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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스튜디오'에 해당되는 글 1건
2010. 9. 24. 16:31
나는 왜 지브리스튜디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지브리스튜디오의 영화를 잘 모르지만 좋아한다. 나는 왜 지브리스튜디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첫째 지브리스튜디오의 그림은 정교하다. 3D 애니메이션이 나오면서 그림이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 진짜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세상이지만 평면의 그림을 고집하면서 선 안에 고운 빛깔로 채운 섬세한 지브리스튜디오의 그림이 좋다. 상상력을 안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를 전하는 지브리스튜디오가 좋다. 한편의 그림 동화처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해서 좋다. 마지막으로 그림의 숨결을 더욱 생생하게 불어넣는 공들인 음악이 함께 담겨 있어서 좋다.

소인, 아리에티를 만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소인이 나오는 만화, 그림, 영화가 무작정 좋았다. 티비 만화 시리즈 '아기공룡 둘리'에서 둘리가 소인이 된 장면에 혼자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영화 "애들이 줄었어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이상한 약을 먹고 줄어드는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 상상했다. 내가 만약에 소인이 된다면? 내 몸에 꼭 맞던 침대가, 의자가 엄청난 크기로 변해있는 풍경, 밥한톨이면 충분히 한끼 식사가 될 수 있는 상황, 아주 작은 개미의 등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상상 등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그 생경함이 좋았다. 소인이 된다면 익숙한 공간이 새로운 모험이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좋았다. 그래서 영화관에서 소인 아리에티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세상에 어떤 인류집단이 얼마나 살아가고 있을까?

살면서 내가 접하고 느끼고 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시공간'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믿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마루 밑 아리에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마루 밑 아리에티'에는 세가지 인류 집단이 등장한다. 대인집단, 쇼우. 대인집단의 물건을 빌려쓰는 소인집단 아리에티. 소인집단 중 원시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스필러. 쇼우는 어딘가에 소인이 살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 듣고, 어린 시절 엄마가 지내던 집에서 소인 아리에티를 만난다. 본인이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소인종이라고 믿었던 아리에티는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니는 소인집단 스필러를 만난다. 이렇듯 지구에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인류집단이 제각각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들꽃이 만발한 여름날 외할머니의 정원에서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말한다. "65억명의 인간이 이 지구에 살고 있어. 너희 종족...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결국 너하나 남고 모두 멸종할꺼야." 세상에 놀랄일 하나 없는 어른아이 쇼우이지만 쇼우의 이런 대사를 접했을 때 나는 흠짓 놀랐다. 지구에 남아 있는 최고의(?) 인류집단이라고 각자 생각하고 있는 인간의 오만한 사고를 감독은 쇼우의 입을 빌려 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쇼우의 가족은 소인들을 위해 영국에서 주문제작한 '돌하우스(doll hosse)'를 집 한 켠에 두고 언젠가 소인들에게 이 집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리에티의 존재를 알게 된 쇼우는 마루를 뜯고 대인 세계에서 빌려온 물건들로 만들어진 호밀리(엄마)의 부엌을 들어내고 돌하우스의 멋진 부엌을 가져다 놓는다. 그때 쇼우는 알고 있었을까? 마루가 갑자기 뜯기면서 발생하는 진동과 엄청난 굉음이 전했을 공포를. 일방이 일방에게 베푸는 배려가 순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러한 현상은 아리에티와 스필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이 발생한다. 새로운 집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다리를 다친 포드(아빠)는 원시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스필러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도움을 준 스필러에게 아리에티는 감사의 표현으로 차(茶)와 대인에게서 빌려온 쿠키를 빻아서 만든 빵을 권한다. 하지만 스필러는 그러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는 그의 망또 안에서 귀뚜라미 다리를 보이며 이것이면 충분하다 말한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엔딩을 생각한다. 아리에티와 쇼우의 강렬한 사랑을 상상한 누군가는 심심한 결말에 무언가 부족하다 말할 것이고, 아리에티가 쇼우의 할아버지가 주문제작한 멋진 '돌하우스'에서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누군가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극장을 나섰을 것이다. 만약 아리에티가 정말 그 '돌하우스'에서 살았다면?, 상상을 해본다. 아리에티는 호사스러운 '돌하우스'에서 사는 대신 그녀에게 몇천배, 몇만배는 더 크게 들리는 시계소리와 대인의 발자국 소리 등등을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돌하우스'에서 사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면서 살아지는(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어찌보면 심심했을 그 엔딩이 나는 소중하다. 쇼우의 가족이 소인에게 관용을 베푸는 대인이라고 하여도 그 관용은 대인의 위치에서 베푸는 관용이기에 대인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아리에티는 분명 참고 견뎌야 했을 것이다. 보리수 잎을 따다 엄마에게 선물하고 향기로운 풀로 가득히 방을 꾸미고 필요한 만큼 대인이 모르게 물건을 빌려 쓰는, 그 나름의 빛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영화의 엔딩이 나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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