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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 17:36

혼자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다. 혼자 여행을 떠나야지만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휴가를 내고, 일단 비행기표부터 끊었다. 어디에 머물고 어떤 경로를 이동할지 미리 알아두고 정리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을 내어 제주로 떠나는 비행기 티켓이 내 손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독립'을 향해 가는 첫발을 내딛었다, 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아침 7시 1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4시 40분에 일어났다. 출발시간을 너무 이르게 잡은 것은 아닌가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나는 떠난다. 그것에 의미를 두자. 어찌어찌하여 비행기 이륙시간이 늦어지고 비행기에 탑승한 채 30분동안 활주로 위에 있었다. '딩. 딩' 두번 벨이 울리고 곧 이륙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륙 직전의 순간, 나는 그 순간이 가슴 설렌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배낭을 가볍게 만들고 길을 나선다. 첫날은 올레 8코스를 걷기로 했다. 지난 밤 잡념들로 함 숨도 자지 못한터라 상당히 몽롱한 상태였지만 올레길 위에 내가 있고, 눈 앞에 바다가 보이고, 서울이 아닌 제주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 째지게 좋았다. 그래서 혼자 배실배실 웃었다. '혼자'하는 여행은 처음이다. 교통카드 한 장 손에 들고 서울 근교를 혼자 돌아다니긴했지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곳곳을 걷는 경험은 내게 생경한 것이었다. 약간의 두려움과 기특함과 설레임으로 그렇게 나는 첫째날을 맞이하였다. 

 

길을 걸으면서 억새밭을 보았다. 괜시리 눈물이 흘렀다. 왜 이렇게 억새만 보면 눈물이 나는지. 관계가 종료되고 7개월이 지났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시간이 갔다. 일부러 더 씩씩하게 지냈고, 최대한 활동에 열중했으며,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면서 왜 눈물이 나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관계 종료 후 나는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던 것일까? 종료된 관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슬퍼할 시간을 내게 맘껏 주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니 그런 시간을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억새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리고 헤어진 이유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두번의 연애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끝났다. 나는 연애에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내가 느껴야 하는 고독과 외로움, 슬픔은 내가 오롯이 안고 가야하는 것이다. 상대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타인에게 그 감정을 전가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면 독립적인 내가 되어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싶다. 조금 더 의연하게 관계를 맺고 싶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며 내게 말했다. "애썼다. 그 시간들. 이제는 괜찮다. 그리고 나는 더 나아질 것이다." 바람이 흐르는 눈물을 쓰윽 닦아준다.

 

 

+ 베릿내오름에서 내려다 본 베릿내다. 베릿내는 천제연의 깊은 골짜기에 부터 흐르는 물길이 하늘의 은하수를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별빛이 비추는 개울이라는 뜻에서 베릿내라고 한다. 이름짓는 마음씨가 참 이쁘다. :)

 

 

+ 중문해수욕장 풍경. 언제부턴가 이 해안가는 누군가의 '프라이빗 라운지'가 되어버렸다.

 

송이슈퍼에서 약천사를 지나고 베릿내오름을 오르고 내려오니 중문관광단지가 나온다. 2010년사무실 동무들과 함께 하얏트 호텔 뒷마당에서부터 대평마을까지 올레8코스를 걸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 8코스를 다시 걷기로했다. 기이한 모양의 절벽을 보며 감탄했었다. 기억대로라면 하얏트호텔에서 해병대길을 지나 논짓물로 길이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얏트호텔 마당에 푯말이 적혀있다. 안전여부로 해병대길이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 8코스는 중문 관광단지를 끼고 있다. 롯데호텔, 신라호텔, 하얏트호텔 등 유명한 호텔들이 있다. 중문해수욕장을 걸으면서 어느 호텔에서 세운 푯말을 보았다. '프라이빗 비치 라운지' 해변의 일부가 개인 소유의 것이라고 적혀있다. 8코스를 걸으면서 2년 전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올레표식은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었고, 잠정폐쇄 된 해병대 길 대신 새로 난 올레길은 차가 다니는 길과 다름없었다. 사유화된 해변과 길은 지나가는 올레꾼을 반기지 않았다. 돈이 되지 않는 올레꾼들을 내쫓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역력히 보였다.

 

 

+ 대왕수천예례생태공원. 한국땅에서 '생태'란?

 

새로 난 올레길을 걸으며 '내가 이 길을 왜 걷고 있는거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호텔 사이로 난 도로를 지나니 얼마전에 조성된듯한 생태공원이 나온다. 공원의 이름은 '대왕수천예례생태공원'이다. '생태'의 사전적 뜻은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이다. 그런데 한국땅에서 통용되는 '생태'의 의미는 아무래도 재정립 된 것같다. 한국에서 재정립 된 생태의 뜻은 '있는 모습 그대로 잘 있는 자연을 일부러 한 번 갈아엎고 인공 천(川)을 만들고 나약한 과실수를 드문드문 심고, 체험학습장을 만들고 안내푯말을 세우는 것'이다.  4대강 살리기라는 캐치프래이즈 아래 만들어진 생태공원과 '대왕수천예례생태공원'은 상당히 닮아있었다. 이곳도 가히 이명박스러운 감수성으로 조성된 공간이다.

 

 

 

+ 논짓물 풍경, 논짓물 풍경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니 저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한라산도 언젠가 꼭 등반을 할 것이다.

 

생태공원을 지나니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논짓물이 보인다. 다행이도 논짓물 풍경은 그대로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대평마을이 곧 나왔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한 밥한끼를 먹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대평마을은 제주도에 올 때마다 빠짐없이 꼭 방문한다. 올 여름과 또 마을 풍경이 달라졌다. 고요하고 여유로웠던 대평마을이 점점 자본의 손길에 다듬어지고 있다. 물고기카페 주인장이 "여기도 많이 변했죠."라고 한 말에 절대 공감한다. 제발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올레8코스가 아쉽고, 속상하다.  

(201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