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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8. 03:06
자야한다는 압박을 가지고 있으면서 잠들지 못하고 컴퓨터를 켰다. 영화 <만추>를 보았다. 극장을 나오면서 B군과 영화에 관한 짧은 대화를 나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에 대해 잠시 생각 했다. 자고 일어나면 생각했던 것들이 다 잊어질까봐 몇자 끄적거린다.




남편을 살해하고 7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 애나는 엄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3일간 바깥세상에 머물게 된다. 정부의 남편으로 부터 쫓기고 있는 남자 훈은 미국에서 2년째 떠돌며 살고 있다. 애나의 전화벨이 울린다. 애나의 위치를 묻는 교도관의 전화다. 교도관은 애나에게 교도소로 돌아올 시간을 알린다. 훈의 전화벨이 울린다. 훈의 호스티스 동료는 훈의 위치를 묻고, 훈의 고객들은 훈에게 거래를 요구한다. 애나와 훈을 찾는 전화벨은 그/녀들의 위치를 틈틈이 묻지만 전화기 너머의 존재들은 그들의 진정한 존재가 궁금하지 않다. 단지 돌아올 시간을 고지하고, 조심할 것을 당부할 뿐이다. 존재하지만 타인들에게 의미로 '인지'되지 않는 유령같은 애나와 훈이 만났다.




애나에게 돈을 빌린 훈은 애나에게 자신의 시계를 주면서 돈 갚을 때까지 시계를 가지고 있으라고 한다.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하고 훈은 애나에게 질문한다. "몇시죠?" 시간을 묻는 대사는 "I need a time." 애나가 하고 싶은 말을 훈이 대신한다. "시간이 필요해요." 7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만을 소유하고 있는 애나와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쫓기는 훈에게 '시간'은 온전하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I need a time.")는 말이 절박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온전한 시간을 갖고 있지 않는 애나와 훈이 '시간'을 공유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안개낀 시애틀, 안개가 낀 시애틀은 안개때문에 시간을 알 수 없다. 해가 어디즘에 떴는지, 해가 어디즘으로 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시간대에 만난 애나와 훈은 시애틀의 낡은 모텔로 간다. 하지만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그/녀들에게 시간을 공유하기란 쉽지 않다. 모텔을 나와 오리버스를 타고, 범퍼카를 타고, 갑자기 '마켓'으로 향해 달려간다. 살아가면서 어쩌면 우연히라도 만날 수 없는 두 존재가 만나 그렇게 시간을 달린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간이 공유되는 '퍼블릭마켓'의 밤은 조용하다. 마켓에서 애나는 중국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훈은 중국어라곤 '하오'(좋아)와 애나에게서 방금 배운 '화이'(좋지않아)라는 단 두마디만 안다. 하지만 시간을 공유하기 시작한 애나와 훈은 소통하기 시작한다. 당사자인 애나와 훈은 소통을 직접적으로 바로 깨닫진 못하지만 관객들은 그/녀들의 소통을 먼저 보고 듣는다. 그러나 무수한 사람들의 시간이 공유되는 '퍼블릭 마켓'에 애나와 훈은 존재하고 있지만 마켓에서 유령체험을 하고 있던 타인들에게 애나와 훈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보일뿐이다. 애나와 훈은 관객들에겐 의미로 '인지'되고 있지만, 영화 속 타자들에겐 아직 '유령'으로 존재한다. 묻혀있던 애나의 표정이 드러나듯이, 영화 속 타자들에겐 아직 묻혀 있는 애나와 훈이 시간을 공유하면서 관객들에게 드러난다.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 애나와 훈은 시애틀의 거리를 걷는다. 훈에게 전화가 온다. 그의 고객 옥자이다. 훈은 낡은 모텔앞에서 애나에게 이곳에서 30분만 기다리라고 한다. 기다리지 않을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기다리라고 한다. 홀로 남겨진 애나는 시간을 공유하기 버거워했던 공간인 낡은 모텔에서 훈을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애나는 그 공간을 처음 찾았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구겨져 있는 스탠드, 누군가의 주먹 혹은 머리로 인해 부서진 문을 애나는 바라본다.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공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간에 남긴, 시간을 공유한 흔적을 보며 애나는 그것이 자신에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훈의 시계를 낡은 모텔의 침대위에 두고 애나는 훈을 기다리기를 그만둔다. 

그렇게 애나는 시간을 공유하는 과정을 포기하고 도망간다. 그러나 훈은 하얀 꽃바구니를 안고 애나 엄마의 장례식장을 찾는다. 애나 훈, 애나의 옛 연인인 왕칭과 그의 아내가 한 테이블에 앉는다. 훈은 뭔지 잘 모르지만 '퍼블릭 마켓'에서 경험한 애나와의 소통을 기반으로 왕칭에게 감정을 쏟아내고 그 감정을 애나가 이어 받아 과거에 쏟아 내지 못한 묵은 감정을 왕칭에게 쏟아 낸다. 애나와 훈은 다시 시간을 공유한다.




하지만 애나의 시간은 얼마남지 않았다. 애나는 교도소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훈과 작별인사를 한다. 바이바이 인사를 몇번을 거듭하고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애나곁에 훈이 다시 찾아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훈이라고 합니다." 애나와 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애나가 교도소로 돌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나눈다. 처음 만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안개때문에 운행을 할 수 없는 버스는 휴게소에 잠시 멈춘다. "I need a time"이라고 말하며 시간을 간절히 원했던 휴게소에서, 이제 두 사람은 시간을 공유한 과정을 머리와 가슴에 안고 휴게소에 존재한다. 한계적 시간을 가지고 있었던 애나와 훈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시간을 확장시키고, 시간을 공유한 흔적을 '휴게소'라는 공간에 남기면서 함께 했던 시간을 그곳에 정지시킨다. 이제 그녀들의 시간은 공간에 머물면서 온전하게 된다. 어느 사람들처럼.

+ 영화를 보고 글을 썼다. 그리고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씨네21을 봤다. 씨네21 강병진 기자가 쓴 글을 보면서 놀랐다. 그가 포착한 장면과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내가 포착한 장면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닮아있었기에. 강병진 기자는 <만추>를 보고 '소통의 기적에 이르는 과정'에 집중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나는 <만추>를 '시간을 공유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말했다.

+ 씨네21 강변진 기자의 글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2001001&article_id=64888
(온라인 씨네21에 강병진 기자의 <만추>에 대한 긴 글과 김태용 감독의 인터뷰 글이 올라오면 그것도 함께 링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