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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 17:39

 

 

이 영화의 원제는 <Bonsai>, 한국말로 번역하면 '분재'다. 영화를 수입하면서 영화는 다시 <훌리오와 에밀리아>로 번역되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영화 제목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첫인상'이기에 내심 재해석 혹은 상업적 이용에 의해 영화 제목이 가급적 바뀌지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훌리오와 에밀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지만 감독은 훌리오와 에밀리아를 빌어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고, <훌리오와 에밀리아>로 번역된 영화제목은 관객들을 그 안에 가둬버리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감독 크리스티안 히메네즈는 '자연'을 좋아하고, '문학'과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 속에 머물고, 나란히 누워 문학 작품들을 읽고, 거의 매일밤 사랑을 나누는 이가 '한 때' 곁에 있었다는 것을 감독은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이 단지 '한 때'가 아니라 그가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그리고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영화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장은 프루스트로 시작한다. 2장은 피(8년 후), 3장은 몸(8년 전), 4장은 다시 8년 후(4장의 소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6장의 소제목도 불확실하다.), 5장은 탄탈리아(8년 전), 6장은 분재(8년후)로 시간이 구성되고 교차된다. 1장을 제외하고는 소제목 아래에 '8년 전' 또는 '8년 후'라고 시간도 함께 기록된다. 소제목 아래의 시간 표시를 보면서 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8년 전'이라고 하면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를 말하는 것이고, '8년 후'라고 하면 '8년 전'을 기준으로 시간이 지난 미래의 '8년 후'로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화자는 두 개의 시간영역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사랑을 나누고, 이별하고, 다시 고독과 외로움을 견디다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그 과정들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감독은 소제목 아래의 시간 표시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책들과 훌리오와 에밀리아가 머물렀던 공원과 노닐었던 나무, 강(江) 즉 자연의 풍경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분재도. 감독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이고, 자연을 좋아하는 이라는 것을 영화에서 느껴졌다. 우디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을 알게되었다. 그책이 7권이나 된다는 것과 그 책을 다 읽는 것은 보통 작업이 아니라는 것은 고래씨를 통해 알게되었다. 영화 시작에 교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사람?"이라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영화 중반에 훌리오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장을 에밀리아에게 읽어주고, 영화 마지막에 훌리오가 읽었던 그 구절이 다시 한 번 나레이션으로 등장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때로는 촛불을 끄자마자 즉시 눈이 감겨서 '잠드는 구나'하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 시간 후, 잠이 들었어야 할 시각이라는 생각에 깨어난다. 아직 손에 들고 있으려니 여기는 책을 놓으려고 하며, 촛불을 불어 끄려고 한다.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에 대한 회상은 깜박한 사이에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회상은 야릇한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섯

 

그리고 후에 나오는 책들은 제임스 엘로이의 <아메리칸 타블로이드>,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조류쥬 페렉의 <잠든 남자>,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등 처음 들어보는 낯선 책들도 있었고 익숙한 책도 있었다. 그동안 감독이 접했을 책들, 감독 자신의 경험과 연관할 수 있는 책들, 칠레의 상황을 말 할 수 있는 책들 등 감독은 문학이라는 코드를 통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책과 더불어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자연과 분재였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공원의 숲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훌리오는 에밀리아에게 네잎 클로버 화분을 선물하고, 그리고 그는 8년 후 에밀리아의 부고를 듣고 분재를 가꾼다. 그리고 훌리아는 분재를 가꾸며 이런말을 한다. "화분에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궁극적으로 둘은 모두 자연이다." 영화를 보면서 문학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감독의 호(好)가 보였다. 그리고 분재라는 소재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이 독특하였다. 분재는 어찌보면 자연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이와 연결하여 문학은 세계에 대한 모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모방은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흠모가 없다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감독은 그렇게 자신을 '사랑' '문학' '식물학'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사랑을, 그를 둘러싼 문학과 식물학을 다시 한 번 소상히 회상하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말하는 것같았다. 영화 <훌리오와 에밀리아>를 통해 크리스티안 히메네즈라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사람이 보이는 영화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보이는 영화다.

 

+ 훌리오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가 일하는 서점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벽면 전체에 책이 빼곡히 꽂혀있다. 세상에는 읽어야 하는 책들 혹은 읽을 수 있는 책들 또는 읽고 싶은 책들이 수없이 많고, 책은 끊임없이 만들어질텐데 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그 책들을 만족할 정도로 읽다가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져야할텐데. 이 게으름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책만 보면 쏟아지는 잠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걱정만 잠시 늘어 놓는다. 영화도 그러할텐데. 세상엔 읽어야 하는 책과 보아야 하는 영화가 무한하다. 내게 딱 1년 정도 영화보고, 책보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재력이 있으면 좋겠다. ㅎ 그러고 나면 1년보다 더 긴 시간이 욕심나겠지. 틈틈이 애써봐야겠다.

 

 

+ 일요일 조조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니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 인파 속에서 생각을 했다. '나도 문학과 영화와 자연을 좋아하는 이를 만나 그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다.' 훌리오가 소설가 가즈무리를 만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리 위에는 하얀색 화살표가 계속 따라 다녔다. 인파 속에 "나, 훌리오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도 그 많은 인파들 속에서 머리 위에 화살표를 달고 "나 여기 있어요!"라고 내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여튼 그 장면이 재미있었다. 감독은 왜 유독 그 장면에 머리위 화살표를  붙여 놓은 걸까?

 

 

+ 칠레 영화를 처음 봤다. 얼마전 이태원 산책을 하면서 지리부도를 갖고 싶었다. 칠레 영화를 보고 나니 칠레의 위치와 그 주변의 나라들이 궁금해졌다. 세계지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문학과 식물학, 영화만큼 지리학도 매력적인 공부일 것 같다. 영화 포스터 아래 사랑, 문학, 식물학이라는 세가지 테마가 쓰여있다.(무비꼴라쥬 시네마톡 후기에서 정보를 얻었다.)

 

+ 트리플 불안님의 블로그 : 아트톡 <훌리오와 에밀리아> with 한창호 평론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icskan&logNo=90151101422

 

+ 낯선 나라의 말, 혹은 "고대의 말 라틴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시간과 교감하는 것이다."라는 훌리오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 칠레 영화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유럽감수성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