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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25. 01:29


'신'이라는 존재는 무엇이고 나는 '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데비치>, 오랜만에 아주 강렬한 영화를 보았다. 오로지 주님만이 나의 사랑이고, 주님의 사랑을 끝없이 갈망하는 소녀 하데비치. 한 겨울에 부러 옷을 입지 않고, 먹지 않고, 수녀원에서 고행과 수행을 하며 금욕을 실천하는 하데비치. 하지만 그녀는 '자기애'에 대한 욕구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수녀원을 나갈 것을 권유받는다.

수녀원을 나와 프랑스 파리 한 복판, 고급 주택가에서 셀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데비치. '신'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도 변함이 없다. 하데비치는 우연히 이슬람 청년 나시르를 만나면서 '신'과 '자아'에 대한 사유를 끊임없이 공유하게 된다. 나시르와 이슬람에 가게 된 하데비치는 '신'과 함께 '신'안에서 끊임없이 투쟁을 할 것을 나시르와 나시르의 친구들 앞에서 맹세한다. 그리고 하데비치는 나시르와 함께 파리 한복판 지하철 테러를 감행한다. 영화는 테러에 대한 암시를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나만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일까? 지하철을 타는 하데비치와 나시르를 잡은 카메라는 순간 개선문을 보여주고 몇초지나지 않고 '펑', 굉음과 함께 하얀 먼지 기둥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장면이기에 놀랐다. 그 이후 하데비치는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고,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에게 울음을 토하며 '신'의 존재를 묻고 또 묻는다. 결국 초원의 늪에 몸을 던지는 하데비치. '그녀가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죽음의 늪에 빠진 그녀를 '사람'이 구한다. 물속에 빠진 하데비치를 끌어올린 것은 사람중에서도 '죄인', 전직 수감자였다. 하데비치는 자신을 구원한 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신'이란 무엇인가? '신'과 '사람', '사람'과 '신'에 대해서.

+ <하데비치>를 보면서 정성일 감독의 영화 <까페 느와르>가 생각났다. 영화 첫 시작, 기도하는 자세로 햄버거를 먹으며 '신'을 이야기하던 소녀는 하데비치를 닮았다.

+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생각났다. 당시 영화를 보고 쓴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 2007년 6월 8일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보고 

영화가 시작된다. 닮은 패턴이다. 카메라는 길위를 달린다. 음악이 흐른다. 아 이 느낌_
영화가 끝났다. 노란 햇볕이 마른 강아지풀의 그림자를 만든다. 음악이 흐른다. 아 이 느낌_

징글징글한 이 느낌.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일주일 내내 언론이 떠들석한다. 월드스타, 칸의 여신. 뛰어난 연기로 국위를 선양한 배우 전도연. 가판대의 기사를 접한 거리의 노숙자도 미간 사이의 찡긋한 그녀의 귀여운 미소에 화답을 한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년 월드컵 이후 다시 한번 스멀스멀 꿈틀거리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이곳저곳을 뒤져보아도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않다. 딱 두가지 이야기만 존재할 뿐. "고통스러운 영화이다. 칸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모든 이야기를 뒤로하고 나는 내게 묻는다.
"넌 어떻게 보았니?"

이창동감독의 전작. 박하사탕, 오아시스(초록물고기는 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수가 없다.) 보는 내내 내게 씁쓸함을 안겨주었던 영화들. 인간의 순수성을 하나 둘 잃어가는 모습을 시간의 역구성을 통해 이야기했던 박하사탕을 보며 나는 나의 마흔다섯살을 두려워했다. 어쩌면 속물 소리를 들으며,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 잡았다.(여전히도 그 두려움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오아시스, 여성의 시각으로 영화를 봐야한다는 개인적 사명을 띠고 영화 러닝타임 내내 영화를 쏘아보았기에 이 또한 괴로운 시간이었다. 이렇듯 그는 항상 그렇다. 가만히 나를 내버려두지않는다. 보통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현실이라는 징글함을 잊기위한 도피이다. 하지만 진짜보다 더 진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픽션은 오늘만이 존재하고, 이러한 그의 영화는 그를 찾은 관객을 처음부터 끝까지 괴롭힌다. 그런 그임에 알기에 각오하고 객석에 앉았다. 전도연 그녀의 수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 붐볐던 평일의 극장.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 많은 이들은 영화가 끝난 후 무슨 생각을 하며 하얀 스크린을 등지고 나왔을까.

신을 생각한다.
사람을 생각한다.

인류는 언제부터 신의 존재를 믿었을까. 신이 사람을 만든 것일까. 사람이 신을 창조한 것일까. 마지막 장면_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거울을 들어주던 종찬을 보며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창동 그가 결국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다시 반문을 한다. 마지막 장면이 그러할 뿐_종찬이 언제까지 신애곁에 머물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밀양(密陽)

"신은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곁에 존재해요. 저 작은 햇볕조각 하나에도 신은 의미를 부여한답니다." 아주 작은 틈사이로도 햇볕이 비집고 들어오듯이, 모든 것을 투영할 듯한 햇볕이 비밀스럽다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그 수식어에서 나는 내 존재의 가증스러움, 우리내 사람들의 알량한 양심을 본다.
모든 것이 쉽다. 죄를 짓는 것도..용서를 구하는 것도..회개도..신에게 세치 혀로 용서를 구하고 기도를 드리면 우리는 새로운 인간이 된다. 그리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잠들기 전 두 손을 모아 기도드리고 다음날 새 인생을 시작한다. "난 새롭게 태어났어요. 신은 저를 용서하였죠." 그렇게 외친다. 결과와 결과만이 존재할 뿐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를 씻기위한 고통의 과정은 깔끔하게 편집한채 "저는 신에게서 용서를 구하였어요" 말하며 오늘을 위선으로 똘똘뭉친 모범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의 면죄부, 아니 내가 내게 쥐어주는 면죄부를 꽉 쥐고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창동 그는 신과 인간의 관계맺음. 인간이 규정한 일방적 관계맺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기때문에 신애에게 그리도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한 것일까?

습관이 되어버린 나의 기도. 습관이 되어버린 나의 반성. 자기위안...아무의미없는 반복에 회의를 느껴 잠시 기도를 멈춘다. 그리고 방황을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인가?" 언젠가는 나는 성찰이 결여된 나의 질주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신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반복_반복_반복_

하지만 여전히도 햇볕은 내리쬔다.
비밀스럽든, 그렇지아니하든...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fade out. 그리고 나의 한마디.
"아_이창동, 징글징글해."


+ 인류역사상 인간은 '신'을 말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 '신'이 주님이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부처가 되었든, 무엇무엇이 되었든. 그렇다면 '신'은 어떤 순간에 내게 의미가 되고, 존재로 작동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