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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3. 21:38

<함께가는 여성> 213호가 나왔어요. 계간지로 바뀌고 2013년 봄, 세상에 인사하는 <함께가는 여성>에 오랜만에 글을 썼어요. :D




노년들의 영화에서, 든든하게 나이 들 수 있는 길을 찾다!

이소희(바람) /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노년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제목은 <아무르>, <내일을 위한 길>이다. <아무르>는 프랑스 영화다. 음악교사였던 노년의 부부 안느와 조르주는 음악회를 다니며 평화롭게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안느의 병은 그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내일을 위한 길>은 1937년 미국 영화다. 은퇴 후 다정하게 지내오던 노년의 부부 바크와 루시는 부채로 인해 그들의 집이 저당 잡히자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의 집에서 흩어져 지내게 된다. 자식들은 부모의 존재가 불편하다. 


<아무르>를 보며 엄마의 나이 듦이 오버랩 되다

영화의 잔상이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영화 속 인물들이 내 곁에 계속 머물렀다. 왜일까? 내가 나이 든다는 것, 가족이 나이를 먹고 늙는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에 영화 속 그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아무르>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아팠다. 평생 사용한 근육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채 계속 사용하다보니 결국 탈이 났다. 엄마는 오른손이 고장나버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혼자서 옷을 입고 벗을 수 없었고, 왼손으로 어설프게 밥을 뜨고 힘들게 찬을 집었다. 엄마대신 가사 일을 하고, 엄마의 거동을 도우면서 속상했다. 그리고 짜증이 치고 올라오기도 했다. 이 짜증은 무엇일까?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동안 지켜왔던 습관을 유지하고 싶기에 억지로 손을 움직여 본다. 몸은 마음과 달리 움직인다. 내 곁에 있는 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면, 그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성질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치고 올라오는 짜증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감정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일까? 


<내일을 위한 길>에서 ‘타인의 친절’이 의미하는 것

영화 <내일을 위한 길>은 가족 안에서 느끼는 노년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다. 나이든 부부는 빠르게 움직이는 자식들의 시간을 따라갈 수 없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그들의 시계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부부의 느려진 사고와 나약해진 몸은 자식들에겐 불편하고 귀찮은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자식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싶지만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이 흐른다. 이러한 시간의 강을 ‘세대차이’, ‘갭’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세대차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느 정도 힘이 있을 때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존재가 투명해지는 것 같다. <내일을 위한 길>의 노부부는 자식들의 공간에서 화분처럼 지낸다. 가족 안에서 쓸쓸한 노부부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들은 ‘타인’이다. 뉴욕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행을 보내던 바크와 루시에게 자동차 판매자는 자동차를 ‘파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도시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빠른 음악을 지휘하던 연회장의 지휘자는 그들을 위해 느린 템포의 음악을 연주한다. 


‘타인의 친절’을 통해 <내일을 위한 길>의 레오 맥캐리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이 든다. 늙는다.’ 회피할 수도, 정지할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노인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고민했을 것이다. 젊은 자식들은 제 살기에 바쁘다. 노인에게 가족은 쓸쓸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은 관계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내일을 위한 길>은 ‘노인을 공경하라!’라는 텍스트로 시작된다. 교과서적이고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영화를 보고 극장에 나올 때 이 말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중에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각주:1], ‘두 존재의 공존이 가능한, 즉 사회적 관계성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물었을 때 영화 시작의 텍스트가 의미로 다가왔다. 그 텍스트는 관계의 윤리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든든하게 나이 들기 위하여

<아무르>를 보면서 나의 노후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교직생활을 했기 에 노후의 삶이 보장되었던 안느와 조르주와 달리 나의 노후는 연금도 녹록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사(私)보험을 들 형편도 안 되는데 나의 노후는 어떻게 될까 불안했다. 지인은 본인이 나이 들면 폐지 줍는 할머니로 살아갈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집이 저당 잡혀 갈 곳이 없는 <내일을 위한 길>의 바크와 루시가 ‘젊을 때 저축하라.’는 거리의 간판을 보며 씁쓸하게 지나치는 모습이 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것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늙어서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회경제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무르>를 보며 느낀 불안감을 <내일을 위한 길>을 보며 다독이려고 했다. 


“가족 안에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어. 사회적 관계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해!” 나도 언젠가 나이가 들 것이고 흐릿해질 것이다. 나이가 들고 흐려진다고 하여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존재에 대한 인식과 관계의 연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싶다. 노인의 경험이 세대의 강 때문에 단절되지 않도록 징검다리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특히 할머니의 경험이 전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 일본의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아흔이 넘어 쓰기 시작한 시를 모아 아흔 여덟 살에 <약해지지 마>라는 시집을 세상에 내 놓았다. 할머니는 지금 이곳에 없지만 할머니의 삶은 할머니의 시집을 통해 공유되고 있다. ‘할머니 시(詩) 교실을 열고, 할머니들의 시(詩)를 모아 시집 한권을 내놓으면 어떨까?’ 든든한 나의 노후를 위해서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할머니의 커뮤니티는 곳곳에 많이 존재해야 한다.


貯金 (저금)

私ね 人から 나 말야, 사람들이

やさしさを貰ったら 친절하게 대해주면

心に貯金をしておくの 마음속에 저금해 두고 있어


さびしくなった時は 외롭다고 느낄 때

それを引き出して 그걸 꺼내

元気になる 힘을 내는 거야


あなたも 今から 당신도 지금부터

積んでおきなさい 저금해봐

年金より 연금보다

いいわよ 나을 테니까


- 시바타 도요 시집 <약해지지 마>

  1. 나이 권력으로 젊은 사람을 뭉개는 늙은 가부장을 많이 보았기에, 늙음과 젊음의 힘의 관계를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늙음과 젊음에 있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소수자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싶었다. [본문으로]
2012. 12. 20. 21:43

 

12월 19일이 지났다. 심란할듯하여 일부러 대선 방송을 보지 않았다. 대신 극장에 다녀왔다. <레미제라블>을 봤다. 친구들과 함께 24일날 보기로 약속해놓고 결국 참지 못하고 봤다. 24일에도 다시 볼 것이다. 우선 이 영화에 대한 초벌감상을 해보려고 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에 아주 충실한 영화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뮤지컬을 구현한다는 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기대하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관객이 기대하는 '무언가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영화 평론가 황진미씨는 '뮤지컬이 보여주지 못하는 스펙터클까지! 최고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스펙터클을 어느 부분에서 느꼈던 것일까?

 

영화를 통해 뮤지컬이 구현되는 장점 중 하나는 무대에서 쉽게 보고 느낄 수 없는 배우들의 생생한 표정일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카메라를 배우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면서 표정의 생동감은 전달한다. 하지만 뮤지컬 영화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기준을 두고, 거기에 영화적 요소를 결합하는 장르이다. 그랬을때 '뮤지컬'이 가지는 기본조건을 관객들은 당연히 전제하고 극장을 찾는다. 관객과 배우가 닫힌 공간에 함께 있는 장르인 연극은 그 시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 그로 인해 느껴지는 긴장감이 묘미이다. 뮤지컬은 같은 시공간에 관객과 배우가 존재하는 것과 더불어 음악적 역동이 더해져 그 긴장감의 전달은 더욱 극대화된다. 특히 <레미제라블>과 같은 대형 뮤지컬의 역동과 웅장함에 대한 관객의 기대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영화이지만 뮤지컬영화라는 두 버전이 결합된 창조물에 대해 관객들은 두 버전에 대한 기대를 동등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레미제라블>은 관객의 그 기대에 미치지못하고 대체로 평이하다는 느낌을 전한다. 재능은 가지고 있지만 끼를 제멋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모범생'같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답답했다. 왜 답답했을까? 그 이유는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관객의 기대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제대로 본 뮤지컬영화 중 하나는 <사운드오브뮤직>이다. <사운드오브뮤직>과 <레미제라블>을 비교했을 때 두 영화의 확연한 차이는 화면에 무엇을 얼만큼 담았는가이다. 즉 영화의 배경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인가이다. <사운드오브뮤직>의 경우 영화라는 장르를 적극 활용하여 카메라는 자연이라는 광활한 배경을 멀리서 잡고, 그 안에 인물을 담고, 음악을 덧씌운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뮤지컬 무대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제한적 배경안에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하였다. 특히 시민군과 공권력의 대치장면은 무대를 그대로 반복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배경이 세트와 컴퓨터그래픽으로 구성되어 이 또한 무대에 국한된 연출로, 관객은 영화적 스펙타클을 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빅토르위고의 원작인 <레미제라블>에 대해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딱 은촛대까지의 수토리가 전부였다. 영화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처음과 끝을 접하였다. 영화를 함께 본 이는 2시간 30분 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자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이 또한 5권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을 영화하면서 부딪히는 한계일 것이다. 인물들이 '도구화'되는 순간들이 틈틈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자베르의 고집스러운 자기 신념에 대한 실천과 장발장의 끊임없는 질문-Who am I?-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장발장의 죽음과 동시에 영화 속에서 흐르는 노래가 주님을 언급하다가 민중으로 전환되는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소설이라는 원작의 무게와 4대 뮤지컬 중 하나라는 작품의 그림자 속에서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혔지만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한 작품이었다.

 

+ 제대로 본 뮤지컬도 없으면서 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주저리주저리 쓴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긴하지만 말그대로 감상이니까. 제멋대로 내 공간이니까. ㅎ

 

+ 앤헤서웨이와 에포닌 역의 사만다 뱅크스 좋았다.

 

+ 만약에 영화를 메가박스 센트럴에서 보지 않고 다른 곳에서 보았으면 영화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메가박스 센트럴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집 앞이라는 장점으로 찾았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를 했다. 스크린은 조막만하고, 조막만한 스크린은 또 윗부분이 잘리고, 음향은 전혀 받쳐주지않고 의자만 징그럽게 많은 메가박스 센트럴에서는 앞으로 가급적이면 영화를 보지않을 것이다. ㅠ <레미제라블>을 메가박스 센트럴에서 보다니 내가 멍충이다. 여튼 좋은 극장에서 다시 한 번 더 봐야겠다.

 

+ 그리고 관객님들하 영화볼 때는 제발 영화에만 집중해주면 안되겠니? 팝콘 먹느라 분잡하고, 이에 낀 팝콘 빼느라 쩝쩝 산만하고, 틈틈히 핸드폰 메시지 체크하고, 앞좌석 뻥뻥 차주시면서 그렇게 영화를 봐야겠니? 제발 안그러면 안되겠니? 엉.엉.엉. 

2012. 12. 13. 00:18

 

"<26년> 어때?"라고 친구에게 물었을 때 친구는 작은 실망을 표현했지만 꼭 봤으면 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일요일 아침 한파를 뚫고 극장으로 갔다. 영화가 김아중과 류승범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가 엎어지고, 이승환의 제작 투자 미담과 1만 5천명의 두레제작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기본적 정보만 가지고, 강풀 원작의 웹툰 <26년>을 보지않은 채 극장에 갔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영화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않았다. 개봉시기를 굳이 대선 직전에 잡아 급하게 만들어 영화 완성도가 어떻고 저떻고 떠들고 싶지 않았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봤던 중학생들은 욕을 하면서 잃어버린 핸드폰을 컴컴한 극장안에서 찾고 있었다. 5-6명의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 일요일 아침, 이 영화를 보며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1980년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당시 '화려한 휴가'를 지시했던 그 사람 또한 존재하는 지금 <26년>은 그들에게 어떤 영화 였을까? 궁금했다. 씨네21이 김혜리 기자는 <26년> 20자 평에 대해 '관객이 빈 곳을 채워가며 마음속에서 완성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그 말에 적극 공감한다. 그리고 '<26년>과 <남영동 1985>는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라는 정성일 평론가의 말에도 동의한다. <26년>은 비극을 보며 마음의 정화를 가지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시간을 기억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26년>을 보고, 웹툰 <26년>을 보았다. 웹툰을 연재하면서 강풀은 본인이 왜 이 웹툰을 쓰는지에 대한 변-그동안의 연재에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을 하였고, 광주에 대해 정리했던 웹툰을 Daum에 부탁하여 다시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는 웹툰 <26년>을 통해 많은 이들이 광주를 기억하고, 당시의 광주를 몰랐던 이들에게 광주를 알리기 위해 '최대한 재미있게' 웹툰을 연재하려고 애를 썼다. 웹툰을 보면서 그의 그러한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영화 <26년>에서 또한 그런 애씀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 감독과 배우, 제작진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함께 한 1만 5천명의 보통(?) 사람들의 애씀의 흔적이 영화 마지막까지 보였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오늘 아침', 새벽의 기운이 어스러이 느껴지는 장면에서 광화문 대로를 지나는 검은 세단을 보면서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제각각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아침이었다.

 

대선 후보자 토론회에서 이정희의 활약에 누군가는 속 시원해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절대 그 사람이 당선되면 안되기에 반드시 투표장에 가야한다며 말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제발 내게 그 사람이 아닌 다른 그 사람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한 가지만 제발 알려달라는 사람들도 있다. 제각각 저마다의 상황에서 이번 대선을 바라보고 있고,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침 출근길, 정말 그 사람이 당선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선택해야만하는 것인가? 딱 일주일 전인 오늘, 그럴 수밖에 구도가 개탄스럽기도했다. 하지만 어찌보면 19일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 날일 수도 있다. 19일이 우리의 삶을 절대 바꿔놓지는 않을 것이다. 19일이 운명의 날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19일 이후와 이전의 우리 삶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신중하게 답하고 그 답에 대한 실천을 다짐하는 밤이 되야한다.

 

[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남영동 1985’와 ‘26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032152405&code=990100


[올드독의 영화노트] <26년> <남영동1985> 작은 스위치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2093

 

[2030 콘서트] 정권교체 실패하면 이민가겠다는 지식인들게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 학생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212122143505&code=990100


 

후손들에게

브레히트

 

1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없는 이마는

무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웃는 사람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을 따름이다.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곧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한 침묵을 내포하므로

거의 범죄나 다름없으니,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저기 천천히 길을 건너가는 사람은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이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물론, 나는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나의 행운이 다하면, 나도 그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셔라! 네가 그럴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느냐?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무엇이 현명한 것인지 씌어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기어들지 말고 덧없는 세월을

두려움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없이 지내고

악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2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폭동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로 와서

그들과 함께 나는 분노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눕고

되는대로 사랑을 하고

참을성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언어는 살륙자에게 나를 드러나게 하였다.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더욱 편안하게 살았고, 그러기를 나도 바랬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너무 약했다. 목표는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비록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보였었다.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3

우리가 잠겨 버린 밀물로부터

떠올라오게 될 너희들은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생각해다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우리는 살아오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었지만

우리 스스로가 친절하지 못했단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정도까지 되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

(1934/38년)

2012. 11. 12. 01:17

 

 

* <서칭 포 슈가맨>을 보실 분들은 읽지마셔요!

 

써야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있던 그 순간을 흘러보내고 싶지 않았다.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을 보고 사람들과 함께 한 점심시간엔 자연스럽게 영화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먼지가 <서칭 포 슈가맨>에 대해서 말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않았던 미국의 가수 로드리게즈, 우연히 그의 노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흘러가 엄청난 인기를 끈다. 당사자 로드리게즈는 그 사실을 몰랐고, 그의 노래에 열광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많은 사람들 또한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영화는 그렇게 모두가 몰랐던, 본인도 몰랐던 '서칭 포 로드리게즈'에 관한 영화라고 먼지는 설명한다. 그리고 먼지는 영화 중반부터 놀랄만한 반전과 감동이 펼쳐진다며 영화에 대한 기대를 마구 뿜어내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먼저 이 영화를 본 나은은 "이 사실도 모르고 보면 더 좋았을거야."라고 말하면서 그저 아무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서칭 포 슈가맨>은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가 명확하게 다른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반은 무대위에서 노래를 하다가 권총자살을 한, 혹은 분신자살을 했다는 소문만 가득한  전설의 가수 로드리게즈의 죽음을 뒤쫓는다. 그는 한마디로 수수께기인 것이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로드리게즈와 관련된 단서들,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영화 전반은 그렇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미스터리 다큐멘터리로 구성된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철썩같이 믿고 그의 '죽음'을 추적하던 과정 중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죽은줄로만 알았던 로드리게즈는 죽지않았고, 그는 40여년동안 디트로이트에 한집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로드리게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린 후 영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화가 되어 관객에게 다가간다.

 

로드리게즈를 찾은 이들은 로드리게즈에게 그의 노래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밥딜런의 노래보다 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 노래를 듣지 않고 청년기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로드리게즈를 남아프카공화국으로 초청하고 무대를 마련한다. 한순간에 인생이 바뀐 것일까? 고작 6장의 앨범을 팔았다. 그런데 대서양을 건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그의 앨범은 50만장이 넘게 팔리고 그는 국민가수로 칭송되고 있었다. 하지만 로드리게즈에게 그것은 중요하지않았다. 내가 무엇을 해냈다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그것을 인식조차하지 않았다. 로드리게즈는 '사실'을 덤덤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본인이 국민가수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않았다. 디트로이트에서 40년 넘게 거주하면서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그에게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제공되었다는 것을 그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는 시간의 순서대로, 그가 걸어가는 방향대로 삶이 흘러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민가수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가 뿌리박고 살아온 생이 무엇인지 잘아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자세인 것이었다. 로드리게즈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어, 살아있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가 만든 노래가 흘러나올때마다 카메라는 한 방향으로 구부정하게 느릿하게 걸어가는 로드리게즈의 걸음과 같은 속도로 나란히 걸어나간다. 그 흐름이 아마도 로드리게즈가 살아온 삶의 흐름을 말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서칭 포 슈가맨>의 감동은 바로 사람, 로드리게즈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사실의 반전이 아니라 그가 생에서 품어온 내공에서 오는 것이었다.

 

수수께끼는 그쪽으로 끌린다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한다.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그는 수수께끼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끌렸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위해 누군가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수수께끼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에 대해 성실히 임하는 '사람' 로드리게즈였다. 그렇기에 그는 세상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하지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로드리게즈에게 "왜 음악을 그만두었나?"라고 물었을 때 로드리게즈는 "더이상 잘 할 자신이 없기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한 이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고 답한 그는 지금의 생을 택한 것이다. 그의 선택에 따라 그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고자하는 이들에 의해 그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고, 노래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받게 된다. 그는 그 무대를 선택한다. 그리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 무대를 감사해한다. 이것이 로드리게즈가 겪은 사실이고 생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다시 몇 년이 흐른 뒤 영화로 만들어진다. 극장을 나오면서 영화 <서칭 포 슈가맨> 이후의 로드리게즈의 삶은 또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궁금해졌다.(-_-;) 어쩌면 그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불쑥 카메라가 그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들기를 요구한 것은 아닐까? 나 또한 불쑥 그의 삶을 들여다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혼란이 찾아왔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그의 노래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조심스럽게 감사해하며, 그가 세상에 내놓지 않은 노트 속 창작물을 가끔 열어보며 노래하고 노동하고 그렇게 일상을 건강하게 보내기를 바란다. 이 밤 그에게 안부를 전한다. "땡큐! 로드리게즈 아저씨, 건강히 지내셔요." 

 

 

 

 

+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로드리게즈의 'cause'라는 노래가 가장 인상깊었다. 반복해서 듣는 중이다. 그리고 영화 속 장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실제 공연장면을 찍은 홈비디오에서 관중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띠,띠디리,띠리리 베이스 소리가 반복해서 들리다 "I wonder"라고 그의 음성이 공연장에 가득 채워지고 동시에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나올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ㅠ

2012. 10. 9. 03:00

1.

부산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김이설의 소설 <환영>을 읽었다. 햇볕에 빨래가 빠짝 마르는 순간 같은 때가 살면서 얼마나 될까. 너무 좁아 섹스를 하다 몸을 기이하게 구길 수 밖에 고시원에서 옥탑으로 이사갈 때, 옥탑에서 방 2개 딸린 반지하로 이사 갈 때 느꼈던 그 빠짝한 감정을 느끼는 날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 날들이 나아진 날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아졌다고 믿고 싶은 환각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최선인지 최악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순간. 아니다. 판단하지 말자. 생이라는 것 버티면 못 버틸게 없는 게 생이고, 익숙해지면 못할 것이 없는 것이 생이다. 서영은 살고 있다. 죽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니까 사는 것이다. 서영은 살고 있다. 그저 살고 있음을, 하루하루 증명하는 서영 곁에 아무 말 없이 우직하니 서 있고 싶었다. 

 

'어느 겨울이든 그러하겠지만, 지난 겨울은 유난히 더 춥고, 지난했다. 진작 봄인데, 아직도 겨울의 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어느 계절이 되어도, 지난 겨울을 아파할 것이다. 그것의 나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 소설 <환영> 작가의 말 中에서 

 

작가의 말에 있는 이 구절이 박힌다. 그리고 공감을 한다. 헌데 나는 도리를 지키고 사는 사람인지 생각해본다. 그러하지 못한 것같다. 내가 지켜야 할 도리를 너무 쉽게 변명이라는, 자기정당화라는 봉투에 담아 잘도 내다버린다. 나는 좋은 사람인지, 도리를 지키는 사람인지 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 말뿐인, 순간만 있는 사람이고 싶지 않은데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일단은 삶에 충실해야하는데 그것이 어렵다. 너무도 어렵다.

 

2.

부산에서 3편의 영화를 봤다. <장군과 황새>라는 이탈리아 영화와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와 <온화한 일상>이라는 일본 영화 두 편을 봤다. <장군과 황새>를 보면서 얼마 전에 읽은 김혜리 기자의 인터뷰 글이 떠올랐다. 배우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묻는 후배들에게 인터뷰이 이병헌은 '철들지마라'란 말을 한다고 했다. 이병헌과 실비오 솔디니 감독은 '철들지 않았다.'라는 교집합을 가지고 있었다. '철들지않고 산다는 것' 그것은 창작의 원천이고, 예술의 시작이라는 것을 느꼈다. 철들지 않음으로부터 오는 실비오 솔디니 감독의 말랑이는 상상력과 위트가 좋았다. 특히 황새 아우구스티나와 교감하는 소년의 그 감수성이 좋았다. 그러한 감수성을 살면서 잃지 않고 유지하며 산다는 것은 감사한 일일 것이다.

어쩌다보니 일본영화, 그리고 3.11 이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게 되었다. <웃는 남자>를 보고 싶었는데 바로 코 앞에서 표가 매진되었다. 켄로치 감독의 영화를 볼까?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를 볼까? 고민하다 켄로치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든 보게 되지 않을까 싶어 제목이 매력적인 일본 영화를 택했다. 일본에서는 3.11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을 상당히 제작하고 있는 것같다. 지난 4월 여성영화제 때도 그렇고, 이번 부산 영화제에도 3.11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이 여러 편있었다.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를 보면서 여자 주인공이 해일로 뒤덮힌 마을의 잔재가 그대로인 해변가를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행위를 반복하는, 조깅 장면이 인상깊었다. 공통의 경험, 생을 뒤흔드는 천재지변의 트라우마를 겪어도 생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 위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오는 순간이 덧해지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이를 죽인 이를 사랑하게 되는 쉬이 받아들 수 없는 순간이 덧해지기도 한다. 답을 구하는 과정도, 시간도 없이 그저 덧하고 덧하고, 직면하고 직면하는 것이라고 후나하시 아츠시 감독은 말하고 있었다. 특히 감독은 다쿠미와 시오리의 '사랑'에 집중한다. 벚꽃은 망설임이라고 말하던 겐지, 망설이고 망설이다 어느 순간의 타이밍에 만개하는 벚꽃은 다쿠미와 시오리의 관계를 은유한다. 극장을 나오면서 내가 느끼는 이 어정쩡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생각했다. 영화제 프로그램북에 쓰여있는 영화 소개에는 '3.11'의 단어와 '사랑'이라는 언어가 동시에 쓰여 있었고 '3.11'쪽에 분명 부등호가 향해 있다고 나는 이해했는데 정작 영화는 '사랑'에 확실한 부등호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속은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정쩡하다고 느꼈다.

<온화한 일상>은 인터넷 예매를 성공한 영화다. 예매가 시작되고 한참 후에 예매를 했는데 다행히도 표가 있었다. 3.11 지진 이후 사람들이 가지는 공포와 불안함, 그 공포와 불안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드러내는 사람과 그 공포와 불안함을 애써 보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지진 이후 사에코는 딸 키요미가 방사능에 노출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방사능측정기를 가지고 키요미의 유치원을 찾아간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사에코가 불안을 조장한다며 그녀를 집단적으로 무시하고 매도한다. 지진 이후의 불안함과 관계의 일방적 폭력을 견디다 못한 사에코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사에코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유카코 역시 걱정과 불안으로 마스크 상자를 들고 무작정 집근처 어린이 집으로 찾아가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착용할 것을 요청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지진이 일어난 이후 마트엔 밥한끼 지을 수 있는 생수 한통조차 남아있지 않다. 지진지역에서 피난 온 이들에게 방사능을 몰고 왔다며 피난민의 차에 '돌아가라'라는 종이를 사람들은 붙인다.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무정함. 두렵지만 두렵다고 말하지 않는, 그러나 슬픔과 두려움이 결집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 영화는 집단적으로 겪는 엄청난 사건에 있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온화한 일상>의 필름엔 당시의 두려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온화한 일상>은 온화하지 못한 일상의 역설적 표현이다. 그리고 <온화한 일상>은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회피, 침묵에 대한 직설적 표현이다. 우치나노부테로 감독은 언제 또 이 공포의 순간이 또 닥쳐올지 모르지만, 여전히 두렵지만 그 순간이 왔을 때 있는 힘껏 "두렵다."라고 말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있을 것이라고. 그 손을 잡고 그 다음을 생각해보자고.  

 

3.

부산국제영화제를 몇 번 다니면서 '달맞이 고개'라는 곳을 처음 알았다. 미포항 근처에 있는 달맞이 고개. 달맞이 고개에 있는 해월정을 향해 걷다보면 광안대교와 해운대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뷰포인트를 만날 수 있다. 광안대교는 광안리 해변에 가야지만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해운대에서도 광안대교를 볼 수 있었다. 밤에 바라보는 광안대교는 예뻤다. 달맞이 고개는 이름 그대로 고개를 오르면 오를 수록 달에 점점 더 가까워져 정말 달을 마중하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달맞이 고개에서는 바라보는 풍경은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과는 다른 묘미를 전했다. 순간 제주에 온줄 알았다. 섬에서 바다를 보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넓고 푸른 바다와 끝없는 수평선을 볼 수 있다. 왜 몰랐을까. 걸으면서 "좋다. 좋다."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 길을 걷다보면 부산 해운대는 역시 부자 동네라는 것을 확실히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데 뭔가 기분이 찜찜했다.  

 

4.

2008년, 2010년, 2011년 그리고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2008년에 본 영화들 중에는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이 기억난다. 2010년에는 지아장커 감독의 <상해전기>를 비롯해 총 4편의 영화를 봤다. 2011년에도 분명 부산에 다녀왔는데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당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뭘 봤었지? ㅠ 정말 기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진짜 뭘 봤지? 영화를 본 것이 맞았던 것일까?

 

2011. 12. 18. 21:24
부제 :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불안도 계속된다. 그래서 나는 무섭다.

고래씨가 말한 최승자 시인의 시가 일고 싶어져 인터넷에 '최승자'라고 검색을 해봤다. 고래씨가 말한 시 제목을 '여리디 여린'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물 위에 씌어진>에는 그 제목의 시는 없었고 '한없이 여린'이라는 시가 있었다. 아마 이 시가 고래씨가 말한 시 제목인듯하다. 이 시가 너무 궁금하다. 내일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사무실 근처 서점에 다녀와야 겠다. 요즘에는 주말 중 하루는 아무것도 못하고 잠만 잔다. 잠만자고 일어나면 내 귀한 휴일 중에 반이 훌러덩 날라 간 것 같아 참으로 허무하다. 서울여성노동자조합원대회도 가보고 싶었고, 한미에프티에이 집회도 가야한다고 생각을 했고, 서울시청을 점거하며 온전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동무들이 있는 곳에도 다녀와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생각뿐 행동이 없는 한심한 놈이다. 그리고 오늘은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며 끊임없이 말하며 스트레스를 받으며 질질 끌끌 느림뱅이처럼 매달려 있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트레스만 받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 내게 물어본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될 것 같은데 이렇게 살고 있다. 마음도 없고 논리도 없고 생각도 없고 그냥 껍데기가 생을 유지하기 위해 탄수화물을 섭취하고 산소를 들이마시고 몸밖으로 이물질들을 배출하는 삶만을 연명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옴팡지게(?) 술을 마시고 알콜이 몸이 안좋을때보다 조금 잘 받는 것 같다며 술이 예전보다 받는 이유가 고기를 안먹어서 일까 생각을 하다 그제밤은 3,000cc 조금 안되는 술을 퍼먹고 쬐금 힘든데 어지러운데 어, 몸이 이상신호를 보내는 것인가 잠시 걱정을 했다. 스트레스와 압박 등으로 병에 걸려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내면 어떻게하지 조금 무서웠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살면 안되는데 생각하며 또 무서웠다. 그리고 영화 한편을 봤다.


멋있는 이완맥그리거와 <몽상가들>의 에바그린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퍼펙트센스>를 봤다. 나오는 주인공들이 좋아서 영화를 택했고 90분 조금 넘는 영화상영시간이 마음에 들어 이 영화를 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질병의 확산. 사람들은 조금씩 감각을 잃어 간다. 제일먼저 후각을 잃고 그다음으로 미각을 잃는다. 후각을 잃기전 인간은 한없는 슬픔에 잠기고 미각을 잃기전 인간은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고 차례로 청각을 잃고 시각을 잃는다. 감각을 잃기 전 인간은 순서대로 슬픔과 두려움, 허기, 분노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후각을 잃는 다는 것, 상대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냄새를 통해 떠오르는 추억을 더이상 떠올릴 수 없다. 미각을 잃은 후 그 어떤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어도 아무 맛도 느낄 수 없기에 그저 지방과 밀가루를 섭취하며 생을 유지한다. 청각을 잃은 후에 누군가가 곁에 다가와도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고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 말을 전해도 그 마음을 전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시각의 상실. 인간의 이러한 감각이 끊임없이 상실되어도 상실 후에도 사람들은 온전한 나머지 감각들에 의존하며 또 나름의 삶의 방안에 적응하고 계속해서 말한다. "Life goes on." "삶은 계속 된다."  라이프 고즈 온, 라이프 고즈 온 희망적 메시지이지만 라이프 고즈 온 이라는 그 말에만 매달려 생을 유지하기엔 산다는 것이 너무너무 무서울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그 말이 내게 그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할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요즘엔 사는 게 무섭다. 하루하루 아침을 맞이하고 눈을 뜨고 잠자기 전 눈을 감는 것이 무섭다. 내 생의 불안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2011. 10. 23. 00:10


매주 목요일마다 개봉영화 리스트가 업데이트 되면 '이 영화는 꼭 보고싶다.'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한편씩있다. 그중 하나가 소지섭, 한효주 주연의 <오직 그대만>이었다. 소지섭과 한효주는 영화 개봉시기 텔레비전, 잡지 인터뷰 등에서 한결같이 "가슴찡한 멜로를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괜시리 끌렸었다. '이 영화는 다른 욕심부리지 않고, 오로지 뭉근하게 멜로만을 담은 영화입니다, 멜로영화를 보고싶다면 <오직 그대만>을 보러 극장에 오십시요.'라고 말하는 것같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보고 싶었던 두번째 이유는 송일곤 감독의 영화이기때문이었다. 90년대 후반 단편영화 <간과 감자>, <소풍>으로 내게 각인되었던 사람, 그 이후 그의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되뇌었지만 제대로 본 영화가 한편이 없었다. 그리고 십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의 영화를 보게되었다. 그의 필모그래프를 보면서, 지금 현재 그간의 영화들과는 다른 <오직 그대만>을 그는 어떤 심정으로 만들었을까 궁금해졌다. 최근 그의 인터뷰 글을 챙겨봐야겠다.
 
영화는 전직복싱선수였던 남자와 시력을 잃은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한문장이 영화의 스토리를 그대로 말해준다. 이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는 개입되지 않고 영화는 소지섭과 한효주 두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 진행된다. 원래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울면 영화를 만든이들의 의도에 그대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픈장면이 나와도 이 악물고 울지않는 편인데 이번엔 속수무책으로 한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져나와 버렸다. 세상이 보이지 않는 여자 정화는 전직 복서인 철민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철민을 바라보며 아저씨를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눈을 뜨면 아저씨를 알아볼 것이라고 말한다. 철민은 정화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목숨을 건 격투경기에 참가하고, 철민의 희생으로 정화는 눈을 뜨게된다. 하지만 철민은 사고로 그녀에게 갈 수 없게 된다. 시력을 찾은 정화는 2년 후 우연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철민을 만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철민과 정화가 함께 기르던 개 '딩가'는 철민을 알아보지만 정화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알고있다. 그녀 앞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후진' 철민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녀를 등지고 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울긴했어도 영화를 보면 운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2011년, <오직 그대만>이 빛나는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작정하고 관객들을 울리는 멜로영화가 되겠다는 그 다짐때문이었다. 90년대 후반 한국영화는 멜로 영화의 판이었다. 내게 영화의 매력을 알려준 <접속>을 시작으로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 <약속>까지 '나 멜로영화다잉!'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이 줄지었고 특히 <접속>을 제외한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 <약속>은 '나 신파다잉!'이라고 말하며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를 두고 죽어야하는 운명을 가지고 관객들의 눈물, 콧물을 쏘옥 빼놓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조금은 다른 맥락으로 관객에게 접근하기는 하였다.) 그렇게 90년대 후반 멜로영화의 판이 이어지다가 한동안 '저는 눈물, 콧물 쏙 빼는 멜로영화입니다.'라고 말하는 영화는 드물었다. 십년이 훌쩍 지난 2011년 '나 멜로영화다잉!'이라고 말하는 <오직 그대만>이 반갑고 신선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아니 나는 눈물 쏙 빼는 멜로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직 그대만>이 빛나는 두번째 이유는 기존의 신파 멜로영화 공식과 달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결말때문이었다.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소지섭은 한효주의 눈을 뜨게하기 위해 격하게 싸우고 맞다가 결국 죽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고리타분한 나의 예상과 달리 정화와 철민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 장소에서 다시 재회한다. 정화는 "아저씨 나 다시 눈 뜨면 아저씨 얼굴만 보기로 했는데 왜 하루종일 내 얼굴만 보게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며 투정부리면서도 그를 다시 만난 것에 벅차 그를 바라보고, 철민은 그녀 앞에 다시는 설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눈앞에 그녀가 서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에 벅차 그녀를 바라본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끝을 '해피엔딩'으로 만들어 준 송일곤 감독에게 고마왔다. 그와 그녀가 다시 만나 그간의 그리움을 토로하고, 그 시간을 함께 위로할 수 있는 '앞으로'가 그들 앞에 있다는 것이 나는 고마왔다.

주말 오후 도심 한복판 울 준비를 하고 온 사람들로 가득찬 극장은 팝콘 씹는 소리와 떵떵거리는 광고 속에 썩인 사람들의 속삭임과 사람들의 체온으로 후끈했다. 극장을 찾은 사람들 중 나와같은 마음으로 온 사람들이 꽤 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영화를 보는 동안 누군가들의 훌쩍임이 괜시리 위로가 되었다.

+ 소지섭과 한효주는 적절한 캐스팅이었다. 두배우가 참 잘나고 이뻤고 두배우의 연기가 좋았다.
+ 아무리 영화라고 하지만 정화가 사는 집과 철민이 살았던 집의 보증금만 빼도 수술비 3,000만원은 거뜬히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한강을 조망권으로 둔 집의 전세값은 꽤 될텐데 말이다.
+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정화가 직장 상사의 성희롱으로 사표를 쓰게된다. 사표를 쓰는 정화를 보면서 사표를 쓰게되는 이땅의 또다른 그녀들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않았다.
+ 사표를 쓴 이후 정화가 다시 다른 일을 하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철민이 복싱(격투기)을 다시 시작하고 생수배달을 하는 것처럼, 정화도 또 다른 일을 하면서 철민과 알콩달콩 사랑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둘이 사랑에 빠지고 동거를 시작하면서 철민은 부양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정화는 집에서 살림을 전담하는 전업주부로 그려지는 것같아 영 탐탁지않았다.    
+ 정화와 철민이 서로 키스하는 장면에서 빛이 너무 과했던 것, 나는 그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감독님 이 연출은 너무 과했지요?     

                                                                                                          - 송일곤 감독 씨네21인터뷰

2011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진한 사랑이야기
개막작 <오직 그대만> 연출한 송일곤 감독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 <오직 그대만>은 전직 복서와 시각장애인 여성의 사랑이야기다. 캐릭터와 내용을 볼 것도 없이, 제목만으로도 통속과 상투 등의 단어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직 그대만>을 연출한 이는 <마법사들> <거미숲> <깃> 등을 통해 아예 실험적이거나, 상업영화 안에서 자기만의 기묘한 세계를 담아왔던 송일곤 감독이다. 개막작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은 그에게 주로 ‘의외의 선택’에 대한 질문들을 던졌다.

-영화의 전당 야외상영관에서 공식 상영되는 첫 영화다.
=어제 스텝들과 함께 사운드 테스트를 하면서 봤는데 매우 놀랐다. 이 공간이 한국영화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될 것 같다. 이런 곳에서 우리 영화가 처음 상영된다는 게 기분이 묘하더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영광이었다.

-<오직 그대만>은 전작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성격이 다른 작품이다.
=일단 도시를 배경으로 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친한 장현성이라는 배우가 조그만 주차박스에서 한 남자가 주차 관리원을 하고 한 여자가 드라마를 보기 위해 매일매일 주차박스를 찾는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아이템이 좋았던 게 주차박스라는 공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데 주차박스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또 하나의 출발은 찰리 채플린의 <시티라이트>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다. <오직 그대만>도 2011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사랑을 바치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이야기가 됐으면 했다.

-이야기는 통속적이지만, 진부한 통속성을 벗어나려한 연출이 눈에 띄었다. 시나리오를 쓸 때, 그리고 연출을 하는 과정에서 주안점을 둔 건 무엇이었나.
=일단 시나리오는 매우 짧은 시간에 썼다. 초고를 1주일 만에 썼으니까. 그런데 말 한대로 너무나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하더라. 고심한 끝에 무엇보다 장철민과 하정화라는 두 캐릭터의 진심이 관객에게 잘 전달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직 그대만>이 배우 의존도가 높은 영화가 된 게 그 때문이다. 훌륭한 조연들이 있지만, 소지섭과 한효주는 이 영화 속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끌고 간다. 이들이 안 나오는 장면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그때그때 순간의 진실한 감정을 담아야했고, 그래서 그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 가장 큰 중점을 두었다.

-<오직 그대만>은 사실상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맺는다. 이 전에 만들던 작품의 성격 때문에라도 이러한 결말이 과연 맨 처음 의도였을지 궁금해지더라.
=마지막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통속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도 시대에 맞게 변주되면서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감정으로 만드는 게 중요했다. 앞부분의 모든 장면들이 마지막 컷을 위해 달려가도록 대본을 썼고, 촬영했다.

-주인공의 직업과 공간 등에 담겨있는 사회적인 여러 단상이 눈에 띄었다.
=나로서는 인물들만큼이나 지금의 도시가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철민이 생수를 배달하는 일이나, 정화가 콜센터에서 일한다는 설정은 그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미지들이 배우의 뒤에 배치되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하는 감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진짜 중요한 감정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대 아닌가. 영화도 자극적인 영화만 나오고 있고,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게 극한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해오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온갖 욕망으로 점철된 도시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랑이란 감정도 먼 구세대의 소유물이 된 것 같다. 가장 보편적이고 단순한 감정의 이야기를 먼저 드러내고 싶었다. 이 영화의 감성이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유효할 수 있다고 본다.

-스스로 전작들과 비교하자면 <오직 그대만>은 어떤 의미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내가 아직은 젊은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일찍 시작했을 뿐이다. 그리고 처음 10년 정도는 내가 꿈꾸던 영화를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만들었다. 하지만 <오직 그대만>에도 내가 꿈꾸는 영화의 요소들은 모두 들어가 있다. 단지 스타일상의 변화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타일이 꼭 그리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무엇보다 장철민, 하정화란 캐릭터를 두 배우에게 이입시켜서 관객들에게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영화적인 스타일은 내용에 따라 어떻게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내 영화들이 조그만 공방에서 빚어낸 도자기 같은 작품이었다면, <오직 그대만>은 더 무게 있고, 더 크고, 더 손이 많이 간 작품일 거다.


 


+ <오직 그대만> 사진들을 보다가 재미있는 한장 발견, 한효주는 뒷모습만 보이고 한효주를 향해 바라보는 대중들의 얼굴엔 다들 미소가 가득이다. 흐흐흐- 연예인을 보는 즐거움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므흣하다. 사진을 클릭해서 크게 한 번 보세요. ㅎ 한효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소지섭이겠지? ㅋ
2011. 3. 16. 01:02



이윤기 감독 영화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여자, 정혜> <멋진 하루> 그의 전작들이 내게 전하는 뭉근한 여운들이 있었다. 조바심 내지 않고 인물들을 따라가는 힘을 이윤기 감독은 가지고 있었다. 감독의 전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힘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속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지만 말 그대로 '잔상'일뿐이라는 생각을, 극장을 나오면서 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가 가장 안타깝게 느낀 부분은 배우들 이었다. 임수정과 현빈이라는 화려한 캐스팅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만약에'라고 먼저 가정하게 되었다. 만약에 두 주인공이 현빈과 임수정이 아니었더라면. 카메라는 묵묵히 영화 속 주인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임수정과 현빈의 연기덕에 스크린 속엔 헤어지기로 결심한 두 남녀의 감정이 스며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만약에'라는 가정을 하였다. 만약에 두 주인공이 그렇게 잘 사는 편이 아니었더라면. 반듯한 세간살이가 갖춰진 집은 그/녀들의 감정을 공감할 수 없게 하는 방해 요소로 작용하였다. '아니 저 두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일을 하고, 얼마나 돈을 벌길래 저 연령대에 저런 집을 소유하고, 파스타 면 삶는 냄비와 같은 익숙지 않은 세간살이를 갖추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태생적으로 잘 사는 집 애들 일 것이야. 자수성가해서 저렇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야.'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동동 떠다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결혼 5년 차 부부, 외국으로 출장가는 여자를 공항으로 데려다 주는 길, 갑자기 여자가 말한다. "나 자기랑 그만 살래." 그말을 들은 남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몇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지만 남자는 화를 내지도, 이유를 묻지도 않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여자는 함께 살던 집을 나오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남자는 말없이 여자가 아끼던 그릇들을 정성스레 싸준다. 함께 살아온 시간에 비례하여 꼭 거창한 이별절차를 밟을 필요는 없겠지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두 주인공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적이다. 누군가는 영화 속 장면이 차 안에서 여자가 이별을 통보한 후 며칠이 지난 시점이니 표현되지 않은 며칠의 시간 속에 두 남녀는 충분히 격정적 감정을 표출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감독은 갇힌 공간 속의 두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속 두 남녀의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윤기 감독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의 이유에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이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두 사람을 보며 계속 왜, 왜, 왜!라고 묻게 된다. 이는 필연 영화를 보면서 아주 작은 마음의 요동도 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인듯하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보면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보고 <멋진 하루>를 다시 보았다. <멋진 하루>또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멋진 하루>가 보여주는 공간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공간은 어떻게 다를까? <멋진하루>가 보여주는 공간은 누구나 한번즘 스쳐 지나갔을 법한 열린 공간이다. 익숙한 서울 풍경, 익숙하기에 지나치고 갈법한 골목과 도로를 카메라는 상투적이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공간은 '누군가만의' 닫힌 공간이다. 서울의 외곽, 출판단지에 위치한 두 사람의 빌라 내부만을 영화는 담는다. 그리고 감독은 그 공간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고 조각조각 잘라 보여준다. 영화는 카메라 프레임이라는 갇힌 공간 속에 다시 벽과 가구로 공간을 나누고 그 안에 인물을 가둬둔다. 남자의 공간은 지하 1층 작업실이고, 2층은 남자와 여자의 공통 공간이고, 그 다음 층 서재는 여자의 공간이다. 두 남녀는 집이라는 하나의 전체 공간 안에 머물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뿐 두 사람이 동일한 공간에 그것도 동시에 함께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렇게 공간도 감정도 잘려진 그/녀들의 시간 속엔 계속 비가 내리고 영화는 잊을만하면 한번씩 햇빛이 가득한 온전한 공간을 보여준다. 한때 남자가 여자에게 만들어 주었던 강아지 인형이 놓여 있는 지하 작업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거나 티비를 보며 킥킥 웃었을 거실, 함께 요리 책을 보며 머리를 맞대고 있었을 서재를 영화는 인물을 배제시키고 보여준다. 한번씩 갑자기 등장하는 '햇빛 가득한 온전한 공간'은 '우리도 한때는 서로가 전부이고, 애틋한 시간이 있었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공간을 잘게 나누어 그 안에 인물을 가둬두고, 온전한 공간에선 인물을 배제시킨 감독은 영화의 막바지에 두 사람을 부엌이라는 같은 공간에 둔다. 남자의 후라이팬을 여자가 이어 받고, 후라이팬을 내준 남자는 자연스럽게 양파를 썬다. 지인은 이 장면을 보고 관계의 권태를 느끼고 결국 이혼을 결정한 부부가 지난 날의 익숨함으로 손발을 맞춰 척척 요리하는 장면이 찡하다고 하였다. 영화를 보기 전 이 장면에 대한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장면을 상상하니 나도 찡하였다. 하지만 영화를 직접 보고 극장을 나왔을 땐 '세팅된 욕망'만이 보여 지인이 전해준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나도 가끔 애인과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다. 나는 파스타 면을 전용으로 담아 두는 유리 용기에서 면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페트병 주둥이 부분을 잘라 파스타 봉지를 그 안에 그대로 담아 두고, 파스타면을 끓이는 전용 냄비에 면을 삶는 것이 아나라 노란색 양은 냄비에 면을 삶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에 면을 볶는 것이 아니라 국산 포도씨유에 면을 볶는다. 잘갖춰진 집에서 그럴듯한 세간살이를 두고 그 안에서 한 번즘 사랑을 나눠고픈 뭇 사람들의 '세팅된 욕망'을 영화는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누구나 한번즘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완벽하게 세팅된 공간에서 현실로 그려진 장면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진짜같지 않을 것을 진짜라고 말하는 것같아서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가 집에 불쑥 들어온 어린 고양이를 보며 "괜찮아. 괜찮아질거야."라고 하는 말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P.S_아래 박스에 담긴 영화 리뷰는 민우회 소모임 '작심삼일'의 '수풀'이 쓴 글이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에 대한 '수풀'의 글이 좋아 담아 왔다.

 자체발광의 현빈과 임수정이 나오는 것 만으로도 스크린이 흐뭇했던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신도림 CGV에서 같이 보았지요. 개봉 당일 이었던지라 사람이 꽤 붐볐습니다. 현빈이 나왔던 "만추"를 꽤 만족하며 봤던터라 이번 영화도 기대가 되었습니다. 다른 작삼 멤버들도 그랬던것 같구요. <여자, 정혜>, <멋진 하루>를 만든 감독의 전작들처럼 영화는 뭐랄까~ 대중성과는 조금 거리는 있었어요. 영화관의 관객들 중엔 보다가 나가는 관객도 있었고 따땃하니 나른해져서 잠을 청하는 관객도 있었어요.

5년차 부부가 이혼을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보내는 하루에 대한 영화였는데 고통스러울 정도의 침묵과 권태가 영화 내내 흐릅니다. 그 고통스러움 자체가 둘 사이의 불편함 그 자체를 표현한거겠죠. 하지만 권태로움에 이혼하는 부부가 암 말없이 손발 척척 맞춰가며 마지막 요리를 하는 장면은 맘이 좀 찡하더군요.

어쩌면 현빈과 임수정은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상대방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화 제목도 (나는) 사랑한다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인건 아닐지...엇갈린 두 사람의 마음이 영화에선 나오지 않는 마지막 밤을 통해 확인되었으면 참 좋겠네요.

2011. 2. 18. 03:06
자야한다는 압박을 가지고 있으면서 잠들지 못하고 컴퓨터를 켰다. 영화 <만추>를 보았다. 극장을 나오면서 B군과 영화에 관한 짧은 대화를 나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에 대해 잠시 생각 했다. 자고 일어나면 생각했던 것들이 다 잊어질까봐 몇자 끄적거린다.




남편을 살해하고 7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 애나는 엄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3일간 바깥세상에 머물게 된다. 정부의 남편으로 부터 쫓기고 있는 남자 훈은 미국에서 2년째 떠돌며 살고 있다. 애나의 전화벨이 울린다. 애나의 위치를 묻는 교도관의 전화다. 교도관은 애나에게 교도소로 돌아올 시간을 알린다. 훈의 전화벨이 울린다. 훈의 호스티스 동료는 훈의 위치를 묻고, 훈의 고객들은 훈에게 거래를 요구한다. 애나와 훈을 찾는 전화벨은 그/녀들의 위치를 틈틈이 묻지만 전화기 너머의 존재들은 그들의 진정한 존재가 궁금하지 않다. 단지 돌아올 시간을 고지하고, 조심할 것을 당부할 뿐이다. 존재하지만 타인들에게 의미로 '인지'되지 않는 유령같은 애나와 훈이 만났다.




애나에게 돈을 빌린 훈은 애나에게 자신의 시계를 주면서 돈 갚을 때까지 시계를 가지고 있으라고 한다.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하고 훈은 애나에게 질문한다. "몇시죠?" 시간을 묻는 대사는 "I need a time." 애나가 하고 싶은 말을 훈이 대신한다. "시간이 필요해요." 7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만을 소유하고 있는 애나와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쫓기는 훈에게 '시간'은 온전하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I need a time.")는 말이 절박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온전한 시간을 갖고 있지 않는 애나와 훈이 '시간'을 공유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안개낀 시애틀, 안개가 낀 시애틀은 안개때문에 시간을 알 수 없다. 해가 어디즘에 떴는지, 해가 어디즘으로 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시간대에 만난 애나와 훈은 시애틀의 낡은 모텔로 간다. 하지만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그/녀들에게 시간을 공유하기란 쉽지 않다. 모텔을 나와 오리버스를 타고, 범퍼카를 타고, 갑자기 '마켓'으로 향해 달려간다. 살아가면서 어쩌면 우연히라도 만날 수 없는 두 존재가 만나 그렇게 시간을 달린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간이 공유되는 '퍼블릭마켓'의 밤은 조용하다. 마켓에서 애나는 중국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훈은 중국어라곤 '하오'(좋아)와 애나에게서 방금 배운 '화이'(좋지않아)라는 단 두마디만 안다. 하지만 시간을 공유하기 시작한 애나와 훈은 소통하기 시작한다. 당사자인 애나와 훈은 소통을 직접적으로 바로 깨닫진 못하지만 관객들은 그/녀들의 소통을 먼저 보고 듣는다. 그러나 무수한 사람들의 시간이 공유되는 '퍼블릭 마켓'에 애나와 훈은 존재하고 있지만 마켓에서 유령체험을 하고 있던 타인들에게 애나와 훈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보일뿐이다. 애나와 훈은 관객들에겐 의미로 '인지'되고 있지만, 영화 속 타자들에겐 아직 '유령'으로 존재한다. 묻혀있던 애나의 표정이 드러나듯이, 영화 속 타자들에겐 아직 묻혀 있는 애나와 훈이 시간을 공유하면서 관객들에게 드러난다.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 애나와 훈은 시애틀의 거리를 걷는다. 훈에게 전화가 온다. 그의 고객 옥자이다. 훈은 낡은 모텔앞에서 애나에게 이곳에서 30분만 기다리라고 한다. 기다리지 않을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기다리라고 한다. 홀로 남겨진 애나는 시간을 공유하기 버거워했던 공간인 낡은 모텔에서 훈을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애나는 그 공간을 처음 찾았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구겨져 있는 스탠드, 누군가의 주먹 혹은 머리로 인해 부서진 문을 애나는 바라본다.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공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간에 남긴, 시간을 공유한 흔적을 보며 애나는 그것이 자신에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훈의 시계를 낡은 모텔의 침대위에 두고 애나는 훈을 기다리기를 그만둔다. 

그렇게 애나는 시간을 공유하는 과정을 포기하고 도망간다. 그러나 훈은 하얀 꽃바구니를 안고 애나 엄마의 장례식장을 찾는다. 애나 훈, 애나의 옛 연인인 왕칭과 그의 아내가 한 테이블에 앉는다. 훈은 뭔지 잘 모르지만 '퍼블릭 마켓'에서 경험한 애나와의 소통을 기반으로 왕칭에게 감정을 쏟아내고 그 감정을 애나가 이어 받아 과거에 쏟아 내지 못한 묵은 감정을 왕칭에게 쏟아 낸다. 애나와 훈은 다시 시간을 공유한다.




하지만 애나의 시간은 얼마남지 않았다. 애나는 교도소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훈과 작별인사를 한다. 바이바이 인사를 몇번을 거듭하고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애나곁에 훈이 다시 찾아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훈이라고 합니다." 애나와 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애나가 교도소로 돌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나눈다. 처음 만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안개때문에 운행을 할 수 없는 버스는 휴게소에 잠시 멈춘다. "I need a time"이라고 말하며 시간을 간절히 원했던 휴게소에서, 이제 두 사람은 시간을 공유한 과정을 머리와 가슴에 안고 휴게소에 존재한다. 한계적 시간을 가지고 있었던 애나와 훈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시간을 확장시키고, 시간을 공유한 흔적을 '휴게소'라는 공간에 남기면서 함께 했던 시간을 그곳에 정지시킨다. 이제 그녀들의 시간은 공간에 머물면서 온전하게 된다. 어느 사람들처럼.

+ 영화를 보고 글을 썼다. 그리고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씨네21을 봤다. 씨네21 강병진 기자가 쓴 글을 보면서 놀랐다. 그가 포착한 장면과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내가 포착한 장면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닮아있었기에. 강병진 기자는 <만추>를 보고 '소통의 기적에 이르는 과정'에 집중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나는 <만추>를 '시간을 공유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말했다.

+ 씨네21 강변진 기자의 글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2001001&article_id=64888
(온라인 씨네21에 강병진 기자의 <만추>에 대한 긴 글과 김태용 감독의 인터뷰 글이 올라오면 그것도 함께 링크해야겠다.) 

    
2010. 10. 13. 00:40
부산영화제가 올해로 15번째를 맞았다고 한다. 오랜시간동안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부산영화제가 괜시리 자랑스러웠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나중에 꼭 부산에 가야지!"라고 마음먹곤 했었고, 가난한 시절(지금도 가난하지만)엔 부천극제판타스틱영화제를 다녀오며 대리만족했었다.  08년에 이어 올해 다행히도 다시 방문하게 된 부산, 반가왔다! 안녕! 부산. :)




올해는 총 5편의 영화를 봤다. 첫번째 영화는 바람이 나를 데려다 주리라(Let the Wind Carry Me) 대만의 거장 촬영감독 리핀빙의 카메라를 관찰하는 다큐멘터리였다. 허우 샤오시엔과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리핀빙 촬영감독의 카메라를 또 다른 카메라가 관찰한다는 설정이 매우 흥미로왔다. 하지만 영화는 스크린 밖의 풍경을, 리핀빙 촬영감독의 철학을 면밀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소중한 존재는 가족이다.'라는 지나치게 강렬한 메시지가 마치 계몽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전했다.  




두번째 영화는 여름이 없었던 해(Year Whiout a Summer) 말레이사아를 대표하는 여성감독 탄추무이의 신작. 여성감독의 영화라는 말에 기대가 상당히 컸다. 기대가 크면 실망감도 클까? 힘이 지나치게 들어간 예술영화는 힘들다. 영화 속 밀림 풍경과 영화 속 설화(인어이야기)는 아핏차퐁위라세타쿤 엉클분미를 연상케 했다. 두 영화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름이 없었던 해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까? 그래도 여름이 없었던 해 덕분에 엉클분미를 다시 봐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게 된다. 




세번째 영화는 지아장커 감독의 상해전기(I wish I Knew) 극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극영화적 연출이 존재하는 다큐멘터리라고 불러도 될까? 이번 영화를 보면서 지아장커 감독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상하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이 모인 상하이. 상하이를 보면서 괜시리 통영이 떠올랐다. 




네번째 영화는 플랑드르의 아기 예수(Little Baby Jesus of Flandr). 대단한 씨네필들의 활약은 영화 예매 행위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어찌나 모두들 재빠른지, 보고싶은 영화를 예매하지 못하고 선택하게 된 영화가 플랑드르의 아기예수였다. 영화 정보가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 선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중의 하나가 영화제목이다. 그런데 플랑드르의 아기예수는 제목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래서 솔직히 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크기의 스크린에 담긴 동유럽의 겨울 풍경 그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할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이번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예수의 탄생 그리고 신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 악마의 유혹에 현혹되는 사람.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나는 이 영화를 서술한다. 그래도 될까?




다섯번째 영화는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장률 감독의 두만강(Dooman River)이었다. 영화를 보고 감독이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현실을 징그러울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감독이 무서웠다. 아니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어쩌면 그는 극적인 연출 즉 영화적 서술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보면서 지금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이야기만은 제발 영화속에 등장하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영화는 한 여성의 성폭력피해와 그로 인한 임신을 영화속에 등장시켰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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