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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에 해당되는 글 13건
2013. 1. 21. 13:25


日 '구원'
이 세상에 좋은 영화, 좋은 음악, 좋은 책, 좋은 술...이런 것마저 없었다면 삶은 얼마나 끔찍한 고해일까? 친구와 영화를 보고나서 맥주를 마시며 나눈이야기. (지인의 블로그에서 담아왔다.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 남의 학교에서 술을 먹으니 뭔가 스릴감이 있어 재미있었다. 시네마테크가 있는 대학 건물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니 마치 영화제에 온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20130120)

그것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가로등에 일렬로 옹송거리고 앉아, 연무(煙霧) 가득한 겨울밤 흐트러진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는 도시의 나약한 비둘기의 환각일지도 모른다.
(20130118)

'후회' 뒤늦게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각인하게 되었다. 상임집행위 회의를 하면서 p대표가 후회라는 말을 하였다. 민우회의 장기적 활동을 위해, 세대의 전환을 위해 조직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2007년, 내가 활동을 시작한 그 시기부터 내외부적으로 끊임없이 들었다. 다양한 방안 중 하나로 민우회 이름의 변경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러한 내외부적인 요구에 기반하여 민우회는 2010년 부터 명칭 변경을 위해 애썼다. 2012년 총회, 명칭(엄밀히 따지면 별칭을 제정하는 것) 변경을 시도하다 여러가지 이유로 무산이 되었고, 2013년 총회를 준비하면서 두가지 별칭 후보가 제출이 되었다. 올해 총회에서는 명칭 변경까지는 아니지만 명칭 변경을 위한 과도기의 작업으로 별칭이 선정된다. 명칭 변경은 아직 먼 작업인듯하고, 명칭 변경 이전에 별칭을 하나 만드려고 하는 것이다. 본부, 지부가 2012년 한해동안 별칭 생산을 위해 워크샵을 하였고, 어찌되었든 4개의 후보가 만들어졌다. 총회에서는 최종 2개의 후보로 추려져 투표를 할 것이다. 별칭 선정에 관한 사전 준비 회의를 하며 p대표가 '후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 자리에서 무수한 맥락을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의 이야기의 결론은 조직의 변화를 말하는 이 시점에서, 활동가인 나는 얼만큼 최선을 다하였는가? 이 시간이 지난 시점에 나는 과연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의 문제제기가 다른 때도 아니고 총회를 일주일 앞둔,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인지에 대해 마구 따져묻고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비록 늦었다손치더라도 조직의 변화와 결단에 있어 '후회'하지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움직이자는 그 마음이 이해되기도 하였다. 끊임없이 '정치'와 '판단'의 순간이 오는 것같다. 하지만 그 '정치'와 '판단'을 떠나서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에 있어 '최선을 다해보는 것은 어떤가?.'라는 그의 조심스러운 제안이 먼저 읽혔다. 그 마음에 대한 단순한 감화가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질문을 내게 던지게 되었다. "나는 살아가며 '후회'하지않을 만큼 무언가에 대해 다하였는가?" 그래서 그 질문에 나는 순수하게 동의가 되었다. 하지만 또 조직생활에 있어 순수한 마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정치'가 발동한다는 것을 잘 안다. 오늘도 그 '정치'와 '마음'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것이 읽혔다. 하지만 이번 순간만큼은 마음이 하자는대로, 다 떠나서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마음과 제안에 그리고 나의 동의에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주말동안 사전도 뒤지고 고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또 개인의 다짐과 더불어 조직적으로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것도 동반하는 것이겠지? 제발 한주동안 쌈박한 무언가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안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발휘되어야하는 것같다. 그래서 이번 주말은 별칭 주말이다. 머리를 굴려봐야겠다. 여튼 오늘의 키워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을 쳐볼셈이다.
(20130117)

어젯밤에 잠들기 직전에 귀여운(?) 시나리오 하나를 생각했다. 등장인물은 주인공 포함하여 총 2인이면 충분한 영화이다. 배경은 서울아트시네마이고, 촬영과 편집이 가능한 사람 1명, 주인공 1명, 주인공 친구 1명이면 충분히 만들수 있는 5분 가량의 초단편 영화이다. 배우가 관건인 영화이고, '엔딩의 임팩트가 있는 흑백영화'를 영화 속 영화로 담고 싶은 영화이다. 관련해서 흑백영화에 대한 자문을 누군가가 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호감형의 누군가가 여주인공을 해주면 좋겠고, 역시 호감형의 또다른 여자분이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촬영과 편집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다면 겨울, 서울아트시네마를 배경으로 하루만에 귀여운(?) 영화 한편을 만들 수 있을텐데. 하루 영화 재미지게 찍고, 그 다음엔 술먹으며 같이 놀 누구 없을까? 영화 제목은 <그거알아?>.
(20130116)



2013년 신년맞이 민우회 활동가들의 다짐. 아, 욱겨! ㅋ


고용노동부의 “고용률 70%달성”등 인수위 보고에 대한
  촌 평 ∎   

1. 고용노동부가 인수위에 보고한 “고용률 70% 달성”에 대해서
 ⇨ 일자리 창출은 질 좋은 일자리들로 만들어져야 한다.

  지난 5년간 이명박 정부에서는 총 80만 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만들어진 일자리의 ‘질’을 생각하면 고용률 70%달성을 위한 일자리 창출안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자영업자, 일용직, 계약직 등이 집중적으로 늘어났고 고용의 질은 더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저임금계층은 한국이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 정부부문 최저임금 미달자가 9만 명(9.1%)이나 차지하는 것이 지금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모범적으로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정부기관이 오히려 앞장서서 열악한 일자리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만든 80만 개 일자리의 질이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 보고 내용 속 150만 개 일자리의 질은 과연 어느 정도로 담보 가능할지 우려를 표하며, 고용노동부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묻고 싶다.

2. 고용노동부가 인수위에 보고한 “낮은 여성 취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여성 고용 비율을 높이고 육아휴직을 보장하는 중소기업에 대해 점수에 따라 금융지원과 세제혜택을 주는 '남녀 고용평등 인센티브 마일리지' 제도 시행”에 대해서
⇨ 현상보다 문제의 근본을 보아야 해결 가능하다!

  고용노동부는 낮은 여성취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여성 고용 비율을 높이고 육아휴직을 보장하는 중소기업에 금융지원과 세제혜택을 주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보장하고 있는 법․제도는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이러한 법과 제도가 활용되기 어려운 현실적인 지점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필요한 일이다. 즉 여성취업률이 왜 낮은지에 대해서 젠더적 관점 하에서 분석이 선행되어야 여성취업률을 실질적으로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낮은 여성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고용노동부는 ‘육아휴직 중소기업 금융지원 세제혜택’을 제안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여 여성 취업이 왜 어려운지, 어떤 제반조건들이 달라져야 취업이 가능한지 등에 대한 분석 하에 실효성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가정양립정책은 남녀모두에게 해당되어 활용될 수 있도록 성평등한 관점에 근거하여 실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일․가정 양립은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만 설계․운영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고용노동부가 인수위에 제시한 안 역시 ‘육아휴직=여성노동자’라는 인식을 확산할 가능성이 있어 우려가 상당히 된다. 

3. 고용노동부가 인수위에 보고한 “벤처기업을 육성해 청년창업가를 육성하는 방안”에 대해서
⇨ 불확실한 거품이 아닌 좋은 일자리정책을 세워야 한다.

  고용노동부는 박근혜 당선인이 강조했던 ‘창조경제’의 일환으로 벤처기업 육성을 통한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청년창업기획사’와 ‘청년창업펀드’를 만들어 청년층의 창업을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청년들에게 안정되고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기보다는 자영업을 권하는 것이다. 동시에 ‘창업’이라는 허상을 통해 청년실업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창업’ 혹은 ‘벤처’라는 불확실한 거품 속에 청년들의 삶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불안을 권장하거나 증식시키지 말고, 청년들이 보다 현실적인 ‘미래’를 기획하고 일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 방안마련이 시급한 상황임을 제대로 인식하고 정책을 내야 한다. 특히 낮은 여성 취업률을 높여서 전체 고용률도 높이고자 한다면 성차별 인식에 의해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청년에 초점을 맞추어 정책을 적극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2013. 1. 16
한국여성민우회

윈슬러 호머 <여름밤>

이 그림을 실제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가끔은 미술관에서 그림 안에 조용히 머물다 일상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헌데 보고싶은 그림을 조용히 볼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한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이번 겨울 유독 장례식장을 찾는 일이 많다. 앞으로 이러한 시간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겠지. 그만큼 내 생에 있어 사그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해야하는 시간들이 가까워지고 있다. 
(20130115)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어제는 체기가 있었는데 오늘은 머리가 아프다. 토요일부터 지끈거리더니 왼쪽 편두통이 심해졌다. 빨리 취침모드로 들어가야 겠다. 퇴근길에 이렇게 가다가는 꼰대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며칠 전에도 문득 찾아왔었다. '말'로만 모든 상황을 만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움직이지 않고 '말'로만 구성된 나를 발견했을 때, '아차' 싶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순간 쉽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예민해져야할 것같다. '말'로만 모든 것을 하는 꼰대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동일한 사람이고 싶고, '말'보다 항상 '행'이 먼저인 사람이고 싶다. 어제는 동네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연애를 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딱 어제까지!" 고생했으니 수고했다고 스담스담해주는 이가 있으면 좋으련만. 결정적으로 점잖빼지않고 어딘가에 마구 칭얼거리고 싶었다. 그럴때는 가끔 동생들한테 막 까불어대곤 한다. 그럼 동생들은 참으로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래도 받아주는 동생들이 있어 다행이다. 나도 까불면 '한까불이' 하는데. 이 까불이 본능을 마구 펼치고 싶은데 못 펼치면 근질근질해진다. ㅎ 

 

+ 지난주에는 영화를 한 편도 못봤다. 이번주는 영화 열심히 봐야지. 글도 바지런히 써야지. :)

(20130114)

 

2013. 1. 6. 20:51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볼 예정이라면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씨네21에서 2012년도 영화 결산을 하면서 알랭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극찬하는 것이 눈에 계속 들어왔다. 그리고 정한석씨도 이 영화에 대해,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않은) 이들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관련된 기사와 글을 꾹 참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관련한 글을 읽고 싶지만 일단 글을 마무리 짓고 읽기로 한다. 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을 나누며 다시 한 번 영화의 희열을 느끼고자 아끼고 있다. 해를 넘기고 극장에 찾았다. 상영하는 극장은 거의 없었고, 아마 오늘이 마지막 상영이 될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사무실 근처엔 얼씬도않는 내가 홍대에 가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보았다.

 

영화는 연극 <에우리디스>의 극작가 앙뜨완과 함께 작업을 했던 배우 13인에게 앙뜨완의 부고를 알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앙뜨완이 죽었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앙뜨완의 집에 모여 그를 추모한다. 영화는 앙뜨완의 죽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앙뜨완은 죽기 전 새로운 극단에서 그의 작품을 진행하고 싶다는 부탁을 받았고, 새로운 극단의 배우들이 연기한 연극 <에우리디스> 필름을 과거 함께 작업한 배우들에게 보여주며 이 연극을 진행할지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앙뜨완의 유언을 시작으로 영화 속 연극 <에우리디스>가 시작된다. 한 자리에 모인 배우들은 연극 <에우리디스>의 필름을 보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기억 속으로 몰입한다. 몰입의 순간 영화는 경계를 잃게 된다. 영화와 연극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잃고, 새로운 극단의 배우들의 연극 <에우리디스>의 필름과 그 필름을 보고 필름 속 배우들과 교차하며 연기하는 현실과의 경계를 잃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잃고, 세대의 경계를 잃고, 육신과 영혼의 경계를 잃으며 영화는 연극 <에우리디스>의 스토리를 이어간다. 무너진 경계 속에서 각각의 만날 수 없는 요소들이 융합되어 영화는 진행된다. 그 무경계함의 향연이 보는 내내 감탄을 연발하게 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경계있는 것들의 경계를 잃어버린 융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막바지에는 거기에서 예상할 수 없는 장면들을 연출하며 저만치 앞서 내달린다.

 

영화는 앙뜨완의 죽음 전제하고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전제하고 들어간다는 것은 즉 그 전제를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앙뜨완의 유언이 끝남과 동시에 필름으로 시작 된 연극 <에우리디스>를 다 본 배우들은 그들 각자의 기억 속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앙뜨완이 갑자기 등장한다. 앙뜨완의 모습을 본 배우들은 놀라고 그의 환생과 같은 등장에 그저 환호 할 뿐이다. 거짓과 사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감독 알랭레네는 자신을 영화 속 집사의 위치에 두고 배우와 관객들을 바라본다. 알랭레네는 영화 속의 배우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동일한 위치에 두면서 필름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못했다> 속 배우들과 필름 밖 관객들의 경계를 다시 한 번 무너뜨리며 관객을 영화 속으로 쑥 끌어들이며 관객들에게 엄청난 희열을 전달하는 것이다. '정말, 이 사람 미친 것 아니야?' 놀람과 환희 속에서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을 때 영화는 순식간에 장면을 전환시킨다. 다시 앙뜨완이 등장하고 앙뜨완은 재빠른 걸음으로 숲길을 헤쳐 걷고 어떤 망설임도 없이 물 속에 몸을 던진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화는 앙뜨완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가장 영화적인 장면으로 연출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그 어떤 틈을 주지 않고, 새로운 극단의 연극 <에우리디스>에서 에우리디스를 연기한 배우를 등장 시키고, 황급히 앙뜨완의 묘지를 찾는 장면으로 전환한다. 에우리디스 역의 배우는 그보다 먼저 앞서 연기한 연극 <에우리디스>의 배우들을 앙뜨완의 묘지가 멀리 보이는 어둠 속에서 지켜본다. 과거와 현재가, 필름 <에우리디스>와 현실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헤깔리는 것이다. 이것을 시간적 흐름대로 순순히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앙뜨완은 죽었다는 영화 시작의 그 전제가 진짜였을까? 그렇게 헤깔려하고 있는 순간 다시 장면이 바뀐다. 이번에는 연극 <에우리디스>가 공연되고 있는 극장의 전경이 나오고 영화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가 올리브 숲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어느 순간을 분절의 순간으로 두고 해석해야하는 지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영화의 제목이 왜 그렇게 만들어 졌는지 어떤 저항감 없이 그저 이해되었다.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아, 알랭레네 엄청난 사람이다.' 나는 이 영화를 왜 이리 늦게 본 것일까. 영화를 보며 희열을 느낀 순간은 처음인 듯하다.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극장에서, 낙원동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이 영화는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와도 아주 잘 어울리는 영화인 것같다.

 

+ 무언가를 전제한다는 것은 믿게 만든다는 것과 동시에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우게 만들기도 한다.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를 각각 3명이 연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각각의 시대의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를 연기한 배우였다는 전제는 각각의 배우들이 동일한 대사를 읊고, 교차 편집되는 장면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은 전제의 전부만은 아니겠지. 배우들의 연기가 또 한 몫햇다.

 

+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할 말이 많다는 것은 관객을 자극한다.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는 훌륭한 영화인 것같다. 그런데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면 나는 무지하게 행복하다. 오늘이 그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 메모장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저리 주저리 적어내려 가는 그 순간이 기뻤다.

2012. 12. 2. 15:10

 

 

 

 

 

사람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심상의 풍경이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해변이다.

<아녜스의 해변> 중

'나의 경우 그것은 바람이 부는 언덕이다.'

 

<아녜스의 해변>을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아녜스 바르다 그녀는 '生의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한 편의 영화로 그녀의 자화상을 그린 사람. 그녀는 붓대신 카메라를 들었고 필름에 그녀, 그녀가 만나온 사람들, 그녀의 기억, 그녀의 철학을 위트있고 솔직하게 담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벼운 生, 가볍기에 자유로운 生, 자유롭기에 솔직한 生. 그렇게 영화 속에는 80생을 살아온 80개의 아녜스 바르다가 있었다.

그리고 영화 <아녜스의 해변>은 아녜스 바르다와 그녀가 지켜본 사람들,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 관계를 통해 얻은 '행복'을 말하고 있었다. 아녜스 바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백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채우고, 이어가고 그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生의 에너지가 놀라웠다.

 

+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조건에 대해 질투를 했다. 그녀를 동경하면서 동시에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내 생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조건에 대한 질투'는 확실히 못난 방식이다. 어떻게든 나만의 방식으로 무엇이든 생산할 수 있도록.

(20121125)

2012. 11. 3. 12:55

 

 

아마 이번 특별전 포스터에 사용된 이미지는 영화 <아녜스의 해번>인 것같다. 이 영화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프랑스 영화 특별전이라는 말만이라도 아트시네마에서 프랑스 영화가 내내 상영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올 겨울 아트시네마에 프랑스 영화 보러 가야겠다. :) 아트시네마 포스터 만드시는 분은 센스가 돋는다. 이미지와 글자만으로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어 낸다.

2012. 8. 21. 00:19

 

<나의 작은 연인들> (Mes Petites Amoureuses / My Little Loves, 1974)

장 으슈타슈

 

영화를 보면서 몸과 욕망의 불일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몸과 욕망의 불일치라는 표현보다는 몸과 욕망의 어색함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감독은 이 불일치 즉 어색함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당시 이 영화가 만들어졌던 1974년 프랑스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청년들의 무력감은 무엇에 기인하는지를 질문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당시 프랑스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프랑스와 관련한, 내 방에 있는 유일한 책 <1968(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을 읽어야 겠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다니엘은 사정으로 인해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 근거지를 옮긴 이후 다니엘의 놀이는 변한다. 서커스 구경을 가고 서커스 장면을 모방하거나, 숲 속 나무에서 뛰어내리기 등의 놀이를 하던 다니엘은 근거지 변경 후 극장에 가고, 극장에서 만난이와 키스를 시도하고, 카페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과 무리지어 연애를 할 상대를 찾아 다닌다. 감독의 경험을 근거하여 만들었다던 이 영화는 청년의 욕망이 소상하게 드러난다. 영화를 보면서 당시의 나의 욕망은 어떻게 구성되고 실현되었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흔하게 표현되는 남성의 성에 대한 호기심, 욕망과 달리 여성의 성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관련한 이야기가 서서히 흘러나온다. 강이 된다.

(20120815)

 

 

 

 

<야생갈대> (Les Roseaux Sauvages / Wild Reeds, 1994)

앙드레 테시네

 

"너를 만난 것은 네가 내게 안정을 주기때문이야."

"내가 너를 좋아한 것은 나를 지킬 수 있기때문이야."

"전쟁보다 끔찍한 것은 삶이 계속 된다는 것이야."

 

기억나는 대사만, 느낌을 살려 끄적거려본다. 빛의 노란색과 숲의 초록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장면을 감독은 아름답게 연출하고 있었다. 목가적인 풍경 속에 담긴 투명한 인물들이 아름다웠다. 영화는 프랑스와즈와 세르주, 마이테와 앙리라는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2연 詩같기도 하였고, 프랑스와즈, 세르주, 마이테, 앙리로 분절된 4연 詩같기도 하였다. 세르주의 형 결혼식과 장례식 장면에서 각각 울리는 '종' 장면을 보면서 특히 영화가 詩같다고 생각하였다.

 

프랑수와즈가 거울을 보며 "나는 호모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프랑수와즈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직면하는 장면은 긍정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인상깊었던 또다른 장면은 마이테의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장면이었다. 감독은 꿈과 현실의 반복 혹은 중복을 통해 '순간' 무엇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도록 하여 그 경계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홍상수 감독이 생각났다. <야생갈대>는 건조하다기보다는 감정이 차고 넘쳤고 그동안 봐온 프랑스 영화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영화인데 줄곧 배경음악으로 팝송이 흘러나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 영화의 감성이 좋다.

(20120819)

2012. 8. 6. 23:04

 

 

 

4일의 휴가를 끝내고 출근을 했다. 도란도란 둘러 앉아 도시락을 열고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가 k가 물었다. "휴가 어땠어?" 제주의 동, 서, 남, 북 바다를 다 둘러보았고 식도락 여행을 하고 왔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4일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져 여름 휴가가 한 달이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지만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영화 <오루에 쪽으로>를 보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바캉스가 한창이다. 영화제 포스터가 참 여름스럽다. 바캉스를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게 만든다. 시네바캉스에서 상영하는 상영작 리스트를 쭉 보고 <오루에 쪽으로>를 꼭 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바캉스를 다녀오면 정작 몸이 지치고 힘들어 영화를 볼 기력이 없어질 것같다는 마음이 한켠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서 함께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던 친구에게 다음에 같이 영화데이트를 하자고 말하고 일요일 <오루에 쪽으로> 일정을 취소했다. 그리고 맞이한 일요일, 나의 바캉스 마지막 날 찜통같은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이 더 괴로웠다. 그래서 극장으로 더위를 피하러 시네바캉스를 떠났다.

 

여름 휴가가 한 달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 영향력은 아마 영화때문일지도 모른다. 바캉스를 맞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휴가는 20여일이 넘었고, 족히 한 달이 되는 듯하였다. 조엘과 카린, 캐롤린은 양손에 무게가 상당히 나가보이는 트렁크를 손에 쥐고 휴가지로 여행을 떠난다. 배를 타고 도착한 해변가의 한적한 마을. 무거은 트렁크를 낑낑 들고서 사구를 올라서는 그 모습을 보며 휴가에 대한 그녀들의 절박함이 보였다. 영화는 기승전결이 있다기 보다는 휴가지에서 보낸 시간을 일기를 쓰듯 소소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보며 삶에 있어 휴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을 해본다.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기꺼이 해안 사구를 올라갈만큼 절박하고,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일상의 공간을 벗어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며, 시덥지 않은 장난에 배를 잡고 꺼억꺼억 웃기도 하는 것이 휴가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조엘과 카린, 캐롤린이 그녀들이 머무는 그 집을 청소하는 장면이었다.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한 달여 동안 머물 집에 또다른 질감의 일상을 풀기 위해 그 공간을 쓸고 닦는 일상적 행위를 보며, 휴가라는 것을 그저 '일탈'이라고만 생각해왔던 것에 대해 다른 결의 '일상'이라고 말하는 메시지가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조엘, 카린, 캐롤린의 셋의 조화에서 파트릭의 결합으로 넷으로 그리고 질베르트의 합류로 다섯으로 파트릭이 떠나 다시 넷으로, 질베르트와 카린의 관계가 무너지며 셋에서 결국 조엘과 캐롤린만 남는 흐름을 유난스럽지 않게 담담하게 담고 있었다.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 다섯에서 넷, 다시 넷에서 셋 그리고 둘. 하나 더하기 혹은 하나 빼기 라는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수식을 통해 자크 로지에는 바캉스에서 겪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물결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결국 그 잔잔함이 영화 마지막 조엘의 눈빛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조엘을 좋아하는 파트릭은 우연을 가장하여 조엘이 머무는 휴가지를 찾지만 조엘은 질베르트에게 마음을 둔다. 하지만 질베르트는 카린과 관계를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종종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내는 경이로움에 기대어 관계의 경이로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휴가지를 배경으로 한 한국 상업영화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자크로지에는 그것을 표현하되 그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편안하게 관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었다.

 

자크 로지에는 "바캉스를 왜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 "바캉스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자유의 순간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말에 절대 공감을 하며 나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자유의 순간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바캉스에 대한 프랑스의 관대한 시간 개념이 부러웠다. 바캉스라는 개념이 단순히 시간과 물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되돌아 보고, 그 시간 속에서 의미를 축적하고, 일탈의 공간에서 다시 한 번 일상을 느끼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순간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것을 영화화 한 <오루에 쪽으로>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얼마전 친구들과 함께 떠난 가평으로의 1박 2일의 바캉스가 <오루에 쪽으로>의 바캉스와 조금 닮은 것같다고 생각했다. 가평으로 여행을 함께 떠났던 그 친구들과 함께 <오루에 쪽으로>를 같이 보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가 <오루에 쪽으로>와 관련된 글을 썼다.

자크로지에와 바캉스의 영화들

http://cinematheque.tistory.com/

 

+ <오루에 쪽으로>(1973)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1986)이 떠올랐다. 두 영화는 닮아있었다. 여름 타자기 소리로 가득한 사무실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것과 휴가 기간동안의 일에 대해 날짜가 기록된 화면을 삽입하고 그 안에 에세이 형식으로 서술하는 구조 또한 닮았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프랑스 영화라는 것도.

 

+ 프랑스 영화가 정말 좋다. 프랑스 말을 배우고 싶다. 프랑스에 가고 싶다.

 

+ 자크 로지에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궁금해졌고, <오루에 쪽으로>를 한 번 더 보고싶다. 원래는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글을 쓰고 싶었는데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어(나머지 상영시간은 모두 평일 낮이다. ㅠ) 영화의 잔상이 내게서 사라지기 전에 기록한다. 한 번 더 음미하기 전에 이렇게 기록해버리면 좋은 영화가 그것으로 규정되어버리는 것이 싫은데 어쩔 수가 없다.

 

+ 여튼 <녹색광선>과 함께 <오루에 쪽으로>도 나의 페이버릿 리스트에 합류했다.

2011. 5. 25. 01:29


'신'이라는 존재는 무엇이고 나는 '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데비치>, 오랜만에 아주 강렬한 영화를 보았다.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사랑이고, 주님의 사랑을 끝없이 갈망하는 소녀 하데비치. 한 겨울에 부러 옷을 입지 않고, 먹지 않고, 수녀원에서 고행과 수행을 하며 금욕을 실천하는 하데비치. 하지만 그녀는 '자기애'에 대한 욕구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수녀원을 나갈 것을 권유받는다.

수녀원을 나와 프랑스 파리 한 복판, 고급 주택가에서 셀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데비치. '신'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도 변함이 없다. 하데비치는 우연히 이슬람 청년 나시르를 만나면서 '신'과 '자아'에 대한 사유를 끊임없이 공유하게 된다. 나시르와 이슬람에 가게 된 하데비치는 '신'과 함께 '신'안에서 끊임없이 투쟁을 할 것을 나시르와 나시르의 친구들 앞에서 맹세한다. 그리고 하데비치는 나시르와 함께 파리 한복판 지하철 테러를 감행한다. 영화는 테러에 대한 암시를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나만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일까? 지하철을 타는 하데비치와 나시르를 잡은 카메라는 순간 개선문을 보여주고 몇초지나지 않고 '펑', 굉음과 함께 하얀 먼지 기둥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장면이기에 놀랐다. 그 이후 하데비치는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고,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에게 울음을 토하며 '신'의 존재를 묻고 또 묻는다. 결국 초원의 늪에 몸을 던지는 하데비치. '그녀가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죽음의 늪에 빠진 그녀를 '사람'이 구한다. 물속에 빠진 하데비치를 끌어올린 것은 사람중에서도 '죄인', 전직 수감자였다. 하데비치는 자신을 구원한 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신'이란 무엇인가? '신'과 '사람', '사람'과 '신'에 대해서.

+ <하데비치>를 보면서 정성일 감독의 영화 <까페 느와르>가 생각났다. 영화 첫 시작, 기도하는 자세로 햄버거를 먹으며 '신'을 이야기하던 소녀는 하데비치를 닮았다.

+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생각났다. 당시 영화를 보고 쓴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 2007년 6월 8일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보고 

영화가 시작된다. 닮은 패턴이다. 카메라는 길위를 달린다. 음악이 흐른다. 아 이 느낌_
영화가 끝났다. 노란 햇볕이 마른 강아지풀의 그림자를 만든다. 음악이 흐른다. 아 이 느낌_

징글징글한 이 느낌.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일주일 내내 언론이 떠들석한다. 월드스타, 칸의 여신. 뛰어난 연기로 국위를 선양한 배우 전도연. 가판대의 기사를 접한 거리의 노숙자도 미간 사이의 찡긋한 그녀의 귀여운 미소에 화답을 한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년 월드컵 이후 다시 한번 스멀스멀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이곳저곳을 뒤져보아도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않다. 딱 두가지 이야기만 존재할 뿐. "고통스러운 영화이다. 칸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모든 이야기를 뒤로하고 나는 내게 묻는다.
"넌 어떻게 보았니?"

이창동감독의 전작. 박하사탕, 오아시스(초록물고기는 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수가 없다.) 보는 내내 내게 씁쓸함을 안겨주었던 영화들. 인간의 순수성을 하나 둘 잃어가는 모습을 시간의 역구성을 통해 이야기했던 박하사탕을 보며 나는 나의 마흔다섯살을 두려워했다. 어쩌면 속물 소리를 들으며,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 잡았다.(여전히도 그 두려움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오아시스, 여성의 시각으로 영화를 봐야한다는 개인적 사명을 띠고 영화 러닝타임 내내 영화를 쏘아보았기에 이 또한 괴로운 시간이었다. 이렇듯 그는 항상 그렇다. 가만히 나를 내버려두지않는다. 보통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현실이라는 징글함을 잊기위한 도피이다. 하지만 진짜보다 더 진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픽션은 오늘만이 존재하고, 이러한 그의 영화는 그를 찾은 관객을 처음부터 끝까지 괴롭힌다. 그런 그임에 알기에 각오하고 객석에 앉았다. 전도연 그녀의 수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 붐볐던 평일의 극장.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 많은 이들은 영화가 끝난 후 무슨 생각을 하며 하얀 스크린을 등지고 나왔을까.

신을 생각한다.
사람을 생각한다.

인류는 언제부터 신의 존재를 믿었을까. 신이 사람을 만든 것일까. 사람이 신을 창조한 것일까. 마지막 장면_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거울을 들어주던 종찬을 보며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창동 그가 결국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다시 반문을 한다. 마지막 장면이 그러할 뿐_종찬이 언제까지 신애곁에 머물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밀양(密陽)

"신은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곁에 존재해요. 저 작은 햇볕조각 하나에도 신은 의미를 부여한답니다." 아주 작은 틈사이로도 햇볕이 비집고 들어오듯이, 모든 것을 투영할 듯한 햇볕이 비밀스럽다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그 수식어에서 나는 내 존재의 가증스러움, 우리내 사람들의 알량한 양심을 본다.
모든 것이 쉽다. 죄를 짓는 것도..용서를 구하는 것도..회개도..신에게 세치 혀로 용서를 구하고 기도를 드리면 우리는 새로운 인간이 된다. 그리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잠들기 전 두 손을 모아 기도드리고 다음날 새 인생을 시작한다. "난 새롭게 태어났어요. 신은 저를 용서하였죠." 그렇게 외친다. 결과와 결과만이 존재할 뿐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를 씻기위한 고통의 과정은 깔끔하게 편집한채 "저는 신에게서 용서를 구하였어요" 말하며 오늘을 위선으로 똘똘뭉친 모범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의 면죄부, 아니 내가 내게 쥐어주는 면죄부를 꽉 쥐고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창동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맺음. 인간이 규정한 일방적 관계맺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기때문에 신애에게 그리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한 것일까?

습관이 되어버린 나의 기도. 습관이 되어버린 나의 반성. 자기위안...아무의미없는 반복에 회의를 느껴 잠시 기도를 멈춘다. 그리고 방황을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인가?" 언젠가는 나는 성찰이 결여된 나의 질주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신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반복_반복_반복_

하지만 여전히도 햇볕은 내리쬔다.
비밀스럽든, 그렇지아니하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fade out. 그리고 나의 한마디.
"아_이창동, 징글징글해."


+ 인류역사상 인간은 '신'을 말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 '신'이 주님이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부처가 되었든, 무엇무엇이 되었든. 그렇다면 '신'은 어떤 순간에 내게 의미가 되고, 존재로 작동하는 것일까.
2011. 3. 22. 00:53

서울아트시네마 홍보 UCC 공모전에서 1등을 한 정금형씨의 <서울 아트시네마의 옥상>, 아트시네마의 매력을 콕집어 표현한 작품이다. 아트시네마의 옥상은 훌륭한 공간이다. 질투와 함께 속으로 말한다. "좋다." 

2011. 1. 29. 02:18

2010년, 영화 '옥희의 영화'를 보고 아차산에 다녀왔다. 아차산 정상에서 올해가 끝나기 전 영화 한편을 만들 겠다고 다짐했다. 그날의 다짐이 그냥그냥 다짐으로만 머물지도 몰랐었을텐데, 2010년 12월 25일 나는 장비를 대여했고, 작업을 함께 할 친구들을 서울아트시네마 옥상에서 만났다. 바람이 매서웠다. 하지만 우리는 빠알갛게 추위에 손이 익어가면서도 꿋꿋이 촬영을 했다. 촬영을 마무리 하고 장비를 반납하고 감자탕과 소주를 마시며 영화를 만들었다는 기쁨에 모두들 즐거워했다. 결정적 장면을 깜빡하고 찍지 않기도 했고, 이래저래 많이 어설프기도 했지만 정성을 다해 만든 작품이었기에 애정이 특별했다. 그래서 서울아트시네마 홍보 UCC 공모전에 '회춘(回春)'을 출품했다. 바로 말하면 서울아트시네마 홍보 UCC공모전이 실질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끔 한 동력이었다. 내심 기대했다. 아트시네마의 커다란 스크린으로 '회춘(回春)'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아트시네마 스크린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만든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 생각만해도 설레였다. 하지만 탈락했다. 그래도 내가 직접 만든 작품이라 그런지 보고 또 봐도 좋다. 상상을 함께 실현한 사람들이 참 고맙다. 

ps. 영화 속 동재의 바람대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2011년 겨울 에릭로메르의 '녹색광선'을 상영한다. '녹색광선'을 정말 필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시네마테크와 친구들 영화제 상영시간표에 '녹색광선'이 있다는 것을 보고 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고마와요! 서울아트시네마.


2011. 1. 19. 00:13

2011 시네마테크와 친구들 영화제 '쥬이쌍스 시네마'

시네마테크와 친구들 영화제 개막제에 다녀왔다. 작년부터 벼르고 벼렀던 영화제였기에, 개막작이 에릭로메르의 영화였기에 사무실 신입활동가 환영회를 마다하고 종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제 개봉도 개봉이지만 로메르도 로메르였지만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은 서울아트시테마 UCC공모전에 수상한 작품들이었다. 영화 개막식에 선정된 영상이 상영된다는 것이 나를  움직이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얼마나 잘 만들었길래, 어떻게 만들었길래 내 작품이 선정되지 않고 다른 작품들이 선정된것일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난 오늘 당선작들을 볼 수 없었다. 어떠한 이유인지 당선작이 상영되지 않았다. 아쉬웠다.

하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느끼는 '쥬이쌍스 시네마',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2011년 서울아트시네마의 활동 모토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즐거운 영화, 즐거운 공간, 즐거운 사람. 그런의미에서 이번영화제의 모토는 쥬이쌍스 시네마. 영화제 모토에 걸맞게 개막작은 에릭로메르의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 Quatre aventures de Reinette et Mirabelle / Four Adventures of Reinette and Mirabelle (1987)이었다.

에릭로메르의 영화를 보며 영화 속에서 느껴지는 그는, 자연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이다. 1986년 영화 '녹색광선'에서, 에릭로메르는 일몰직전, 찰나의 순간 반짝하는 녹색빛을 관찰하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1987년 영화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에서 에릭로메르는 블루타임을 이야기한다. 새벽이 오기 전 모든 것이 숨죽이고 있는 고요의 순간, 그 순간에 서서 레네트와 미라벨은 생명이 깨어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블루타임을 숨죽여 기다리는 레네트의 모습에 녹색광선을 숨죽여 기다리는 델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델핀의 소녀적 모습이 레네트일지도 모른다고. 두 여성은 자연의 변화와 그 찰나의 순간을 바라보고 집중하고 느끼는 법을 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맞이하든 맞이하지않든 눈물을 흘리는 법을 아는 것이다.

에릭로메르의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사고를 나누는 법을 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이 생각하는 각자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를 언어로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그들 각자의 세계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때로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갑자기 눈물을 쏟기도 한다. 눈물을 쏟는 장면이 어의없고, 황당해서 영화를 보며 허허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 씁쓸함이 베어나오고 그 눈물에 공감이 되기도 하고 그 눈물에 연민을 느꼈다. 생각지도 않게 사고가 흘러가는 것이 당황스러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저 멀리 달려가는 사고를 언어가 따라잡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의심하지 않고 내 뱉었던 사고에 대한 성찰의 의미로 눈물을 흘리기도 할 것이다. '운다.'는 것에 이유를 묻기보다는 울고 싶어서 우는 로메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나는 좋다.

극장을 나오면서 생각을 했다. 내게 있어 시네마테크란? 시네마테크라는 내게 있어 열등감의 공간이다. 영화를 사랑하고 싶고, 영화를 좋아하고 싶은데 나보다 더 영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시네마테크에서 바로 확인하기때문이다. 그래서 다짐했다. 열등감의 에너지를 반드시 글로 전환하기로!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선 에릭로메르 회고전이 진행된다. 다시 한 번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을 보고, '녹색광선'을 필름으로 보고 두 영화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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