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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해당되는 글 18건
2010. 10. 13. 00:40
부산영화제가 올해로 15번째를 맞았다고 한다. 오랜시간동안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부산영화제가 괜시리 자랑스러웠다.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나중에 꼭 부산에 가야지!"라고 마음먹곤 했었고, 가난한 시절(지금도 가난하지만)엔 부천극제판타스틱영화제를 다녀오며 대리만족했었다.  08년에 이어 올해 다행히도 다시 방문하게 된 부산, 반가왔다! 안녕! 부산. :)




올해는 총 5편의 영화를 봤다. 첫번째 영화는 바람이 나를 데려다 주리라(Let the Wind Carry Me) 대만의 거장 촬영감독 리핀빙의 카메라를 관찰하는 다큐멘터리였다. 허우 샤오시엔과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리핀빙 촬영감독의 카메라를 또 다른 카메라가 관찰한다는 설정이 매우 흥미로왔다. 하지만 영화는 스크린 밖의 풍경을, 리핀빙 촬영감독의 철학을 면밀하게 담아내지 못했다.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소중한 존재는 가족이다.'라는 지나치게 강렬한 메시지가 마치 계몽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전했다.  




두번째 영화는 여름이 없었던 해(Year Whiout a Summer) 말레이사아를 대표하는 여성감독 탄추무이의 신작. 여성감독의 영화라는 말에 기대가 상당히 컸다. 기대가 크면 실망감도 클까? 힘이 지나치게 들어간 예술영화는 힘들다. 영화 속 밀림 풍경과 영화 속 설화(인어이야기)는 아핏차퐁위라세타쿤 엉클분미를 연상케 했다. 두 영화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름이 없었던 해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까? 그래도 여름이 없었던 해 덕분에 엉클분미를 다시 봐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게 된다. 




세번째 영화는 지아장커 감독의 상해전기(I wish I Knew) 극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극영화적 연출이 존재하는 다큐멘터리라고 불러도 될까? 이번 영화를 보면서 지아장커 감독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상하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이 모인 상하이. 상하이를 보면서 괜시리 통영이 떠올랐다. 




네번째 영화는 플랑드르의 아기 예수(Little Baby Jesus of Flandr). 대단한 씨네필들의 활약은 영화 예매 행위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어찌나 모두들 재빠른지, 보고싶은 영화를 예매하지 못하고 선택하게 된 영화가 플랑드르의 아기예수였다. 영화 정보가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 선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중의 하나가 영화제목이다. 그런데 플랑드르의 아기예수는 제목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래서 솔직히 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크기의 스크린에 담긴 동유럽의 겨울 풍경 그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할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이번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예수의 탄생 그리고 신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 악마의 유혹에 현혹되는 사람.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나는 이 영화를 서술한다. 그래도 될까?




다섯번째 영화는 나를 가장 힘들게 한 장률 감독의 두만강(Dooman River)이었다. 영화를 보고 감독이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현실을 징그러울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감독이 무서웠다. 아니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어쩌면 그는 극적인 연출 즉 영화적 서술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보면서 지금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이야기만은 제발 영화속에 등장하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영화는 한 여성의 성폭력피해와 그로 인한 임신을 영화속에 등장시켰다. 젠장!

2010. 9. 24. 16:31
나는 왜 지브리스튜디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지브리스튜디오의 영화를 잘 모르지만 좋아한다. 나는 왜 지브리스튜디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첫째 지브리스튜디오의 그림은 정교하다. 3D 애니메이션이 나오면서 그림이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 진짜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세상이지만 평면의 그림을 고집하면서 선 안에 고운 빛깔로 채운 섬세한 지브리스튜디오의 그림이 좋다. 상상력을 안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를 전하는 지브리스튜디오가 좋다. 한편의 그림 동화처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해서 좋다. 마지막으로 그림의 숨결을 더욱 생생하게 불어넣는 공들인 음악이 함께 담겨 있어서 좋다.

소인, 아리에티를 만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소인이 나오는 만화, 그림, 영화가 무작정 좋았다. 티비 만화 시리즈 '아기공룡 둘리'에서 둘리가 소인이 된 장면에 혼자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영화 "애들이 줄었어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이상한 약을 먹고 줄어드는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 상상했다. 내가 만약에 소인이 된다면? 내 몸에 꼭 맞던 침대가, 의자가 엄청난 크기로 변해있는 풍경, 밥한톨이면 충분히 한끼 식사가 될 수 있는 상황, 아주 작은 개미의 등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상상 등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그 생경함이 좋았다. 소인이 된다면 익숙한 공간이 새로운 모험이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좋았다. 그래서 영화관에서 소인 아리에티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세상에 어떤 인류집단이 얼마나 살아가고 있을까?

살면서 내가 접하고 느끼고 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시공간'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믿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마루 밑 아리에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마루 밑 아리에티'에는 세가지 인류 집단이 등장한다. 대인집단, 쇼우. 대인집단의 물건을 빌려쓰는 소인집단 아리에티. 소인집단 중 원시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스필러. 쇼우는 어딘가에 소인이 살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 듣고, 어린 시절 엄마가 지내던 집에서 소인 아리에티를 만난다. 본인이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소인종이라고 믿었던 아리에티는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니는 소인집단 스필러를 만난다. 이렇듯 지구에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인류집단이 제각각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들꽃이 만발한 여름날 외할머니의 정원에서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말한다. "65억명의 인간이 이 지구에 살고 있어. 너희 종족...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결국 너하나 남고 모두 멸종할꺼야." 세상에 놀랄일 하나 없는 어른아이 쇼우이지만 쇼우의 이런 대사를 접했을 때 나는 흠짓 놀랐다. 지구에 남아 있는 최고의(?) 인류집단이라고 각자 생각하고 있는 인간의 오만한 사고를 감독은 쇼우의 입을 빌려 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쇼우의 가족은 소인들을 위해 영국에서 주문제작한 '돌하우스(doll hosse)'를 집 한 켠에 두고 언젠가 소인들에게 이 집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리에티의 존재를 알게 된 쇼우는 마루를 뜯고 대인 세계에서 빌려온 물건들로 만들어진 호밀리(엄마)의 부엌을 들어내고 돌하우스의 멋진 부엌을 가져다 놓는다. 그때 쇼우는 알고 있었을까? 마루가 갑자기 뜯기면서 발생하는 진동과 엄청난 굉음이 전했을 공포를. 일방이 일방에게 베푸는 배려가 순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러한 현상은 아리에티와 스필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이 발생한다. 새로운 집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다리를 다친 포드(아빠)는 원시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스필러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도움을 준 스필러에게 아리에티는 감사의 표현으로 차(茶)와 대인에게서 빌려온 쿠키를 빻아서 만든 빵을 권한다. 하지만 스필러는 그러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는 그의 망또 안에서 귀뚜라미 다리를 보이며 이것이면 충분하다 말한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엔딩을 생각한다. 아리에티와 쇼우의 강렬한 사랑을 상상한 누군가는 심심한 결말에 무언가 부족하다 말할 것이고, 아리에티가 쇼우의 할아버지가 주문제작한 멋진 '돌하우스'에서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누군가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극장을 나섰을 것이다. 만약 아리에티가 정말 그 '돌하우스'에서 살았다면?, 상상을 해본다. 아리에티는 호사스러운 '돌하우스'에서 사는 대신 그녀에게 몇천배, 몇만배는 더 크게 들리는 시계소리와 대인의 발자국 소리 등등을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돌하우스'에서 사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면서 살아지는(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어찌보면 심심했을 그 엔딩이 나는 소중하다. 쇼우의 가족이 소인에게 관용을 베푸는 대인이라고 하여도 그 관용은 대인의 위치에서 베푸는 관용이기에 대인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아리에티는 분명 참고 견뎌야 했을 것이다. 보리수 잎을 따다 엄마에게 선물하고 향기로운 풀로 가득히 방을 꾸미고 필요한 만큼 대인이 모르게 물건을 빌려 쓰는, 그 나름의 빛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영화의 엔딩이 나는 소중하다.  


2010. 9. 13. 00:53
임권택 감독에 대한 기억은 부천으로 거슬러 간다. 부천 영화제에서 그를 뵈었고 조심스레 다가가서 싸인을 부탁드렸다. 10년전즘의 일이다. 당시 내가 만났던 그는 '유명 영화감독=연예인' 정도였다. 그리고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생을 살아오면서 100편의 영화를 만든 사람. 장인이라고 칭해지는 그. 어린시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아제아제바라아제, 만다라, 아다다, 서편제' 내게 몇몇 이미지로만 각인 되어있던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필름으로 보았다.


첫번째, 임권택 짝코(1980)



첫번째 영화는 '짝코'였다. 1980년에 만들어진 짝코. 제목이 독특했다. 짝코라고 칭해지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 빨치산 이야기라는 정보만을 접하고 본 영화 속에서 나는 그가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를 느꼈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플래시백은 억지스러움 없이 정교했고, 보통의 감독들은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시간'을 그는 필름 속에 생생하게 담았다.



영화 짝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영화 속 인물들은 아주 빠르게 움직이지만 한편으로는 긴 호흡으로, 아주 정밀하게 표현 된 인물들-장면이 분출하는 에너지에 놀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놀랐다.

두번째, 임권택 안개마을(1982)


원래의 계획은 짝코를 보고 종로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나는 여전히 영화관에 머물렀다. 두번째 영화는 안개마을, '촬영의 수려함'을 보았다. 배우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고, 카메라 속에 담긴 마을이, 풍경이 영화가 뿜어내야 할 스산한 기운을 그대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영화가 뿜어내는 스산함과 괴기함과는 다른 임권택 감독의 귀여운 실험을 보았다. 주인공 수옥이 기차역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80년대 디스코풍 음악을 배경으로 약혼자를 기다리는 장면은 마치 90년대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도 물레방앗간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물레방앗간 사건 이후 표현된 수옥은 정말 수옥일까? 물레방앗간 사건 이후의 수옥은 임권택에 의해 만들어진 수옥일까?

세번째, 임권택 취화선(2002)


정성일 영화 평론가는 취화선을 "예술에 대한 임권택 감독 본인의 가치가 고스란히 담긴 영화이다."라고 표현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영화는 임권택 감독 본인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림은 그림이다."라는 말이 절로 내 안에서 맴돌았다. 그 어떠한 것에도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어떤 환쟁이의 그림을 임권택 감독은 아름답고 훌륭한 수식으로 칭하는 것보다 "그림은 그림이다. 이 그림은 장승업의 그림이다. 장승업은 그림이다. 그림은 장승업이다."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영화는 영화다. 이 영화는 임권택의 영화이다. 임권택은 영화이다. 영화는 임권택이다."   

지금 현재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를 보고 느낀 단편적인 감상들뿐, 임권택 그는 내가 진중한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알아가야 할 장인이다. 그는 100편의 영화 안에 제각각 100명의 임권택을 품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오늘 세명의 임권택을 만났다.


2010. 8. 31. 23:25


영화 소라닌을 봤다. 그에게서 이 영화가 개봉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잊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했다. 종종 그는 내게 만화책을 선물한다. 그 중 하나가 소라닌이었다. 그림이 참 좋았다. 인물들이 생생해서 좋았다. 무엇보다 스물(나이는 중요치 않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막연히 설렌 '청춘(靑春)'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좋았다. 그래서 읽고 또 읽었던 소라닌.

영화를 보기전 만화 소라닌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극장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는데 그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놀랐다. 등장하는 배우 전원이 만화 속 인물들과 싱크로율 100%까지는 아니여도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주인공 다네다는 절대 닮지 않았지만, 메이코의 악동스러운(?) 발랄함이 영화 속에서는 덜하지만, 그럭저럭 닮은 빌리와 만화가 아사노 이니오가 "이 배우를 염두하고 만화를 그린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이 들 정도 똑같은 가토는 영화를 보는 내내 신기했다.)과 최대한 원작과 일치하도록 장면을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감독은 아사노 이니오 만화 그대로를 영화 콘티로 삼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 속 대사에서 부터 등장 인물의 의상, 만화 컷선에 따른 편집까지 원작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한 흔적이 느껴졌다. 헌데 한 편으로는 이럴바에는 왜 영화로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한 장 한 장 넘기며 여운을 씹을 수 있는 만화와 달리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하다보니 오히려 평면적인 느낌이 강했다. 원작이 품고 있는 에너지를 영화가 다 품지는 못했지만 원작의 매력을 닮으려고 하는 노력에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사노 이니오의 위대함을 느낀다. 만화가 아사노 이니오의 장면 연출은 참으로 디테일하다. 만화 속 등장인물의 표정, 의상, 감정의 디테일과 함께 인물을 둘러싼 주변 환경, 사람에 대한 표현이 참으로 놀랍다. 예를 들어 다네다와 메이코가 2DK 작은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에서 휴지통에 휴지뭉치를 버리는 다네다, 널부러진 옷가지, 옷가지 틈에서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침대 머리맡 빈 콘돔 껍질 등등. 장면 하나 하나를 곱씹어 보는 재미가 있고 볼 때 마다 몰랐던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아사노 이니오는 배경 묘사가 아주 세밀한 작가이다. 아마도 그는 그의 만화 속에 등장하는 배경들을 생산하기 위해 실제로 존재하는 배경을 찾고 그 배경을 사진에 담고 그 사진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아닐까? 만화 속 배경과 영화 속 배경, 장면의 일치가 더욱 그런 확신을 들게 하였다. 여하튼 영화 소라닌을 보면서 나는 만화 소라닌, 원작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 영화를 보고 잠시 들었던 생각.

갑작스럽게 다네다를 다른 세상으로 먼저 보낸 메이코는 다네다와 함께 살던 2DK를 정리하고 강건너 1DK로 이사를 한다. 그러면서 영화 속 메이코도 만화 속 메이코도 말을 한다.

"오늘 도쿄는 무척이나 화창한 날씨에 언제나처럼 오다큐 선이 달리고 타마강에선 연인들이 보트를 타며 노젓고 있었다. 오늘도 어디선가 전쟁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이 경치, 이 경치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소리 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설령 언젠가 이 경치를 볼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 해도 그때까지 모두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화 소라닌 메이코 독백 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인지 끊임없이 나의 오늘을 평가하며 하루하루 눈 뜨는 것이 두려운 요즘...메이코처럼 '하나의 의미'로 오늘 내곁에 벗들이 있기를 바란다. 동시에 나는 그 누군가에게 어떤 벗이 될 수 있을까. 메이코의 독백에서 나는 '사람이 삶이다.' '내 곁의 누군가가 나를 구성한.'라는 말을 연상한다. 오늘 밤 나는 "소라닌의 그녀처럼 충만함을 느끼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2010. 7. 8. 23:31



얼마전 보년과 약속을 했다. 김혜리 기자 인터뷰집 [진심의 탐닉]을 읽던 중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A4분량의 글을 쓴다는 말에 자극을 받은 보년과 나는 같이 본 영화에 대해 A4 반장이상의 글을 쓰기로 했다.

약속 이후 함께 본 첫번째 영화가 청설이다. 영화가 보고 싶었다. 씨네21을 뒤적거리다가 별점과 간단한 영화평이 쓰여 있는 페이지를 펼친다.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샤방하고 보송보송한 아해들이 침대에 엎어져서 아이컨택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청춘로맨스란다. 설레는 감정에 나도 덩달아 말랑해지고, 때로는 마음 아릿함을 영화를 통해 느끼고 싶었다. 기대와 달리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보송살랑아릿해지진 않았지만(요즘엔 영화를 봐도 특별한 감흥이 없다. 뭐가 좋은지도 잘 모르겠고, 뭐가 싫은지도 파악이 안되는 '그저 영화를 봤다.' 정도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샤방한 모습에 마음이 므흣했다. 영화를 보면서 "허허-나도 그땐그랬지 라며" 추억을 곱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헌데 그 이쁘고 샤방한 여주인공은 초동안 배우였다. 그땐그랬지 라고 말하기엔. 그녀는 엄청나게 근접하게 나와 시대를 함께 경험하고 있다. 배우 이야기만하면서 A4 반장 분량을 한 번 채워볼까? 허허허-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자매가 있다. 가슴 두근한 연애 이야기보다 나는 두 자매 이야기에 먼저 눈이 갔다. 샤오펑은 청각장애인 수영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양양은 그런 언니가 있는 수영장에 가서 언니를 응원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우연한 사고로 샤오펑은 올림픽 출전이 어려워지고, 샤오펑의 사고가 자기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양양은 티엔커와의 달콤한 연애도 멀리한다. 사고 이후 울면서 수화로 나누는 두 자매 장면이 인상깊었다. 말을 잠시 옮기면 


샤오펑: 넌 내 꿈에만 관심이 있지. 니 꿈은?
양양: 뭐라고?
샤오펑: 넌 매일 날 위해 살잖아. 지겹지 않니?
양양: 무슨 소리야 언니 꿈이 내 꿈인데
샤오펑: 넌 왜 내 꿈을 훔치려고 하니?
양양: 훔쳐?
샤오펑: 너는 너야. 나는 나고. 왜 내 꿈이 니 꿈이야? 평생 다른 사람한테 기대 살 순 없잖아. 내가 듣지 못해도 내 인생은 있는거야.

이 장면에서 뭔가 멍해졌다. 두 자매의 관계에서 누군가와 누군가의 관계가 오버랩되었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라는 관계가 형성되면 대게 '돌보는 자'는 자기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에 집중하며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니가 되고 니가 내가 되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뿐만 아니라 연애 관계에서도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로 관계가 형성되면 하나의 존재는 상실된다. 누군가를 '돌보는 자'는 지극 정성으로 그 사람을 위해 살아가지만, '돌보는 대상'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 곁을 떠나면 지극 정성으로 돌봄을 하고 있던 그때 당시의 나는 어디에 있었는지 내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올해 올림픽 출전은 어렵지만 4년 뒤 올림픽에선 나는 꼭 내 꿈을 실현하겠다. 그러니 너도 니꿈을 찾고 살아라!" 라고 말하는 샤오펑이 예뻤다. 

언니의 꿈이 내 꿈이고, 내 꿈이 언니꿈이다 생각하며 언니만 바라보고 살았왔던 양양은 언니의 충격적(?) 발언 후에 어떤 선택을 할까? 샤오펑이 4년 뒤 올림픽을 약속했다면 양양은 잠시 멀리했던티엔커와 본격 연애를 하기로 한다. 양양은 예쁘게 차려입고 하얀 스쿠터를 타고 티엔커 등에 촥 달라붙어 티엔커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 거기에서 양양은 티엔커 부모로부터 "우리 티엔커와 결혼해줄래요."라고 청혼을 받는다.

이 시점에서 나는 양양에게 묻는다. "양양아 너의 꿈은 뭐니?" 영화는 양양의 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겠다."라고 물질적으로 꿈이 설명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꿈을 실현하는 방식 또한 다양하기때문에, 양양이 나의 꿈은 "티엔커와 알콩달콩 재미지게 연애하고, 티엔커와 날 똑 닮은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것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해 "그건 안돼!"라고 나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부유한 도시락 집 아들 티엔커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도시락 하나 사먹는 것이 녹록치 않은 양양의 관계가 마냥 알콩달콩 재미지고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의미에서 나는 양양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양양아, 너도 나도 이것만은 기억하자. 연애도 사랑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시간이 흘러도 양양은 4년 전과 똑같이 샤방한 모습을 하고 티엔커 손을 잡고 올림픽에 출전한 샤오펑을 응원하러 온다. 외양만으로 그 사람의 현재를 판단(?)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샤방한 양양을 보면서 양양이 티엔터와의 관계에만 매몰된 것 같지 않아 반가웠다. 영화가 시간이 흘렀다는 리얼리티를 전혀 추구하지 않았기에-드라마에서도 '몇년후'를 설명하기 위해서 배우들 머리를 자르거나 가발을 씌우면서 노력을 하는데 청설은 전혀 그런 노력이 없다-그녀가 예나지금이나 변함없이 샤방한 것이겠지만 "양양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신념으로 연애를 하고 있기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나는 허무맹랑하게 결론을 짓는다.

그래서 당신네들이 예쁘다! 초동안 샤오펑-양양 자매!


 
2010. 3. 4. 17:13



영화를 봤다. 영화 경-아직 개봉을 하지 않았지만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감독 특별 상영으로 볼 수 있었다. 친구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 2008년 겨울 경남 고성, 진해, 통영, 합천, 남강휴게소 등등에서 친구는 15일을 보냈었다. 영화 엔딩크레딧에 친구 이름이 올라가니 수많은 이름중에 아는 사람의 이름을 마주치니 반갑더라.

나는 영화가 꽤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모호하지만 '내 감정의 결과 같은 호흡을 하는 영화'라고 말하면 좋을까? 영화는 집나간 동생 '후경'을 찾아헤메는 언니 '경'의 이야기. 누가 보느냐에 따라 이 영화를 경의 이야기, 후경의 이야기, 창 이야기 라고 제각각 말 할 수 있지만 난 '경'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의 첫장면이 인상깊었다. 새벽 안개가 가득한 푸른빛의 고속도로를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밝히고 차가 정면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선 차는 달려온 만큼의 속도로 후진을 한다. 다른 자동차가 고속도로 위를 달리지만 경의 자동차는 경인 마냥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스크린에 등장한다. 사물이 생명체처럼 느껴진 장면이 신기하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계급의 인물들과 모호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는 그 사람들 중에 경과 경의 동생 후경 그리고 그녀의 엄마에게 관심이 갔다. 젊은 시절 엄마는 티비 드라마 배우였다. 그리고 죽기전 얼마까지 엄마는 남의 집 가정부였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딸들이 차려놓은 밥을 허겁지겁 먹고 잠들때까지 티비드라마를 보았다. 

경은 동대문에서 샵을 한다. 엄마와 사이가 나쁜편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이남자 저남자, 이여자 저여자와 만나 사랑을 나눴고 엄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사람은 미친듯이 싸웠다. 어느날 엄마는 경에게 동생 후경이 경의 딸이라고 말했다. 경을 위해 후경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경과 정경을 보살폈다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경은 엄마가 죽은 후 집을 나간 동생을 찾기위해 경상남도 일대를 빨간색 아반떼를 끌고 끊임없이 이동한다.

후경은 엄마가 죽은 후 집을 나왔다. 후경 친구 온화가 말하길 후경은 핸드폰과 강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후경은 남강휴게소에서 만난 온화와 메신저로 주로 대화를 하며 지금은 이주노동자 트란과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다. 후경은 아시아하이웨이로 가기위해 온화에게 남강휴게소에서의 일자리를 부탁한다. 후경은 자신의 가출을 가출이 아닌 '출가'라고 재정의한다.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어느날 토요일 버스안에서의 나랑과의 대화였다. 20대 초중반부터 (아니 지금도 여전히) 엄마와 징글징글한 투쟁과 갈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녀와 나. 갈등과 투쟁의 역사 속에서 나랑은 어느날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만약에 내가 2개의 인생을 산다면 하나의 삶은 엄마가 원하는대로 살겠지만 내 삶은 지금 하나이니까 나, 나를 위해 살게." 영화를 보고 왜 내 머릿속은 나랑의 말만으로 가득했을까?

경은 죽은 엄마인 동시에 후경이었다.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 경은 끊임없이 엄마와 싸웠다. 엄마는 경을 관리하고 경은 자유롭고 싶었다. 엄마가 죽자 경은 후경을 딸처럼 생각하며 후경을 관리하고자 한다.(이는 후경의 말이다. 경이 실질적으로 어떤 마음으로 후경을 찾아다녔는지는 모른다.) 가출을 한 아니 '출가'한 후경을 찾기 위해 경은 열정적이다. 휴게소 밥이 질릴정도로 노숙생활을 하고, IP추적에 파출소신고까지. 후경의 동거인 트란을 출입국관리소에 신고도 하는...

그 모습을 보며 엄마와 나의 관계가 오버랩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해도 말 잘듣던(?) 착한(?) 딸이 어느 순간부터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끊임없이 간섭하고, 딸은 엄마의 통제하에 더이상 있으려고 하지 않고. 벗어나고 싶기만 한.

하지만 엄마도 그러한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아시안하이웨이를 꿈꾸던 시간,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고 싶었던 시간. 끊임없이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순간이. 하지만 사람은 그 시간을 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삶의 방식에 길들여지는 것일까?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살아갈까? 지금 내가 갈망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자유롭고 싶은데 나는 어떻게 자유롭고 싶은 것일까? 엄마와 딸,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영화 경은 객관적으로 또는 아주 주관적으로 들여다 보게 한다.

영화 마지막에 경은 그녀의 블로그에 엄마를 추모하는 온라인 추모관을 열고 그곳에 짧은 글을 쓴다.
"엄마가 죽은 이후 내가 누구인지 더 모르겠다."
엄마와 딸의 관계와 동시에 엄마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 만약에 엄마가 없다면...이라고 가정만할 뿐 그에 대해 나는 어떠한 대답도 못한다. 절대 상상하고 싶지않은, 하지만 언젠가 내게 닥치는 현실...

"하지만 두렵다. 언젠가 닥쳐야 할 그 순간이."

ps.  이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확확 달라지는 영화일듯하다. 초반에 이야기 했듯이 다양한 계급이 등장하고, 가상세계와 현실세계과 끊임없이 만나는-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러가야겠다. 여성영화제에서도 상영한다고 한다.

2009. 11. 24. 13:29

꿈의택배 블로그에서 샘터분식이라는 다큐를 알게되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보고싶었지만 보지못한 다큐들을 정리한다.

그러다보면 어느날 우연히 어떠한 기회에 볼 수 있겠지.
기억을 위해서는 기록이 중요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1. 버라이어티생존토크쇼
http://blog.naver.com/vstalkshow


2. 샘터분식
http://blog.naver.com/boonseek
안성민씨가 나온다! 반갑다-신기하다-! 성산동 망원동 일대에는 깊이있는 관계는 아니지만
재미지게 사는 얼굴들이 참 많다. 안성민 동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인듯하다. 자전거를 타고
쌩-하닌 달릴 때 알아보고 짧게 눈인사를,

11/27(금) 상상마당에서 상영일정이 있네-스리슬쩍 가서 봐야겠다.


3. 개청춘
http://dogtalk.tistory.com/

12/5(토) pm6시, 인디스페이스

4.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77일간의 기록 - '저 달이 차기 전에'



5. 다큐멘터리 3일
- 마음으로 걷는길 72시간
- 도시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 성미산 마을 72시간



2008. 10. 28. 01:50




가난한 활동가에게 당신의 삶의 낙은 무엇이요? 묻는다면 월요일아침 출근길 교통수단을 기다리며 지갑에서 단돈 천원을 꺼내고 주간지를 맞바꿀때, 매혹적 배우가 표지로 등장하는 영화잡지를 펼쳐드는 순간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주 필름2.0은 내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007시리즈가 표지를 장식하고 기획기사로 실렸지만 그래도 나를 유혹하는 페이지가 있었으니-"매혹적 장면 10개의 숨겨진 이야기"

영화의 역사는 곧 명장면의 역사이기도 하다. 기억은 영화의 제목을 망각할지언정 특정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은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보존해 놓는다. 그런 결정적 장면은 특출 난 이미지만큼이나 수많은 뒷이야기들을 남긴다.

이 기사에 모티브를 얻어 오늘은 "매혹적인 장면 1개의 숨겨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얼마전 영화 멋진하루를 보았다. 영화 멋진하루의 미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일상의 공간이 프레임 속에 담긴 것일것이다. 요즘의 영화들(영화에 대해 이렇다 저랗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프레임속에 가꾸고 다듬어진 공간을 담는 것이 익숙하다면 멋진하루에 등장한 공간은 내가 오늘도 걷는 길이 바로 배경이 되어 등장한다.

영화 속,
희수와 병운이 서울의 익숙한 거리를 배회하다 한때 그들도 좋았던 시절 자주 다니던 음식점을 찾아간다. 하지만 가게는 문을 닫고 그들은 목적지 없이 그곳을 벗어난다.  허탈해하며 빠져나오던 골목. 그 골목길이 익숙다.


서울역사박물관, 내일신문사 뒷길에는 촘촘히 골목이 형성되어있다. 골목골목마다 길을 제외하고는 밥집으로 틈틈이 채워져있는 공간. 아침 그 골목길을 걷다보면 밥집대문에는 온갖가지 채소가 박스채로 쌓여있고, 지난 밤 밥냄새가 고스란히 베여 아침공기와 묘하게 섞여있는 곳이다. 그 골목을 병운과 희수가 나란히 걷더라.

맛있는 밥집이 있어 그 골목이 매력적이더라 말하는 것과 더불어 그 골목의 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결정적 장면이  있다. 얽히고 섥힌 골목길에서 미지의 낯선 곳으로 향하는 느낌이 드는 지점이 있다. 열림과 닫힘이 공존하는 시점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서대문역 3번출구로 나와 강북 삼성병원으로 향한다. 3번출구에서 직진, 그러다 등장하는 자그마한 언덕길. 그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 강북삼성병원이 오른쪽으로 몇개의 약국과 자그마한 가게가 있고 촘촘히 밥집이 들어앉아 있는 공간으로의 통로가 2-3개가 있을 것이다. 이 세 통로중 어느곳을 선택하여도 무방하다.

그렇게 골목을 헤매이다 보면 정성스레 커피를 드립해주는, 커피와 쟁이가 있고
깔끔하고 맛나는 밥집 봄샘이 있을 터이고
콩비지집, 돈까스집, 칼국수집, 삼계탕집 등등을 접할 것이다.

밥때 가면 봄샘에서 밥한끼를.

그렇게 밥냄새 진한 골목을 돌다 순간 걸음이 멈춰서는 공간이 바로 영화속에서 희수와 병운이 걷는 길이다. 경계가 지어져있고 닫힌 공간인 골목길을 걷다 어느 특정 지점에서 그 길이 열려있음을, 그 골목길 일직선으로 대로 너머 저곳에 정동길이 쭈욱 뻗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골목의 끝에서 정동'길'의 시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공간에 설때의 묘함. 그 묘함을 느끼기 위해 오늘 괜시리 그 골목안을 헤매이다(이젠 헤매이지 않는다. 어느 곳에 어떤 밥집이 박혀있는지도 안다.) 그 지점, 그 시점에 멈춰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영화가 보고 싶다. 그렇게 멋진하루는 불쑥 내 삶의 공간을 끄집어 내고 불쑥 지난날의 기억을 부른다. 희수가 병운과 찾은 이태원 어느 건물의 옥상. 희수는 한 장면을 목격한다. 그 장면을 목격하는 희수에게 아련함이 묻어난다. 먼곳을 향해 응시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희수에게 병운이 다가와 말은 건낸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 불쑥 어제를 마주하게 된다. 그때 또 한 번 묘하다.
나는.
아마도 희수도. 



2008.10.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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