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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3. 11:42


어린 시절 나는 왕국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을까? 사천 할머니 댁에서 어렸을 때 장시간 머문 적이 있었다. 동네 또래들과 뒷산에 올라가 종일 놀다 내려온 기억이 있다. 뒷산에는 붉은 바위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 있었고, 바위를 도마로, 테이블로 활용하며 놀거나 바위틈에 들어가 숨어 있는 것을 즐겼다. 도시에서는 은신의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집안에서 책장의 책을 다 꺼내어 몸을 웅크리고 누우면 딱 맞는 작은 요새를 만들어 그 안에서 안락을 느꼈다. 왕국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난 그렇게 나, 우리만의 비밀공간에서 소박하게 노닐었다.


그런데 여기 정말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기 위해 여정을 떠난 아이들이 있다. 실제 그들만의 왕국을 만든 샘과 수지의 <문라이즈 킹덤>을 보았다. 달이 뜨는 왕국,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이고 설렌다. 영화는 수지의 집, 즉 비숍  부부의 집, 집의 분절된 공간을 수직에서 수평으로 담는 것으로 시작된다. 분절된 공간에 비숍 부부와 수지, 그리고 삼형제가 제각각 존재한다. 안락하지만 단절된 공간에서 수지는 다른 왕국을 상상한다. 그곳은 수지의 왕국이 될 수 없다. 문제아로 각인된 까마귀 수지에게 그곳은 새장인 것이다.  샘은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위탁 가정에서 자랐다. 위탁 가정에서 샘은 골치 아픈 존재다. 모두가 그를 싫어하는 눈치다. 여름방학 동안 샘을 스카우트에 보낸 것도 그를 한동안 보지 않기 위해서다. 샘은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스카우트 대장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는 규율의 세계가 따분하기만 하다. 그리고 다른 스카우트 대원들은 말썽만 일으키는 샘을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너구리 샘은 텐트를 파고(?) 탈출을 감행한다. 문제아 까마귀 수지와 부적응자 너구리 샘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는 서로뿐이다. 그렇게 1년간의 오랜 서신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들은 그들의 왕국을 만들 것을 계획한다.


샘은 캠핑 장비를 야무지게 챙기고 수지는 고양이와 읽을 책, 레코드 플레이어를 챙긴다. 그들의 물품을 통해 생에 있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육체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샘의 물건과 영혼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수지의 물건이 조화를 이룬다. 왕국으로 향한 여정이 녹록하지 않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피도 보고, 죽음(웨스 앤더슨 감독은 왜 스누피를 죽였던 것일까?)도 접한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들만의 왕국에 도착한다. 인디언의 수확기 이동경로인 그곳의 지명은 어느 지방 국도의 이름처럼 번호로만 명명되는 곳이다. 샘과 수지는 그곳을 '문라이즈 킹덤'이라고 새롭게 명명하고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한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수영을 한다. 이 장면이 재미있었다. 만(灣)의 양쪽 끝에 선 샘과 수지.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전경으로 잡다가 갑자기 얼굴로 향해 클로즈업 한다. 그 장면은 1965년을 배경으로 한 2012년에 만든 영화가 아니라 정말 1965년에 촬영한 1965년 영화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비숍 부부의 집과 아이반호 캠핑장은 '현실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샘과 수지는 '사이코'로 명명된다. 하지만 샘과 수지는 그들의 특이성이 그 어떠한 것에도 제약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음껏 발현될 수 있는 공간으로 간다. 분절되고 규율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뻥 뚫린 열린 공간에서 그들은 존재에 대한 자유를 만끽한다. 수영을 하고, 무언가를 선물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그들의 방식으로 왕국을 채운다. 그들의 낭만이 귀엽고 예뻤다. 그리고 부러웠다. 


하지만 그들의 왕국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유지 기간은 단 하루. 위탁 가정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샘은 고아원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수지에게는 샘을 만날 수 없다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샘을 데려갈 사회복자사가 오기 전까지 샘은 샤프소장과 하룻밤 지내게 된다. 그 시각 아이반호 캠프에서 아이들은 샘이 고아라고 하더라도 고아원에 보내져 '뇌가 잘려나가게' 그냥 둘 수 없다면서, 그 정도로 샘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라며 샘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샘을 구원할 것을 감행한다. 이 순간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미덕이지 않을까. 연민 혹은 타인의 처지에 대한 공감,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일시. 이런 '유연한 존재'들에 대해 웨스 앤더슨 감독은 애정을 표했다. 고통에 대한 공감은 이상(理想)에 가닿을 수 있게 하고, 상상(想像)을 가능하게 한다. 샘과 수지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갇힌 '현실 세계'의 탈출을 다시 한 번 감행한다. 그리고 또 이 순간에서 영화 속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애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이 든 배우들. 그들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내가 축 처진 빌 머레이의 배와 점점 더 물렁해지는 브루스 윌리스와 우둔해 보이는 에드워드 노튼과 회색빛이 더 찐해진 틸다 스윈튼을 보며 짠함을 느꼈다. 시간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며 현실적 인간이 되어버린 그들이더라도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의 범람을 받아들이며 서로의 삶에 대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아이들에 대해 연민을 발휘하고 있었다. 


샘과 수지, 그들의 친구들의 두 번째 탈출은 다양한 사건과 사고 등으로 위트 있게 그려진다.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는데 유쾌한 연출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샘은 어느 순간부터 수지를 본인의 아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둘은 친구들 앞에서 그들만의 결혼식을 치른다. 부부가 되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헷갈렸다. 사랑의 완결, 낭만의 통과의례로 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때문이다. 비숍 부부의 오늘이 샘과 수지가 겪게 될 먼 훗날(그들의 상대가 샘에겐 수지, 수지에겐 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의 오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굳이 어른들의 세계를 답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샘과 수지가 결혼이라는 어른들의 세계를 구현하며 그들의 독창성을 잃을 필요가 있었을까? 끝까지 그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칙하기를 바랐다. 


홍수로 샘과 수지, 그들의 친구들은 더 이상 숲에 남을 수 없게 된다. 교회로 은신한다. 그리고 대피소인 교회에 모두가 모인다. 결국 궁지에 몰린 샘과 수지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주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그들은 교회 첨탑으로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을 수도 있는 선택을 한다. 물이 너무 얕으면 뼈가 부러지는 고통으로 죽을 수도 있고, 수영을 하지 못하는 샘덕에 둘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 앞에서 그들은 두 번째 구원을 받는다. 샤프 소장은 샘에게 제안한다. "내가 너의 위탁 가정이 되어도 괜찮겠니?" 그 제안에 대해 샘과 수지는 제안을 받는 주체가 되어 샤프의 제안을 승낙한다. 샤프가 샘을 입양하는 것이 아니라 샘과 수지가 그들의 행보에 대해 결정하는 주체로 그려지는 것이 반가웠다. 그들만의 왕국 건설에 대한 일화는 이렇게 일단락된다. 홍수 후 그들의 '문라이즈 킹덤'은 퇴적물로 인해 지도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왕국 건설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샘의 그림 속 '문라이즈 킹덤'이 총천연색으로 그려지듯이 그들의 <문라이즈 킹덤>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 귀여운 영화이다. 영화 속 음악도 좋다. 촌빨나는 소품과 화면도 재미있다. 하지만 은근히 남자 냄새가 솔솔 나는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엽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하고 싶은 것은 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3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