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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에 해당되는 글 2건
2013. 3. 23. 21:38

<함께가는 여성> 213호가 나왔어요. 계간지로 바뀌고 2013년 봄, 세상에 인사하는 <함께가는 여성>에 오랜만에 글을 썼어요. :D




노년들의 영화에서, 든든하게 나이 들 수 있는 길을 찾다!

이소희(바람) /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노년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제목은 <아무르>, <내일을 위한 길>이다. <아무르>는 프랑스 영화다. 음악교사였던 노년의 부부 안느와 조르주는 음악회를 다니며 평화롭게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안느의 병은 그들의 일상을 뒤흔든다. <내일을 위한 길>은 1937년 미국 영화다. 은퇴 후 다정하게 지내오던 노년의 부부 바크와 루시는 부채로 인해 그들의 집이 저당 잡히자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의 집에서 흩어져 지내게 된다. 자식들은 부모의 존재가 불편하다. 


<아무르>를 보며 엄마의 나이 듦이 오버랩 되다

영화의 잔상이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영화 속 인물들이 내 곁에 계속 머물렀다. 왜일까? 내가 나이 든다는 것, 가족이 나이를 먹고 늙는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에 영화 속 그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아무르>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가 아팠다. 평생 사용한 근육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한 채 계속 사용하다보니 결국 탈이 났다. 엄마는 오른손이 고장나버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혼자서 옷을 입고 벗을 수 없었고, 왼손으로 어설프게 밥을 뜨고 힘들게 찬을 집었다. 엄마대신 가사 일을 하고, 엄마의 거동을 도우면서 속상했다. 그리고 짜증이 치고 올라오기도 했다. 이 짜증은 무엇일까?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동안 지켜왔던 습관을 유지하고 싶기에 억지로 손을 움직여 본다. 몸은 마음과 달리 움직인다. 내 곁에 있는 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면, 그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성질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치고 올라오는 짜증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감정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일까? 


<내일을 위한 길>에서 ‘타인의 친절’이 의미하는 것

영화 <내일을 위한 길>은 가족 안에서 느끼는 노년의 쓸쓸함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다. 나이든 부부는 빠르게 움직이는 자식들의 시간을 따라갈 수 없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만 그들의 시계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부부의 느려진 사고와 나약해진 몸은 자식들에겐 불편하고 귀찮은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자식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싶지만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이 흐른다. 이러한 시간의 강을 ‘세대차이’, ‘갭’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세대차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느 정도 힘이 있을 때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존재가 투명해지는 것 같다. <내일을 위한 길>의 노부부는 자식들의 공간에서 화분처럼 지낸다. 가족 안에서 쓸쓸한 노부부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들은 ‘타인’이다. 뉴욕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행을 보내던 바크와 루시에게 자동차 판매자는 자동차를 ‘파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도시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빠른 음악을 지휘하던 연회장의 지휘자는 그들을 위해 느린 템포의 음악을 연주한다. 


‘타인의 친절’을 통해 <내일을 위한 길>의 레오 맥캐리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이 든다. 늙는다.’ 회피할 수도, 정지할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노인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고민했을 것이다. 젊은 자식들은 제 살기에 바쁘다. 노인에게 가족은 쓸쓸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은 관계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내일을 위한 길>은 ‘노인을 공경하라!’라는 텍스트로 시작된다. 교과서적이고 고리타분한 말이지만 영화를 보고 극장에 나올 때 이 말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중에 누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각주:1], ‘두 존재의 공존이 가능한, 즉 사회적 관계성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물었을 때 영화 시작의 텍스트가 의미로 다가왔다. 그 텍스트는 관계의 윤리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든든하게 나이 들기 위하여

<아무르>를 보면서 나의 노후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교직생활을 했기 에 노후의 삶이 보장되었던 안느와 조르주와 달리 나의 노후는 연금도 녹록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사(私)보험을 들 형편도 안 되는데 나의 노후는 어떻게 될까 불안했다. 지인은 본인이 나이 들면 폐지 줍는 할머니로 살아갈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집이 저당 잡혀 갈 곳이 없는 <내일을 위한 길>의 바크와 루시가 ‘젊을 때 저축하라.’는 거리의 간판을 보며 씁쓸하게 지나치는 모습이 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것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늙어서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회경제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무르>를 보며 느낀 불안감을 <내일을 위한 길>을 보며 다독이려고 했다. 


“가족 안에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어. 사회적 관계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해!” 나도 언젠가 나이가 들 것이고 흐릿해질 것이다. 나이가 들고 흐려진다고 하여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존재에 대한 인식과 관계의 연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싶다. 노인의 경험이 세대의 강 때문에 단절되지 않도록 징검다리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특히 할머니의 경험이 전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 일본의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아흔이 넘어 쓰기 시작한 시를 모아 아흔 여덟 살에 <약해지지 마>라는 시집을 세상에 내 놓았다. 할머니는 지금 이곳에 없지만 할머니의 삶은 할머니의 시집을 통해 공유되고 있다. ‘할머니 시(詩) 교실을 열고, 할머니들의 시(詩)를 모아 시집 한권을 내놓으면 어떨까?’ 든든한 나의 노후를 위해서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할머니의 커뮤니티는 곳곳에 많이 존재해야 한다.


貯金 (저금)

私ね 人から 나 말야, 사람들이

やさしさを貰ったら 친절하게 대해주면

心に貯金をしておくの 마음속에 저금해 두고 있어


さびしくなった時は 외롭다고 느낄 때

それを引き出して 그걸 꺼내

元気になる 힘을 내는 거야


あなたも 今から 당신도 지금부터

積んでおきなさい 저금해봐

年金より 연금보다

いいわよ 나을 테니까


- 시바타 도요 시집 <약해지지 마>

  1. 나이 권력으로 젊은 사람을 뭉개는 늙은 가부장을 많이 보았기에, 늙음과 젊음의 힘의 관계를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늙음과 젊음에 있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소수자인가?’라고 질문을 하고 싶었다. [본문으로]
2013. 1. 1. 23:19

 

 

1. 영화 제목이 <라 모르(la mort)> 죽음이 아니라 <아무르(Amour)> 사랑인 이유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리고 죽음 또한 누구나가 맞이해야하는 순간이다. 영화 <아무르>는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이에 대한 영화다. 음악교사로 평생을 함께 한 안느와 조르주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고오 그림자는 그들의 일상에 짙고 검게 드리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는 과정에 대해 감정을 덧씌우지 않고 깊이 있게 바라본다. 인간이 지니는 고결함을 지키고자 안느는 최대한 애를 쓰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그것은 매일 무너진다. 무너지는 순간은 얼굴 근육의 변화, 근육의 굳음과 어눌한 말투 등 몸으로 고스란히 표현된다. 안느가 그렇게 몸으로 죽음의 과정을 말한다면 조르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의 심리를 통해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안느를 곁에서 간호하는 그를 보며 주변인들은 감탄한다. 하지만 조르주에게는 그러한 말들은 무의미할뿐이다. 그저 그들이 침묵하고, 무관심하기를 바랄뿐이다. 안느의 죽음을 직면하는 자신의 태도는 감탄할 무엇도 아니고, 안타까운 무엇도 아닌 현실이고 두려움인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이가 점점 죽어간다는 것은 그리운 버거움이고, 감당하기 힘든 상실인 것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이 과정을 장 루이 트래티냥과 에마뉘엘 리바를 통해 물기를 빼고 '고스란히' 전달한다. 물기 빠진 장면들이지만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영화 제목이 <라 모르(la mort)>, 즉 죽음이 아니라 <아무르(Amour)>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죽음을 향해간다. 함께 식사를 하다 안느는 순간 정신을 놓고, 조르주는 안느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안느는 조르주에게 부탁한다. 아니 약속하라고 한다. "앞으로는 절대 병원으로 데려가지 말라고." 안느가 악화될 수록 딸 에바는 엄마를 이대로 둘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 하지만 조르주는 세상의 규범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안느와 함께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결국 조르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은 쉬이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안느를 떠나보낸다. 그 방식에 대해 감독은 깊이 있게 고민했고, 그들만의 규범에 대해 정당성을 덧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2. 영화를 보면서 엄마와 나에 대해 생각하다.

영화 <아무르>의 힘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이것을 단순히 영화 속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게 한다는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지듯이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구나 늙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대해 관객들은 한 번즘 생각하게 된다. 아직 '죽음'까지는 생각이 다다르지 않더라도 늙음, 나이듦, 노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났고, 나의 노후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엄마가 아팠다. 아니 지금도 아픈 상태이다. 평생 사용한 근육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풀어준 적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사용하다보니 결국 탈이 났다. 오른손잡이인 엄마는 오른손이 고장나버려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혼자서 옷을 입고 벗을 수 없고, 밥을 먹을 때도 왼손으로 어설프게 밥을 뜨고 힘들게 반찬을 집는다. 엄마대신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엄마의 거동을 도우면서 속상했다. 그리고 순간순간 짜증이 치고 올라왔다. 속상함과 달리 올라오는 이 짜증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같이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기존 상태를 기억하고 엄마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몸은 마음과 달리 움직인다. 내곁에 있는 이가 내가 사랑하는 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면, 그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성질을 잊어가며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짜증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감정의 또다른 표현 방식일까? (다시 생각해보니 오바스러운 해석같다. 정확히 말하면 짜증의 8할은 엄마가 아픈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가부장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나의 노후는? 나는 가난하다. 그리고 안나처럼 배우자가 없을 수도 있다. 가난한 내가 나이 들고 늙어 내 스스로를 돌보지못하는 순간이 올 때 나는 어떡하지? 평생 학생을 가르치며 매달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 연금 등으로 여든이 넘어도 사회경제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조르주와 안나는 두 명의 간호사를 고용할 수 있고, 대신 장을 봐주고 집안 청소를 맡아하는 가정관리사를 둘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영화에 제대로 몰입하기 어려웠다.

 

3. 예술을 사유한다는 것에 대하여.

영화 속 안느와 조르주의 모습을 보면서 '참 우아하다.'라고 생각했다. 전직 음악교사였던 그들은 피아노 독주회도 가고, 새로 발간한 소설을 함께 읽고, 세계정세가 실린 신문기사를 읽어 주고, 피아노 연주를 하고, 오디오로 클래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는 그림들이 곳곳에 걸려 있고, 거실엔 책들로 가득하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그들은 우아한 삶을 살고 있었다. 품격과 격식, 격조라는 단어가 그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한 조르주와 안느를 보면서 '그들의 우아한 삶은 어디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일까?' 질문하게 되었다. 프랑스라는 국적에서? 혹은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에서? 아니면 경제적 지위에서?  이 모든 것들의 조합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감동과 동시에 예술을 사유할 수 있는 이들이 별도로 있는 것같다는 박탈감이 들었다. 가난한 이도 예술을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사유가 아닌 소비가 되어 버린 지금 가난한 이들은 예술을 향유할 수 없다. 무대에 위치한 카메라가 객석에 앉아 있는 안느와 조르주를 담는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4. 결론.

- '영화'는 자신의 위치에서 보고 해석하게 되는 것 같다.

- 2, 3번의 두려움과 박탈감을 떨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운동(movement)해야한다.

  : 그런데 요즘엔 계속 기운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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