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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해당되는 글 3건
2012. 11. 28. 14:21

 

 

첫 번째 <百의 그림자>는 누군가가 내게 여행 보낸 것이었다.

내게 여행을 온 첫 번째 <百의 그림자>를 여행 보낸 이에게 돌려보내기 전 다시 읽었다.

 

두 번째 <百의 그림자>는 부산의 어느 극장앞에서 만났다.

두 번째 <百의 그림자>를 부산에서 온 이에게 여행을 보냈다.

두 번째 <百의 그림자>를 부산에서 온 이에게 보내기 전 다시 읽었다.

 

세 번째 <百의 그림자>는 지금 군산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百의 그림자>를 군산으로 보내기 전 다시 읽었다.

 

무재씨와 은교씨가 서울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같은,

무재씨와 은교씨처럼 나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세 번째 <百의 그림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네 번째 <百의 그림자>를 기다린다.

(20121127)

 

+ 세 번째 <百의 그림자>를 보내면서 엽서 한 장을 적었다. 그 엽서 속 두 사람이 <百의 그림자>의 무재씨와 은교씨를 닮았다. :)

2012. 8. 12. 00:30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을 읽었다. 그녀의 소설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그 소설집을 손에 넣고 싶었다. 제주로 떠나는 짐을 싸면서 내 가방에 그녀의 소설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항으로 가기 전 서점에서 그녀의 소설책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공항까지 가는 시간이 빠듯했고 나는 그녀의 소설대신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그>를 가방에 넣었다.

 

<마이너리그> 책장을 펼쳤지만 김애란의 <비행운>을 읽고 싶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행기가 뜨기 전 친구는 담배를 태우러 갔고 나는 그 사이 공항 안을 어슬렁 거리다 서점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을 샀다. 일만이천원에 그녀의 이야기를 샀다. 여름 바캉스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지만 그 안에 내가 그리고 네가 있어 나는 쉬이 그 책을 놓지못했다. 틈틈이 시간이 날 때 마다 제주에서 그녀의 책을 펼쳐 들었다. 서른을 맞이하고 서른을 지나치고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비행운>을 나는 그렇게 만났다.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를 읽었을 때, 그 책에 대한 소감으로 D는 이렇게 말했다."내 친구가 소설을 썼어." 김애란은 자신이 통과한 시간을, 자신이 통과하고 있는 오늘을 그녀의 소설 속에 차곡차곡 담아오고 있었다.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를 읽은지 꽤 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구질구질했지만 유머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2012년에 만난 김애란의 <비행운>의 소설 속 인물들은 쓸쓸했다. 쓸쓸함이 소설집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 한 켠이 답답했고 '나도 이렇게 살다가 생을 마무리하겠지.'라는 느낌이 강렬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소설 속 그 말이 아리게 내 안에 머문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영화잡지에서 실린 그녀의 인터뷰를 보았다. 매체를 통해 그녀의 나이를 확인하였다. 1980년에 태어난 그녀, 그녀의 나이를 확인하고 나니 내 나이가 확인되었고 그순간 모든 것이 낯설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우스워지고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가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언젠가 자라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여전히도 언젠가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찰나 기대한다. 그 기대로 순간 나는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그 부푼, 실체없는 욕망은 금방 '픽'하고 터져버린다. 언젠가 나는 '무엇이' 되기보다는 '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 세계를 부정해본다. 겨우 내가 되어버리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나의 진짜 세계를 거짓이라고 말해본다. 하지만 나는 나의 현주소를 그녀의 소설을 통해 확인한다. 모든 것이 쓸쓸했다. 하지만 쓸쓸해도 그 쓸쓸함을 뚫고 나는 오늘도 걸어 나간다. 나와 우리는 파닥거리는 매일의 쓸쓸함을 직면하며, 그 쓸쓸함의 터널을 전생애를 거쳐 통과할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터널을 우리는 그렇게 통과할 것이다. 쓸쓸함의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오돌오돌 외로움에 떨며, 세계를 부정해보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거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타인의 출생년도를 매체를 통해 접하노라면 

특히 1980년대 초반 출생자들의 숫자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도 '서른의 시간을 거쳐가고 있겠구나.' 생각하면

그것이 거짓일지 모른다고 믿곤한다

그러고나면 사는게 우스워지고 세계가 무의미해진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내 존재가 거짓말같다

 

20120807 am 12:31

 

 

2012. 7. 4. 00:44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보기 위해 지난 일요일에는 집에서 하루 종일 소설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13살때 소설 <폭풍의 언덕> 존재를 알았다. 나의 단짝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폭풍의 언덕>을 꺼내 놓고 읽었다. 친구가 좋아했던 책이기에 나도 함께 읽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폭풍의 언덕>에 줄곧 빠져 있었다. 다 읽고 덮은 책장을 몇번이고 다시 펼쳐 읽고 또 읽었다. 나의 십대를 흔들었던 소설, 그 여운은 이십대까지 이어졌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 EBS에서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폭풍의 언덕>을 상영했고, 텔레비전에 앞에 앉아 숨죽여 그 영화를 봤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비디오가게에서 <폭풍의 언덕>이라는 타이틀의 영화를 꼭 찾아보곤 했다. 서점에서 <폭풍의 언덕> 원서를 구입하기도 했으며(절대 읽을 수 없었지만), <제인에어>도 함께 읽으며 괴이한 브론테 자매들을 흠모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내 청춘의 시간 속에 오롯이 존재했던 <폭풍의 언덕>, 늦은 밤 책장을 덮고 잠시 생각했다. 내 생에 있어 <폭풍의 언덕>을 13살 때 만나 다행이라고. 서른을 넘긴 시간 다시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몇몇 장면에서 찔끔- 눈물을 흘리긴했지만 그것은 당시의 그 감정이 아니었다. "그 피라미 같은 에드거가 온 힘을 다해서 80년을 사랑한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하루만큼도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을거야." "내가 살아가는 큰 보람은 바로 히스클리프야. 모든 것이 다 죽어도 그만 살아남는다면 나는 존재할 수 있어."라고 말하던 히스클리프와 캐시는 가슴을 부여잡고 절절히 슬퍼했던 그때의 히스클리프와 캐시가 아니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한치의 쉼도 없이, 한치의 우회도 없이 극에서 극으로 치달으며 비극의 연속을 만들어 갔던 에밀리 브론테, 그녀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에필로그 격의 후대의 캐시와 헤어튼의 이야기 그리고 유령으로 등장하는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이야기는 글을 쓰느라 지친 그녀가 스스로에게 전하는 위안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에밀리 브론테 그녀가 독자들에게 "히스클리프와 함께 오는 동안 힘들었지. 이제 쉬게 해줄게. 하지만 잊지는 마. 가학적일 수 밖에 없었던 그 깊고 슬픈 사랑을..."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여전한듯하지만 여전하지 않았던 소설 <폭풍의 언덕>을 보고 오늘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보았다. 폭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오늘은 <폭풍의 언덕>을 보기에 제격인 날씨였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극장에 불이 켜졌다.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휘청하였다. 진이 빠졌다. 저녁을 먹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휘청'의 90%는 영화때문이었다. 다행이었다. 활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한 영화는 공간이 전하는 정서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공간에 감정을 담아 관객에게 말을 건내고 있었다. 작은 극장에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이들은 아마도 그 혹은 그녀가 소년이고 소녀이던 시절, 소설 <폭풍의 언덕>을 가슴에서 놓지 못했던 이들일 것이다. 바람만 세차게 부는 언덕과 어두워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간이 반복해서 나올뿐인데도 바람이 부는 여백과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은 활자의 결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사람들을 그것을 느꼈고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소년과 소녀가 되어 영화를 읽고 있었다.

 

+ 영화가 좋았다. 헌데 영화 제목과 엔딩 크레딧의 폰트가 상당히 유치했다. 왜 그러한 폰트를 썼을까? 활자를 읽는다는 것과 활자를 본다는 것에 대한 간극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 바람소리, 새소리로만 채워져있던 영화는 마지막에 음악을 집어 넣는다. 영화 <원스>의 배경음악을 연상시켰다. 솔직히 음악이 튄다. 감독은 왜 막판에 굳이 음악을 집어 넣었던 것일까? 음악이 끝나고 엔딩크레딧 장면에서는 다시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화면을 채운다. 왜 그랬을까? 마지막에 감독은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건 소설이 아니에요. 영화에요. 관객 여러분-"

 

+ 3주째 모모에서 영화를 봤다. <멜랑콜리아> <두번의 결혼식 한번의 장례식> <폭풍의 언덕> 선택한 영화도 좋았고, 극장도 북적이지 않고, 거리도 가깝고, 폭 빠져들어갈 것 같은 지하 객석도 마음에 든다.  헌데 모모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영화 시작 후 관객이 늦게 들어오면 영화 속 주인공과 관객들의 시커먼 머리통 그림자를 동시에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싫다.ㅠ 영화 시작하면 모모는 관객 입장을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쉽게쓰여진 詩]

 

폭풍의 언덕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폭풍의 언덕에 존재하는 것은 바람과 너뿐이다

바람도 차마 채우지 못하는 그 빈 공간에 네가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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