 검색을 했다. 재고가 없다고 한다. 텅빈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당황한다. 침대위에 두고 온 <위대한 개츠비>가 생각난다. 서점에서 다 읽지 못한 부분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까 잠시 생각하지만 내 소유의 책이 아닌 것은 어쩐지 읽을 맛이 나지 않아 그만둔다. 그러다가 얼마전 씨네21에서 읽은 은희경씨 인터뷰 글이 생각나서 그녀의 소설 <태연한 인생>을 샀다. 대형서점 한켠의 계단식 의자에 앉아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푸드코트의 짜장면 냄새가 집중을 방해한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소리도 신경쓰인다. 다시 종로에서 시네큐브까지 한여름 도심을 걷는다. 경희궁의 나무그늘 벤치에 앉아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공원의 노숙인들과 벤치 위를 종횡무진하는 개미들이 신경쓰이긴 하지만 책읽기에 나쁘지 않은 공간이다. 소설이야기는 잠시 뒤로 하고, 우디할배의 영화이야기를 간략하게 해본다. 영화시작 우디할배는 재즈음악과 함께 파리 곳곳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오는 날의 파리 풍경도 넉넉히 보여준다. 시작이 좋았다. 파리에 대한 우디 할배의 애정이 느껴졌다. 우디할배의 애정이 담긴 파리 풍경을 뒤로 하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주인공 질은 12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나타난 구형 푸조를 타고 1920년 대 과거로 찾아가 당시의 작가와 예술가들을 만나 흥분하고,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재미있는 상상력의 결합과 곳곳에 배치된 유머로 무난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영화의 막바지 질과 아드리아나의 대화는 상당히 교훈(?)적인 대화라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 내가 다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재미있는 상상력에 뻔하디 뻔한 교훈을 덧한 우디할배에게 나는 속으로 말했다. "할배 촘 실망했어요."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타임슬립이라는 구조도 그리 기발하진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그저 영화의 시작-파리의 풍경과 특히 비오는 풍경-과 영화의 마지막- 내리는 비에 옷이 젖을까 개의치 않고 비가 내리는 파리 밤거리를 걷는 남녀의 모습-이 좋았다. 영화의 시작과 끝만 붙여놓은 그 이야기만으로도 <미드나잇 인 파리>는 충분히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2.

다시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으로 돌아와본다. 소설의 주 구조는 류와 요셉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요셉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 더 많이 등장한다. 그에 비해 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적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더욱 강렬한 인물은 류이다. 언젠가 은희경씨가 류의 이야기만으로 소설을 채워넣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고 고독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주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고 생각하게 된다.

 

 

3.

좌석 등받이와 함께 류의 몸이 뒤로 비슴듬히 졎혀졌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류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요셉을 바라보았다. 감고 있던 눈을 뜨면서 요셉이 류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다정한 웃음은 류를 슬프게 만들었다. 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소실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류는 그들에게 주어진 매혹과 열정의 시간이 끝나버리는 날 자신이 혼자 비행기에 실려 돌아오리라는 걸 예감했다. 요셉과 다른 점은 그것이었다. 둘 다 뜨거웠지만 류는 요셉과 달리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 매혹이 사라진 이후의 사랑은 어머니 처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틀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류는 자기만의 부역보다는 상실을 택했다. 고통보다는 고독을 택한 것이다. 그것을 요셉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조의를 표하듯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았던 팔을 요셉에게로 뻗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는 류의 표정에는 슬픔과 갈망이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그 여름 S시를 혼자 떠나 올 때 류는 울었지만 요셉과의 관계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놓고 되돌아와버린 것에 대해 후회하진 않았다.

 

...

 

어머니는 비행기처럼 기류를 따라 자유롭게 흘러가라는 뜻으로 류의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페라 속 비극적인 여인의 이름을 따서 류에게 붙였다. 그 오페라에서 노래 부르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류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류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었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중

 

 

4.

그 외로움이라는 것은 내가 감당해햐하는 내 삶에 할당된 몫이었다. 그것이 내게 할당된 고독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어슴푸레 느낀다. 하지만 난 내 몫의 고독에 대해 왜 네가 채워주지못하냐며, 왜 넌 나를 외롭게 만드냐며 내가 감당해야할 고독의 날카로운 칼끝을 너를 향해 찔렀고 그것으로 너를 아프게 했다. 나는 나약했고 너는 비겁했다. 가끔 그 밤이 종종 생각난다.

(20120708)

 

 

5.

P랑 어느 낯선 소도시에 갔다. P는 그 낯선 소도시에서 2주일 동안 촬영을 한다고 했다. P의 일을 돕겠다며 나는 P와 함께 동행했다. P를 쫓아가면서 나는 그 소도시에 Q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간것이었다. 아마 Q가 그곳에 없었다면 나는 그곳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P의 촬영지는 낯선 소도시의 오래된 피아노학원이었다. 피아노학원의 원장은 학원 한켠에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Q는 그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우연을 가장하여 Q를 만나고 싶었다. 촬영을 끝내고 P와 피아노 학원 한 켠의 카페를 방문했다. 역시 예상했던대로 Q가 있다.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웃는 모습도 그대로였다. Q의 모습을 보고, 웃는 그 낯을 보고 있으니 마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듯하였다. 하지만 현실의 인지는 언제나 찰나와 함께 온다. '딸랑딸랑' 카페문에 매달린 방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작은 키와 작은 몸, 하얀 피부에 단아한 얼굴을 한 여자가 카페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는 카페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Q의 얼굴을 보고 환희 웃는다. 나는 단박에 Q와 그녀는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Q가 날보고 웃는 것과 그녈보고 웃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장면을 나는 무덤덤하게 바라본다. 가볍지않은데 가벼운 마음, 그래 허망한 마음이라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나는 P에게 조용히 말했다. "가자-" 카페에서 나선 낯선 소도시의 밤은 초록의 여운으로 서글프게 아름답다. P가 곁에 있다는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P에게 말했다. "우리 맥주 한 잔 할래?" 하지만 P는 아직 촬영분이 더 남았다며 나의 제안을 간결하게 거절하고 카메라를 등에 얹고 등을 보인다. 낯선 소도시의 여름밤, 난 어디로 가야하지? 그저 초록의 키가 큰 가로수만을 올려다 본다. 낯선 소도시의 여름밤 홀로 길을 걷는다. 그리고 내게 속삭인다. '괜찮다. 괜찮아.' 나는 슬퍼하지않는다. 나는 울지않는다. 덤덤히 받아들인다. 어쩔수없는 현실이니까. 그 밤 어둠, 초록의 여운이 아름답다고 그저 생각할 뿐이다.

 

(20120706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꿈)

2012. 7. 4. 00:44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보기 위해 지난 일요일에는 집에서 하루 종일 소설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13살때 소설 <폭풍의 언덕> 존재를 알았다. 나의 단짝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폭풍의 언덕>을 꺼내 놓고 읽었다. 친구가 좋아했던 책이기에 나도 함께 읽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폭풍의 언덕>에 줄곧 빠져 있었다. 다 읽고 덮은 책장을 몇번이고 다시 펼쳐 읽고 또 읽었다. 나의 십대를 흔들었던 소설, 그 여운은 이십대까지 이어졌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 EBS에서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폭풍의 언덕>을 상영했고, 텔레비전에 앞에 앉아 숨죽여 그 영화를 봤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비디오가게에서 <폭풍의 언덕>이라는 타이틀의 영화를 꼭 찾아보곤 했다. 서점에서 <폭풍의 언덕> 원서를 구입하기도 했으며(절대 읽을 수 없었지만), <제인에어>도 함께 읽으며 괴이한 브론테 자매들을 흠모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내 청춘의 시간 속에 오롯이 존재했던 <폭풍의 언덕>, 늦은 밤 책장을 덮고 잠시 생각했다. 내 생에 있어 <폭풍의 언덕>을 13살 때 만나 다행이라고. 서른을 넘긴 시간 다시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몇몇 장면에서 찔끔- 눈물을 흘리긴했지만 그것은 당시의 그 감정이 아니었다. "그 피라미 같은 에드거가 온 힘을 다해서 80년을 사랑한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하루만큼도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을거야." "내가 살아가는 큰 보람은 바로 히스클리프야. 모든 것이 다 죽어도 그만 살아남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있어."라고 말하던 히스클리프와 캐시는 가슴을 부여잡고 절절히 슬퍼했던 그때의 히스클리프와 캐시가 아니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한치의 쉼도 없이, 한치의 우회도 없이 극에서 극으로 치달으며 비극의 연속을 만들어 갔던 에밀리 브론테, 그녀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에필로그 격의 후대의 캐시와 헤어튼의 이야기 그리고 유령으로 등장하는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이야기는 글을 쓰느라 지친 그녀가 스스로에게 전하는 위안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에밀리 브론테 그녀가 독자들에게 "히스클리프와 함께 오는 동안 힘들었지. 이제 쉬게 해줄게. 하지만 잊지는 마. 가학적일 수 밖에 없었던 그 깊고 슬픈 사랑을..."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여전한듯하지만 여전하지 않았던 소설 <폭풍의 언덕>을 보고 오늘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보았다. 폭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오늘은 <폭풍의 언덕>을 보기에 제격인 날씨였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극장에 불이 켜졌다.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휘청하였다. 진이 빠졌다. 저녁을 먹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휘청'의 90%는 영화때문이었다. 다행이었다. 활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한 영화는 공간이 전하는 정서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공간에 감정을 담아 관객에게 말을 건내고 있었다. 작은 극장에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이들은 아마도 그 혹은 그녀가 소년이고 소녀이던 시절, 소설 <폭풍의 언덕>을 가슴에서 놓지 못했던 이들일 것이다. 바람만 세차게 부는 언덕과 어두워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간이 반복해서 나올뿐인데도 바람이 부는 여백과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은 활자의 결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사람들을 그것을 느꼈고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소년과 소녀가 되어 영화를 읽고 있었다.

 

+ 영화가 좋았다. 헌데 영화 제목과 엔딩 크레딧의 폰트가 상당히 유치했다. 왜 그러한 폰트를 썼을까? 활자를 읽는다는 것과 활자를 본다는 것에 대한 간극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 바람소리, 새소리로만 채워져있던 영화는 마지막에 음악을 집어 넣는다. 영화 <원스>의 배경음악을 연상시켰다. 솔직히 음악이 튄다. 감독은 왜 막판에 굳이 음악을 집어 넣었던 것일까? 음악이 끝나고 엔딩크레딧 장면에서는 다시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화면을 채운다. 왜 그랬을까? 마지막에 감독은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건 소설이 아니에요. 영화에요. 관객 여러분-"

 

+ 3주째 모모에서 영화를 봤다. <멜랑콜리아> <두번의 결혼식 한번의 장례식> <폭풍의 언덕> 선택한 영화도 좋았고, 극장도 북적이지 않고, 거리도 가깝고, 폭 빠져들어갈 것 같은 지하 객석도 마음에 든다.  헌데 모모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영화 시작 후 관객이 늦게 들어오면 영화 속 주인공과 관객들의 시커먼 머리통 그림자를 동시에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싫다.ㅠ 영화 시작하면 모모는 관객 입장을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쉽게쓰여진 詩]

 

폭풍의 언덕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폭풍의 언덕에 존재하는 것은 바람과 너뿐이다

바람도 차마 채우지 못하는 그 빈 공간에 네가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2012. 6. 9. 02:27

 

 

산다는 것이 참 찌글스럽다. 오늘 하루는 진창같은 하루였다. 자책도 하고, 울기도 하고, 정신차려야 겠다, 다짐도 하고 여튼 롤러코스터를 몇 번이나 오르고 내리고 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가는 길 적절히 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서 좋았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 한참 서서 멍하니 비내리는 장면을 봤다.

 

한참 비나리는 장면을 보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 좌석에 앉는다. 영화 시작 전 10여분을 앞둔 시간. 나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그 순간이 좋다. 어떤 장면들이 내 앞에서 펼쳐질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늘 설렌다.

 

영화 엔딩이 끝나는 순간, '역시 홍상수다.'라고 생각을 했다. 홍상수 감독의 초기작은 본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이다. <밤과 낮>,  <잘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를 봤다. 오늘 본 <다른 나라에서>를 제외하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섰던 기억은 있는데 솔직히 영화의 장면들과 이야기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감정들을 일괄적으로 표현하자면 좋았다는 것. 별로인 영화들도 있었던 같긴 하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홍상수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하하하>를 보고 시를 쓰기 시작했고, <옥희의 영화>를 보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대가 컸다. 나의 저질스러운 기억력때문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다른 나라에서>"라고 무식하게 답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아름답다.'라고 연신감탄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왜 아름다운 영화인가?

<다른 나라에서>는 크게 세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등장한다. 세개의 에피소드 중 첫번째 에피소드가 끝나는 순간 영화가 너무나 아름답고 슬퍼서 혼이 났다.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안느와 안전요원은 등대가 어디에 있는지 서로 물으며 대화를 나누게 되고, 안전요원의 텐트 안에서 또 대화를 나눈다. 안전요원은 뷰티풀네임을 가진 안느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 안느는 안전요원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안전요원은 그 편지를 읽지 못한다. 그 장면이 어찌나 슬프고 아름다운지. 홍상수 감독은 첫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불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안전요원은 안느에게 뷰티풀이라고 말하지만 뷰티풀의 b를 p로 잘못보고 그 언어를 읽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 이후의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안느와 안전요원은 거기에서 그냥 끝을 맺는다. 그 장면을 보면서 동일한 언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행간에 함축된 의미를 읽지 못해, 혹은 같은 단어와 문장을 보고 들어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서 겪게 되는 불통의 비극을 우리는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홍상수 감독은 그 불통의 비극을 너무나도 위트있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비극은 극대화되었다.

 

꿈과 상상, 현실의 변주_그 무경계함을 말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인지 꿈인지를 모르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이것이 영화 속 주인공의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시간이 있었다. 영화평론가 남다은씨는 홍상수 감독에게 '꿈'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현실이라는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이 매력적이다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그는 답했다. 그 말에 '아, 그래서 홍감독 영화를 만드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본다.'라고 생각했다. 진창같았던 하루 <다른 나라에서>를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권해효씨를 보며, 유준상의 "아윌프로텍트유"를 들으며 극장에서 내내 큭큭 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영화의 엔딩이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지면서 찌글스러웠던 오늘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강박을 벗어나는 순간 중 하나로 술을 마시고 취했을 때도 언급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영화엔 술을 마시고 취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두번째 에피소드의 문성근씨 또한 그랬다. 그는 만취하여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귀엽게 질투를 했다. 문의 연기는 징그러울 정도로 리얼해서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문이 무서웠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그의 행보와 무관하게 연기하는 순간 스스로를 자유롭게 던져버리고 있었다. 대단하다.

 

요즘엔 꿈을 상당히 많이 꾼다. 꿈 속에선 다양한 이들이 등장하고 내게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나의 꿈 이야기를 스승님에게 말했더니 스승님은 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모두 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승님도 하루는 꿈 속에 5명의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5명의 사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꿈 속의 각기 다른 등장인물이 결국엔 다 자기였던 것같다라고 했다. 현실과 꿈은 경계를 가지고 있는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경계가 없는 것이다. 현실을 경험하는 이도 나인 것이고, 꿈을 꾸는 주체도 나이기때문에 현실과 꿈을 경험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꿈이든 현실이든 하나의 경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이것이 현실이다, 혹은 꿈이다라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이러한 무경계함을 진작에 알고 있었고 그는 꿈과 현실의 무경계함을 적극적으로 다양한 변주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었다. 두번째 에피소드가 특히 현실과 꿈의 무경계함을 열심히 표현하고 있었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과 꿈의 무경계함을 말하는 동시에 생의 다양한 변주를 그의 영화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사실에 근거하여 존재한다기 보다는 믿고 싶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 인상 깊었던 것 등 제각각 주관적 기억력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인간들이 비슷한 어쩌면 동일한 경험들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렇기에 첫번째 에피소드 해변가의 소주병은 한국사람이 버린 것있을 수도 있고, 안느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안느가 쟁여두었던 우산은 어쩌면 세번째 에피소드의 안느가 숨겨 둔 것일 수도 있고. 모항의 좋은 풍경을 안내해주겠다던 첫번째부터 세번째 에피소드의 원주는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고.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세번째 에피소드까지 모항해변에서 수영을 하던 안전요원의 시간은 분절된 시간일 수도 있고 연속된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별개의 시간이면서도 뭉개진 시간일 수 있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세번째 에피소드 모두가  한사람의 경험일 수도 있고 수많은 인간군상의 동시다발적 경험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철학을 논하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첫번째 두번째 에피소드에 비해 상당히 튄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올 김용옥이 등장하는 것도 낯설었고, 안느와 스님(김용옥), 박숙(윤여정)의 대화장면도 뜬금없었다. 하지만 그 장면은 달리 표현하면 명쾌하고 시원했다. 살아가면서 생각없이(?) 마구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우리는, 누군가가 뜬금없어한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제대로 묻지 못하며 살아간다. 묻는이도 그러하지만 답하는 이도 그러하다. 나의 답변에 대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이렇게 답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강박에 갇혀 침묵하는 경우도 왕왕한 것이다. 하지만 안느와 스님은 그런 강박에 벗어나 묻고 싶은 것을 묻고 답하고 싶은대로 답한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옳고 그런지를 떠나 그 과정속에서 제 나름의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의 영화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었다.

 

나도 홍상수 감독에게 강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질문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하고 싶었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묻지않고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하고픈대로 행하였다. 그 행함이 나를 더욱 자유롭게 만든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책임'에 관한 안느, 금희(문소리), 종수(권해효)의 대화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감독의 하고픈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감독은 말하지 않는다. 그 대화를 보고 듣는 관객이 그저 판단할 뿐. 홍상수 감독은 그의 영화를 통해 관객 각자가 각자의 진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제시하고 있었다.

 

결론은 좋은 영화를 보고 진창같은 현실을 어느 정도 위로할 수 있었고, 이번 영화를 보고 장면없는 영화 시나리오를 하나 생각했고-제목은 <관객과의 대화>-홍상수 감독을 더욱 애정하게 되었고, 그와 친해지고 싶다 생각하며 그와 술 한 잔 걸치는 날을 상상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나는 모항에 갈 것이다.

 

+ 홍상수 감독은 GV를 시작하면서 관객들에게 한가지 당부를 했다. 본인은 영화를 본 후 영화에 대해 그저 느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를 그는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굳이 질문을 짜내어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고 영화를 본 느낌을 말해주면 좋겠다고 관객들에게 부탁했다. 직관과 느낌으로 생을 살아가는 홍상수 감독의 면모를 그 짧은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직관과 느낌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다. 부럽다.

2012. 5. 28. 21:35

 

 

Tyrannosaur, 2011 디어 한나
감독 : 패디 콘시딘
피터뮬란, 올리비아 콜맨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고, 그 장면에 음악을  덧입힌 그 연출이 좋았다. 영화 속 인물을 위로하는 듯하여. 조셉에겐 한나가 한나에겐 조셉이 생을 살아가면서 오롯이 그 존재를 직시하고, 의지할 수  있는 서로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영화의 원제는 <Tyrannosaur>이다. 왜일까? (20120505)

 

 

 

 

A Dangerous Method, 2011 데인저러스 메소드
감독 : 데이빗 크로넨버그
키이나 나이틀리, 비고 모텐슨, 마이클 패스벤더

 

감독님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거나, 아니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몰랐거나. 키이나 나이틀리의 턱이 빠지는 줄 알았다. 영화를 본 후 칼 융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카를 융 기억 꿈 사상>(김영사) 진도가 영 안나간다. 칼의 3-4살적 꿈에만 머물고 있다. (20120512)

 

 

 

 

The Future, 2011 미래는 고양이처럼
감독 : 미란다 줄라이
미란다 줄라이, 해미쉬 링클레이터

 

<미래는 고양이처럼>은 슬픈 영화이다. 소피보다는 제이슨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영화를 봤다. 다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면 달리 보이겠지. 달이 뜬 밤, 소피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시간을 멈추게 하는 제이슨. 시간은 멈추었으나 또 한 축으로 소피의 시간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듯하다. 그때의 제이슨이 슬프고 애처로웠다. 이 영화는 다시 봐야 할듯하다. 개인적 감정에 너무 치우치다보니 보지못하고 놓친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20120519)

 

 

 

 

A WOMAN UNDER THE INFLUENCE, 1974 영향 아래의 여자
감독 : 존카사베츠
지나 롤랜즈, 피터포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존카사베츠 감독 회고전을 했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존카사베츠에 대한 애정을 트윗에 끊임없이 늘어놓곤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과거 존카사베츠 감독의 <사랑의 행로>를 본 적이 있었다. 저급한 기억력으로 영화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상당히 강렬했던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본 <영향 아래의 여자>를 보고 멍해졌다. 묘했고, 슬펐고, 화났고, 짜증났고, 씁쓸했고 이런게 사는건가 싶고. 극장을 나오는데 울고 싶어졌다. 지나 롤랜즈라는 배우는 미친 배우인것같다. 문소리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지나 롤랜즈를 자신의 교과서로 삼고싶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20120520)

 

 

 

 

키사라기 미키짱

연출 : 이해제

출연 : 김한, 이인호, 권재원, 정상훈, 최재섭

 

연극은 주로 초대권을 얻어서 보곤 했는데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연극을 봤다. 대학로에 <정상가족관람불가전>을 보고 대학로 나온 김에 연극 한 편 보자고, 4인이 보면 할인해준다는 연극이 있다고 하여 연극 마니아 지인의 추천으로 <키사라기 미키짱>을 봤다. 연극을 보기 전 소극장도 영화관처럼 공연 전에 광고를 한다는 사실에 놀랬다. <키사라기 미키짱>을 한 마디로 평하자면 "음-이 연극은 지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연극이였어. 내 취향은 아니여."였다. 1년 전 자살한 아이돌 키라사기 미키짱을 추모하며 모인 5인의 오타쿠 삼촌들. 이들은 미키짱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고 말하며 미키짱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밝혀 나간다. 이 연극의 미덕은 5명의 등장인물이 어느 누구도 도구화되지 않고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5명의 이야기를 다 하려고 하니 극은 지루했고, 배우들의 연기가 안타까웠다. 연극인에게 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번 연극을 보며 다시 한 번 느꼈다. (20120526)

 

 

The catcher in the rye, 1951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나디아의 추천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홀든 코울필드를 지금의 내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과거의 내가 만났더라면 좋았을까? 시간이 지난 뒤의 내가 다시 홀든 코울필드를 만나면 다르게 그를 인지하겠지. 지금 현재 나는 '그대가 바라보는 세상의 사람들이 시시하고 모두가 적과 같이 느껴진다면 나는 홀든 코울필드 그대 또한 그러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주인공 홀든이 학교를 떠나 학교도 집도 아닌 뉴욕에서의 몇시간(?)을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해 나간 것은 문자로 형성된 소설이라기보다는 영화적 표현이 느껴지는 소설같았다. 영화 <파수꾼>은 <호밀밭의 파수꾼>에 영향을 받아 제목을 그리 만든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20120528)

2012. 3. 26. 21:44
*
소년이 살았어요.
네.
소년의 이름은 무재.
무재씨.
네.
그건 무재 씨의 이야기인가요?
무재의 이야기라니까요. 계속할까요?
네.
소년 무재가 살았습니다. 무재의 식구들은 그림 한 점 없는 커다란 방에서 살았습니다. 식구는 아홉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고 누나가 여섯이었습니다.
여섯이나 되나요?
무재가 일곱 번째로 막내입니다.
많군요.
많은가요.
왜 그렇게 많을까요.
그건 말이죠. 하고 무재 씨가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말했다.
그게 좋았던 것 아닐까요?
그거요?
섹스.
나는 얼굴을 조금 붉힌 채로 무재 씨를 따라서 걸었다. 은교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야한가요.
하나도 야하지 않은데요.
야하지 않을까요.
야해도 좋아요.
야한게 좋나요.
야해도 좋다고요.
라고 긴장해서 말하자 무재 씨가 후후. 하고 웃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무재의 부모는 일곱 명의 자식을 낳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다.
개연이요?
필연이라고 해도 좋고요.
빚을 지는 것이 어째서 필연이 되나요?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글쎄요. 하고 무재 씨가 나무뿌리를 잡고 비탈을 내려가느라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腹)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공산품이 나쁜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렇군요.
어쨌든 소년 무재의 부모가 빚을 집니다.
네.
이 경우엔 다른 사람의 종이에 이름을 적어 준 대가로 얻은 빚입니다. 빚의 규모가 너무 커서 빚보다는 빚의 이자를 갚느라고 힘든 노동을 하는 와중에 아홉 식구의 생활비도 버는 생활을 하다가 소년 무재의 아버지의 그림자가 끝끝내 일어서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 황정은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중

+ 황정은씨의 소설 <百의 그림자>를 읽다보면 긴 산문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귀한 소설. 소설을 읽던 중 이 구절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빚' 빚지며 사는 인생, 그래서 야해할 도리를 하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내 곁을 맴돈다.
2012. 3. 16. 01:03


누군가의 삶을 알아간다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한다는 것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을 알고 그 삶에 개입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두려운 일 수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는 요즘이다. 영화 <화차>를 봤다.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는데 온 몸의 기운이 쏘옥 빠졌다. 그리고 누군가를 붙잡고 펑펑 울고 싶었다. 영화 속 주인공에게 상당히 감정이입을 했다. 터미널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15살의 차경선에서부터...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그녀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공포를 잊기 위해 스스로를 더욱 공포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갔던 경선이 슬펐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이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 무서웠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을 나오는데 날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겨울 외투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 김민희라는 배우가 아니었더라면 그 누구도 경선을 세상에 만들어 놓지 못했을 것이다. 경선이 되어 말하고 행하는 동안 그녀는 얼마나 애썼을까.
+ 반면 이선균은 영화의 흐름을 계속해서 툭툭 끊어놓고 있었다.

2012. 1. 30. 22:01

오랜만의 블로깅이다. 긴 시간동안 방치해두었던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을 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일정정도 여유가 머물고 있다는 의미이겠지. 쓰고 싶은 글들이 참 많았다. 선운사에 다녀온 이야기도 고래씨에게 하고 싶었고, 매일 밤 꿈속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도 싶었고, 우리 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것들도 이 공간에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들의 지나간 생각들을 끄적거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폭풍같이 바쁜 시간을 이제 뒤로하고 다시 한 번 시작, 을 말하려고 한다. 2012년 모토는 '계획없이 사는 것'인데 그래도 살아가면서 '다짐'의 순간이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든다. 뭔가를 '다짐'해야지 그래도 움직이게 되는 것 같다.

#1.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지난 1월 13일에는 반올림 연대주점에 다녀왔었다. 오랜만에 가는 연대주점이었다. 투쟁가가 들려오고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은 투쟁가에 맞춰 팔뚝질을 하고, 서로 동지라고 호명하며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을 쓴 희정씨를 만났다. 오랜만에 바다도 만나고 유나도 만났다. 그리고 낭미를 통해서 삶이 보이는 창 편집자님도 알게되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하다 백혈병 등 각종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난이들의 가족과 삼성반도체, 삼성전자, 삼성LCD 공장 등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 삼성이라는 괴물 같은 일터에서 얻은 병을 직업병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소중한 사람들의 시공간이 '반올림' 그곳이었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고 알았던 반올림 동지들의 목소리를 희정씨의 책을 통해서 알게되었다. 연대주점에서는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희정씨의 책을 판매하고 있다. 그 책을 조심스럽게 사서 희정씨에게 내밀었다. "모두가 건강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바람님께. 희정드림."이라고 희정씨가 써주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하다.'라는 느낌을 가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개인마다 제각각 필요할 것이다. 그 느낌을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과 마음이 최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윤 창출이 최고라고 여기는 자본주의가 무섭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세상은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질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장시간 근로와 각종 화약 약품의 위독성을 노동자에게 전혀 공지하지 않은 채 '빨리빨리'를 끊임없이 말하며 목표량 달성만을 요구하는 삼성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 '건강할 권리'의 간절함을 말하고 있었다. 13일 이 책을 가방에 넣어두고 꺼냈다가 넣었다가, 책장을 펼쳤다가 닫았다가 읽기까지 몇번을 망설였다. 오늘 용기를 내어 책장을 펼쳤다. 다행히도 희정씨는 담담하게 그와 그녀들의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 권에 담았다. 그래서 고마왔다.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행복하기 위한 기본 '건강'을 말해야한다.




#2. 부러진 화살
화제가 되고 있다는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보았다. 화제가 된다고 하면 보고싶던 영화도 이상하게 잘 안보게 되는데 원래 보던 영화의 타이밍과 잘 안 맞아서 부러진 화살을 보게 되었다. 영화는 사람들이 말하는 딱 거기까지 였고, 영화잡지, 시사잡지에서 말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안성기씨가 오랜만에 본인에게 어울리는 역할을 했다는 것과 그에 걸맞게 문성근씨의 연기를 보며 문성근씨가 정치를 한다는 것이 안타깝고 씁쓸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정당한 말을 하지만 억울할 수 밖에 없는 현실 구조를 말한 영화는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 거리를 던져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현실을 말할 수 있는 가상의 이야기였더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그러면 장사가 되지 않았겠지. 감독은 영화를 잘 팔기 위하여 현실의 이야기를 가져와 인물을 아름답게 가공하기도 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가상의 이야기를 더해 극에 살을 붙였다. 주인공의 극적인 성격을 가미하기 위해 당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을 소품처럼 활용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성폭력 사건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은 상당히 불쾌했다. 오랜만에 연기하는 김지호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녀가 반가웠지만 김지호 역의 기자 역시 뭔가 소품처럼 다루어져 안타까웠다. 석궁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오랜 시간 그 사건을 취재하는 유일한 여성 인물인데도 그녀는 남자 주인공 옆에서 남자 주인공을 격려하고, 술쳐먹은 남자주인공을 자기 집에서 재워주는 역할만 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전반적으로 정지영 감독에게 나는 화가 났다. 부러진 화살, 나는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