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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3. 13:20

승희나무님에게.

바람이에요. 한동안 편지가 뜸했지요? 제주에서의 시간을 하나하나 기록해서 나무님에게 우편을 보내는 것이 나의 바램인데 시간이 꽤 많이 늦어지고 있어요. 제주에 다녀온지도 2주가 지났어요. 시간은 어쩜 그리도 무섭게 흘러가는지. 제주에 다녀와서 사무실에 복귀한 후 어느정도의 활력과 의욕이 제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동안 내가 지내왔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그 세상과 그 어떤 접촉도 하지 않은 채 단절되어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이 짧지만 엄청난 힘으로 다가오게 되더라고요.

나무님 오늘은 제주에서의 여섯번째 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5일을 연속으로 걷다보니까 이날은 좀 쉬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날 밤 잠들기 전 동생이랑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어요. 하지만 이게 웬걸 또 바지런히 걷지 않으면 언제 이렇게 걸을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어 아침에 눈뜨자마자 길을 나설 채비를 했어요. 대평민박집 아주머니께서 김밥과 샌드위치도 맹글어 주시고, 든든한 끼니도 있겠다 길을 나섰지요. 원래 여행계획으로는 우도, 1코스, 3코스, 6코스, 7코스, 10코스를 걷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1, 6, 7코스만 계획되로 걷고 전혀다른 길들을 걷게 되더라고요. 예상치못한 코스 중의 하나가 9코스였어요. 올레 책자를 들여다보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숲길을 걸을 수 있다는 말에 덥석 9코스를 선택하였어요. 구간도 다른 길보다 짧고, 숙소에서 바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영향을 미쳤어요.


대평슈퍼민박이 있는 대평마을 작은 포구가 있는 이쁜 마을이에요. 작년에도 머물렀는데 그 기억이 좋아 올해도 찾게 되었어요. 작년엔 마늘밭의 알싸한 향이 가득했었는데. 마을에서 바로보이는 박수기정 위를 오르는 것이 오늘의 미션이었답니다. 작년 민우회에서 같이 활동하는 여경과 함께 박수기정으로 오르는 길을 절반정도 걸었었는데. 옛날 옛적 고려시대 박수기정 위 너른 들판에서 키우던 말들을 원나라로 싣고가기 위해 말들을 대평포구까지 끌고 내려왔어야 했는데 그 작은 숲길이 바로 그때 말들이 다니던 그 길이라고 하더라고요. 몰질이라고 불리우는 말길.


그렇게 숲길을 한참 올랐을까요? 정말 너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요. 왼쪽에는 대평마을과 포구가 보이고 너른 바당이 쫘악 펼쳐져 있었고, 오른 쪽엔 한밭소낭길이 펼쳐져 있었어요. '아, 이길을 걷기를 참 잘했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숲길로 시작해서 내내 숲길을 걷던 길. 다른 올레길과 달리 이 길은 등산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기정위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화력발전소와 산방산, 눈으로 보이기엔 그 거리가 멀지 않아 아주 금방 당도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제 머릿속에서는 이곳에서 저곳까지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길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걸, 길은 산을 오르고, 내리고, 산을 두르고, 깊이 들어가고, 나오고를 몇번 반복하게 되더라고요. 길을 가다 어디선가 들리는 소울음소리에 반응하고, 새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고 나무내음 가득한 길을 걷다 작은 동굴도 하나 발견하고 저 멀리 마을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운동회를 치르는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고 나무로 가득한 숲엔 소리가 모여 모여서 바람결에 흘러가고 있더라고요.


한동안 그렇게 산길을 걷다가 꽤 큰 계곡을 만났어요. 바다로 흘러가는 계곡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올레길을 걸으면서 바로 옆에 깊은 계곡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계곡을 걷는 길은 아마도 따로 있는 것 같더라고요. 올레길을 걷다보면 내가 그 길위에서 보고 느끼는 것 외에 또다른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확신에 다음을 약속하게 되더라고요. 다음에 다시 오게된다면 이 계곡을 찾아와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계곡이 바다와 만나는 즈음 황개천이 나오고 화순화력발전소가 나오고 화순해변까지는 평평한 길을 걷는 길이었어요. 동생이랑 9코스는 짧은 길이니 만만하게 보고 민박집아주머니가 싸주신 김밥만 손에 달랑들고 가볍게 나섰다가 물이 마시고 싶어 혼이 났었답니다. 가다보면 물을 사먹을 수 있는 곳이 있겠지 생각했는데 코스가 거의 끝날때까지 물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답니다. 정말 올레길의 필수품은 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답니다. ^-^;

9코스는 정말 금방이더라고요. 3시간이 딱 걸리더라고요. 몸이 걷기형 인간으로 단련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허벅지도 뭔가 탄탄해지는 것같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걷는 다는 행위가 날로 개운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오후 1시즘 9코스의 종점 화순해변에 도착해서 작은 슈퍼 앞에서 김밥과 빵을 먹으며 오늘은 오후시간에 뭔가 다른 것을 해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하루를 더 번듯한 기분이 들었답니다. 그간 아침에 눈을 뜨고 길을 나서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맥주 한캔을 들이키고 잠이들고를 반복했었거든요. 숙소주변을 산책하는 것은 상상할수도 없었지요. 그런데 오늘은 다 걷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다시 대평포구로 돌아가 대평마을을 둘러보았어요. 물고기카페에서 차 한잔을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해서 그 근방 레드브라운이라는 찻집에 가서 시원한 커피한잔을 마셨더랬지요. 원래 커피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오랜만에 카페인을 섭취하니까 좋더라고요. 커피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포구를 바라보며,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작은 여유, 그동안 문자를 거의 못보다가 책을 보니까 또 반갑고, '아 책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 책을 보는 만족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답니다.
    
그렇게 제주에서 보낸 여섯번 째날은 올레 9코스와 더불어 하루를 더 번듯한 느낌으로 찻집으로 시간을 보냈던 일명 '원플러스 데이'였답니다. 나무님, 제주에서의 시간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시간을 붙잡아두거나 되돌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래도 내일은 오겠지요? 내일의 여정길을 기대하며 편지 마무리할게요. 내일은 세화의 집 어머니가 소개해준 올레 18코스를 걸을 예정입니다. 작년에 만들어진 18코스, 세화의 집 어머니가 칭찬에 칭찬을 덧하던 그 길이 기대됩니다.

안녕히계세요.

이천십일년 시월 삼일 월요일
바람이 보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