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 (326)
오늘의이야기 (195)
영화&책이야기 (72)
맛있는이야기 (30)
그림이야기 (21)
쉽게쓰여진시 (8)
치앙마이이야기 (0)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2013. 3. 5. 01:31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접하면 나도 반짝이는 것 같아 즐겁다. 민우회에서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여성주의 영감을 얻게 된 당신의 책 38페이지를 함께 읽는 액션 위크를 기획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책장의 책들을 펼쳐본다. 여성주의 영감을 얻게 된 나의 책 38페이지엔 어떤 글이 쓰여 있을까? 페미니즘 서적을 펼쳤다가, 독립에 관한 에세이를 펼쳤다가, 만화책을 펼쳤다가, 진은영 시인의 시집 <훔쳐가는 노래>를 펼쳤다. 그녀의  시집 38페이지에는 좋아하는 시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가 있다. 천천히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生은 어쩌면 神이 전하는 유일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

진은영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

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

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것은 달콤한 회오리를 몰고 온 복숭아 같구나

그것은 분홍으로 순간을 정지시키는 홍수처럼

단맛의 맹수처럼 이빨처럼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가슴에도 달린 것처럼

기묘하고 집요하고 당황스럽고 참 이상하구나

인유가 심한 시 같구나


그렇지만 너는 많이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농부가 가지에서 모두 떼어버리는 과일들처럼......


여기까지 시작되다가

이 시는 멈춰버렸구나


투명한 삼각자 모서리처럼 눈매가 날카로운

관료에게 제출해야 할 숫자의 논문을 쓰고

"아무도 스무살이 이토록 무의미하다는 걸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라고 써보낸 어린 친구에게 짧은 편지를 쓰고

나보다 잘 쓰면서

우연히 나를 만나면 선배님 시를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대접해주는 예절 바른 작가들에게,

빈말이지만, 빈말로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니까,

빈말이 아니더라도 '좋아해요'와 '좋아했어요'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를 엄밀히 구분할 줄 아는

나는 고학력의 소유자니까,

여전히 고마워하면서, 여전히 서로 고마워들 하면서, 그동안 쓴 시들이 소풍날 깡통넥타와 같다는거

어릴 적 소뭉 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넥타를

나는 아매 열매 맺지 못할 복숭아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 놓았나보다, 바람이 불고 깡통 구멍이 녹슬어가고 파리인지 벌인지 모를 것이 한밤에도 붕붕거리고,

그것은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작고 부드러운 입술을 대어보았던 곳, 그 진실한 가짜 맛

그러다가 나는 문득 시작해놓은 시가 있으며


어떤 이야기가,

어떤 인생이,

어떤 시작이

아름답게 시작되는 것은 무엇일까

쓰러진 흰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생각해보기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