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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6. 22:56
<함께 가는 여성> 원고 준비를 하며 여러 글을 찾고 읽다가...
(20140607)

누구로 기억할 것인가, 누구와 기억할 것인가

시타 ●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1.
엄마가 오래 아프시다. “하나님, 나 20년만 더 살게 해 주세요”라는 그의 기도는 늘어난 평균수명에 비추어 욕심이랄 수 없건만, 어려운 질병이 그의 몸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구체적인 증상으로 목격할 때면 인간의 삶이 너무나도 짧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그러나 엄마는 어느 저녁 심상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이르신다. “나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설거지 연습도 좀 하고, 그 좋아하는 옥수수 삶는 법도 익혀둬야지.” ‘나 죽은 다음’ 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저 마음은 어떤 것일까 헤아리다 보면, 나는 어쩔 줄 모르다가 이내 다른 생각을 해버린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끝까지 잘 살아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계실까. 무엇이 그를 고독하지 않게 해 주고 있을까.

2.
고정희 시인이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성운동가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삼십대가 된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내가 활동하고 있던 단체였던 언니네트워크가 2005년 제3회 ‘고정희 상(賞)’을 수상하면서다. 고정희 상? 고정희가 누구길래 ‘고정희 상’까지 있지? 했던 나는, 그가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이었고, <여성해방 출사표>(동광출판사, 1990)라는 시집을 비롯한 많은 시집을 발표했으며, <여성신문>의 초대 주간이기도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제서야, 이십 대에 어떤 페미니스트 선배에게 들었던 일화가 떠올랐다. 고정희 시인이 지리산 등반 중 실족하여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민족주의 시인으로서 추모하려는 남자 문인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문화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스트들이 그를 ‘페미니스트 시인’으로 불러내고 기억하기 위해 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별다른 감흥 없이 곧 잊었던 그 일화가 몇 년 만에 다시 떠오르면서, 나는 내가 변했음을 알았다. 무수한 시인들 중 한 명이었던 고정희 시인이, 갑자기 특별한 시인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고정희를 특별한 시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3.
그리고 그 해, 2005년, 여성학과 동료들과 소식을 나누는 온라인 까페에서 “안드레아 드워킨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을 읽게 되었다. 안드레아 드워킨은 그 전까지 나에게 책이나 논문에서 등장하는 이름이었을 뿐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역시 너무나 생경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1946년 생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가디언> 지에 실린 어느 페미니스트의 기고글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비방당한” 페미니스트.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는 유명한 (그러나 지나치게 단순화된) 문구 외에는 드워킨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고, 드워킨의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58세의 죽음이 ‘너무 이르다’고 느끼는 나이가 된 나는,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생각했다. 한국에서 그 삶의 고단함에 대해 상상하는 삼십 대의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것을, 드워킨의 영혼은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4.
2009년. 최명숙 선생님의 장례 소식을 들었다. ‘여성장’이라고 했다. 몇 벌 없던 검은 색 옷을 찾아 입고 추도식에 갔던 기억이 난다. 무슨무슨 단체 장, 무슨무슨 대표들이 그를 ‘명숙이’나 ‘명숙 언니’라고 부르며 추도사를 했다. 이십 대 후반에 몇 번 함께 회의를 했던 기억밖에 없었던 나는, 바람결에 그의 직함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나가는 지인에게 그의 투병 소식을 들었고, 온라인에서 그의 추도식 소식을 들었다. 그 시간들 동안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프게 느껴졌다. 나는 또, 추도식에 가서야 그가 20년간 민우회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날부터 나는, 단체에서 오래 일한 활동가들은 그가 누구이건 일단 존경받을 만 하다는 입장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그를 기억하는 페미니스트들이 9월마다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함께 기억하는 동안, 최명숙 선생님의 삶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겠지. 내가 그를 기억하는 만큼 그가 나에게 스며드는 것처럼. 나는 그를 ‘선배’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5.
‘선배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십 대가 생각난다. 20대 중반, 페미니스트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에게는 욕할 선배들 뿐이었고, 나는 몇 년에 걸쳐 대상을 바꿔가며 많은 선배들을 비판했다. 나는 그들이 나의 선배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싶어 했고, 그것이 내가 했던 많은 비판들 뒤에 숨겨진 감정의 핵심이었다. 민족민주운동과 ‘따로 또 같이’를 선포했지만 여전히 감정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선배들을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욕했고, 반성폭력 운동보다 호주제 폐지에 매진하는 선배들을 결혼제도 안에 있는 ‘아줌마’들이라고 폄하했다. 그 때의 비판들이 다 무효하다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그들의 삶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었다. 내가 물려받은 것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하지만 ‘선배가 없다’는 그 때의 고아심(孤兒心)은 한편으로 내가 선배를 찾거나 기억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노트북 모니터에 띄워 놓은 ‘여성주의 계보’라는 문구를 보며, 선배를 욕할 수 있다는 것의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선배를 욕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인 이유는 물론, 일단 선배가 있어야 욕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배를 욕하면서, 선배를 넘어서려 애쓰면서, 은연중에 그의 후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함께 선배를 욕하고 그것을 넘어서려 애쓰는 사람들과 동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여성학자 정희진은 화가 이중섭이 나혜석과 비슷한 말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죽음은 나혜석처럼 ‘시대를 앞서간 자의 당연한 말로’가 아니라, 위대한 화가의 치열한 예술혼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에 대해 질문하면서, “나는 나혜석의 삶이 행복했다고 본다”고 썼다. 가부장제가 기록한 나혜석의 죽음에 나혜석의 삶을 되돌려준 정희진의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나의 어떤 불안이 구원받았다고 느꼈다. 여성주의 계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어 기억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대적 존재로서의 한 여성을 ‘누구로’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여성을 ‘누구와 함께’ 기억할 것인가 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것은 기억된다. 기억하는 사람이 여럿일 때, 그것은 이야기가 된다. 기억하는 사람이 그 기억과 현재의 자신을 연관시킬 때, 그것은 계보가 된다. 기억하는 사람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면서 공동으로 다른 미래를 열고자 할 때, 그것은 역사가 된다. 우주의 먼지처럼 짧고 유한한 삶들이 얽히고 이어져 이루는 어떤 ‘의미’ ― 바로 여성주의의 역사 말이다.




컴백홈!

(20140606)


옆집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왔다. 계단에는 망가진 전자 피아노가 새워져 있다. 옥상에는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화분 몇개와 장독대, 빨래걸이가 있다. 이사를 하다가 장독이 깨졌나보다. 뻘건 고추장을 토하며 속을 벌린 장독이 연립주택 입구에 널부러져 있다. 그 위로 쓰레기가 쌓인다. 낡은 옷장과 책장이 버려져 있다.


 옆집 대문에 붙여져 있는 치킨집, 마트 광고지를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빈집의 고요함이 싫었다. 사람이 드는구나. 빈집에 온기가 채워지겠구나.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하다. 곳곳에 쌓여있는 짐들을 보며 짜증이 올랐다. '왜 짐들을 공동의 공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쌓아두는 것인가. 쓰레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해두는가?' 결혼하지 않은 서른 넘은 여자가 살고, 노인이 홀로 살고, 이북사투리를 쓰는 중년부부가 사는 연립주택에 또 가난한 사람이 들었다. 널부러져 있는 짐과 쓰레기들이 "가난하기때문에 품위는 몰라도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신경질이 난다.

(20140606)





아이들이 자란다. 작고 연약하지만 온 힘을 다하더니 결국 딱 하나씩의 열매를 맺었다. 다시 한번 또 온 에너지를 열매를 향해 끌어 옮긴다. 열매가 점점 또 자란다.

(2014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