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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6. 20:51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볼 예정이라면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씨네21에서 2012년도 영화 결산을 하면서 알랭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극찬하는 것이 눈에 계속 들어왔다. 그리고 정한석씨도 이 영화에 대해,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않은) 이들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관련된 기사와 글을 꾹 참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관련한 글을 읽고 싶지만 일단 글을 마무리 짓고 읽기로 한다. 나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을 나누며 다시 한 번 영화의 희열을 느끼고자 아끼고 있다. 해를 넘기고 극장에 찾았다. 상영하는 극장은 거의 없었고, 아마 오늘이 마지막 상영이 될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사무실 근처엔 얼씬도않는 내가 홍대에 가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보았다.

 

영화는 연극 <에우리디스>의 극작가 앙뜨완과 함께 작업을 했던 배우 13인에게 앙뜨완의 부고를 알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앙뜨완이 죽었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앙뜨완의 집에 모여 그를 추모한다. 영화는 앙뜨완의 죽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앙뜨완은 죽기 전 새로운 극단에서 그의 작품을 진행하고 싶다는 부탁을 받았고, 새로운 극단의 배우들이 연기한 연극 <에우리디스> 필름을 과거 함께 작업한 배우들에게 보여주며 이 연극을 진행할지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앙뜨완의 유언을 시작으로 영화 속 연극 <에우리디스>가 시작된다. 한 자리에 모인 배우들은 연극 <에우리디스>의 필름을 보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기억 속으로 몰입한다. 몰입의 순간 영화는 경계를 잃게 된다. 영화와 연극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잃고, 새로운 극단의 배우들의 연극 <에우리디스>의 필름과 그 필름을 보고 필름 속 배우들과 교차하며 연기하는 현실과의 경계를 잃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잃고, 세대의 경계를 잃고, 육신과 영혼의 경계를 잃으며 영화는 연극 <에우리디스>의 스토리를 이어간다. 무너진 경계 속에서 각각의 만날 수 없는 요소들이 융합되어 영화는 진행된다. 그 무경계함의 향연이 보는 내내 감탄을 연발하게 하였다. 하지만 영화는 경계있는 것들의 경계를 잃어버린 융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막바지에는 거기에서 예상할 수 없는 장면들을 연출하며 저만치 앞서 내달린다.

 

영화는 앙뜨완의 죽음 전제하고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전제하고 들어간다는 것은 즉 그 전제를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앙뜨완의 유언이 끝남과 동시에 필름으로 시작 된 연극 <에우리디스>를 다 본 배우들은 그들 각자의 기억 속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앙뜨완이 갑자기 등장한다. 앙뜨완의 모습을 본 배우들은 놀라고 그의 환생과 같은 등장에 그저 환호 할 뿐이다. 거짓과 사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감독 알랭레네는 자신을 영화 속 집사의 위치에 두고 배우와 관객들을 바라본다. 알랭레네는 영화 속의 배우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동일한 위치에 두면서 필름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못했다> 속 배우들과 필름 밖 관객들의 경계를 다시 한 번 무너뜨리며 관객을 영화 속으로 쑥 끌어들이며 관객들에게 엄청난 희열을 전달하는 것이다. '정말, 이 사람 미친 것 아니야?' 놀람과 환희 속에서 가슴이 벌렁거리고 있을 때 영화는 순식간에 장면을 전환시킨다. 다시 앙뜨완이 등장하고 앙뜨완은 재빠른 걸음으로 숲길을 헤쳐 걷고 어떤 망설임도 없이 물 속에 몸을 던진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화는 앙뜨완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가장 영화적인 장면으로 연출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그 어떤 틈을 주지 않고, 새로운 극단의 연극 <에우리디스>에서 에우리디스를 연기한 배우를 등장 시키고, 황급히 앙뜨완의 묘지를 찾는 장면으로 전환한다. 에우리디스 역의 배우는 그보다 먼저 앞서 연기한 연극 <에우리디스>의 배우들을 앙뜨완의 묘지가 멀리 보이는 어둠 속에서 지켜본다. 과거와 현재가, 필름 <에우리디스>와 현실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헤깔리는 것이다. 이것을 시간적 흐름대로 순순히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앙뜨완은 죽었다는 영화 시작의 그 전제가 진짜였을까? 그렇게 헤깔려하고 있는 순간 다시 장면이 바뀐다. 이번에는 연극 <에우리디스>가 공연되고 있는 극장의 전경이 나오고 영화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가 올리브 숲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어느 순간을 분절의 순간으로 두고 해석해야하는 지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영화의 제목이 왜 그렇게 만들어 졌는지 어떤 저항감 없이 그저 이해되었다.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아, 알랭레네 엄청난 사람이다.' 나는 이 영화를 왜 이리 늦게 본 것일까. 영화를 보며 희열을 느낀 순간은 처음인 듯하다.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극장에서, 낙원동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이 영화는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와도 아주 잘 어울리는 영화인 것같다.

 

+ 무언가를 전제한다는 것은 믿게 만든다는 것과 동시에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우게 만들기도 한다.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를 각각 3명이 연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각각의 시대의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를 연기한 배우였다는 전제는 각각의 배우들이 동일한 대사를 읊고, 교차 편집되는 장면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은 전제의 전부만은 아니겠지. 배우들의 연기가 또 한 몫햇다.

 

+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할 말이 많다는 것은 관객을 자극한다.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는 훌륭한 영화인 것같다. 그런데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면 나는 무지하게 행복하다. 오늘이 그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 메모장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저리 주저리 적어내려 가는 그 순간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