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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6. 18:25

승희나무님에게.

나무님 서울은 별일 없이 잘 있지요? 강태여 할망집에서 이틀밤을 보내고 짐을 짊어지고 오늘은 세화의 집에 짐을 풀었어요. 나무님도 혹시 세화의 집에서 머물었나요? 통영의 할배와 사천의 할매가 어떤 이유로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지금 두분은 올레길을 알리기 위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세화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화의 집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느그들 밥 묵었나?"였어요. "아니요."라고 말하자 "속이 든든해야지 잘 걷제! 밥묵고 가그래이."라고 말씀하시며 뚝딱 한 상을 차려주셨어요. 이틀동안 집밥이 아닌 바깥 밥을 먹었던 터라 (할망집에서 먹은 밥은 할망이 시켜주셨던 식당밥이었어요.ㅠ) 집밥이 참으로 감격스러웠어요. 한술 뜨고 또 뜨는데 어찌나 행복하던지, 집밥의 힘을 느꼈어요.

오늘은 계획대로라면 3코스를 걷는 날이에요. 어젯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에도 계속 비가 내려 길을 걸을 수 있을지 걱정을 했어요. 그러고 있는 중 세화의 집 어머님과 아버님은 말을 맞춘듯이 "느그들 오늘 몇 코스 걷기로 했나?"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3코스라고 답했더니 3코스는 비가 오는 날이면 발이 푹푹 빠지고 쉽지 않을 것이라고 5코스를 걷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동생과 전 베테랑 두 분의 말을 듣기로 했어요. 예상치도 못했던 새로운 길, 길은 남원포구에서부터 쇠소깍까지 14.7Km 그런데 그 길이 걷다보니 낯설지가 않더라고요. 어, 이길은 내가 걸었던 길인데. 2009년에 민우회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캠프를 다녀왔었는데 그때 그/녀들과 함께 걸었던 길을 다시 걷고 있더라고요. 함께 이 길을 걸었던 그때 그/녀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고 보고싶고, 서울 올라가면 그녀들과 함께 했던 사진첩을 다시 열어봐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올레 5코스는 추억을 다시 끄집어 낼 수 있었던 길이었어요. 그리고 5코스는 이야기가 있는 길이었어요. 나무님도 5코스를 걸으면서 이 길은 이야기가 풍성한 길이라고 느꼈겠지요? 해안길을 지나다가 나오는 동백나무 군락지, 17살에 시집온 현맹춘 할머니는 어렵게 마련한 황무지의 모진바람을 막기 위해 한라산의 동백 씨앗 한 섬을 따다가 심어 기름진 땅과 울창한 숲을 이루어 냈다는 길. 구월의 마지막 날 동백나무 군락지를 길으면서 평생을 땅을 가꾸고 일궈온 할머니의 '혼'을 느꼈어요. 그러면서 동시에바람을 막아주는 많은 나무들 중 왜 붉은 동백나무였을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어요. 왜 동백나무였을까요? 붉게 피우고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이 그대로 툭하고 떨어지는 붉은 동백이었을까요? 바람이 매서울 정도로 시린 겨울  나무에서 한 번, 길위에서 한 번, 두번 붉게 피는 꽃을 보며 할망은 처절한 '힘'을 느꼈을까요? 지금은 꽃이 없는 자리에서 동백 열매를 줍는 또 다른 할망을 보며 괜시리 제주의 여인들은 그 어느곳의 여인들보다 위대하다는 막연한 믿음을 가져봅니다.


나무님은 5코스 어디에서 발길을 멈추었나요? 전 공천포 근방에 주저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어요. 샘물이 솟아올라 산 속 계곡처럼 민물이 바다로 흘러 내려 두 물이 만나는 순간이 어쩜 그리도 신비로운지 계곡의 물소리와 바다의 파도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그 순간이 경이로왔다지. 그 이후로 올레길을 걸으면서 샘물이 솟는 곳엔 마을이 늘 형성되고 마을사람들은 물이 솟는 그 자리에 빨래터도 만들고 목욕탕도 만들어 여름날 더위를 피한다는 사실을 길을 걸으면서 보고 알게되었어요. :)


그리고 쇠소깍, 바닷물과 민물이 한데모여서 만들어진 공간 또한 절경이었어요. 구월의 마지막 날은 길 위에서 추억도 만나고, 다시 찾아뵙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도 만난 의외의 선물같은 길이었어요. 이 길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 나무님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그럼 오늘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안녕히계세요.

이천십일년 구월 삼십일 금요일
바람이 보내어요.

ps. 세화의 집 어머님이 올레길 18코스를 추천했어요. 일곱번째 날은 그 길을 걸으려고요.
올레꾼들을 위한, 올레길을 찾는 여성들을 위한 세화의 집은 다시 한 번 찾아가서 길게 머물러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