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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루이 트래티냥'에 해당되는 글 1건
2013. 1. 1. 23:19

 

 

1. 영화 제목이 <라 모르(la mort)> 죽음이 아니라 <아무르(Amour)> 사랑인 이유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리고 죽음 또한 누구나가 맞이해야하는 순간이다. 영화 <아무르>는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이에 대한 영화다. 음악교사로 평생을 함께 한 안느와 조르주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고오 그림자는 그들의 일상에 짙고 검게 드리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는 과정에 대해 감정을 덧씌우지 않고 깊이 있게 바라본다. 인간이 지니는 고결함을 지키고자 안느는 최대한 애를 쓰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그것은 매일 무너진다. 무너지는 순간은 얼굴 근육의 변화, 근육의 굳음과 어눌한 말투 등 몸으로 고스란히 표현된다. 안느가 그렇게 몸으로 죽음의 과정을 말한다면 조르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의 심리를 통해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안느를 곁에서 간호하는 그를 보며 주변인들은 감탄한다. 하지만 조르주에게는 그러한 말들은 무의미할뿐이다. 그저 그들이 침묵하고, 무관심하기를 바랄뿐이다. 안느의 죽음을 직면하는 자신의 태도는 감탄할 무엇도 아니고, 안타까운 무엇도 아닌 현실이고 두려움인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함께 공유했던 이가 점점 죽어간다는 것은 그리운 버거움이고, 감당하기 힘든 상실인 것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이 과정을 장 루이 트래티냥과 에마뉘엘 리바를 통해 물기를 빼고 '고스란히' 전달한다. 물기 빠진 장면들이지만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영화 제목이 <라 모르(la mort)>, 즉 죽음이 아니라 <아무르(Amour)>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죽음을 향해간다. 함께 식사를 하다 안느는 순간 정신을 놓고, 조르주는 안느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안느는 조르주에게 부탁한다. 아니 약속하라고 한다. "앞으로는 절대 병원으로 데려가지 말라고." 안느가 악화될 수록 딸 에바는 엄마를 이대로 둘 것이냐고 따져 묻는다. 하지만 조르주는 세상의 규범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안느와 함께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다. 결국 조르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은 쉬이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안느를 떠나보낸다. 그 방식에 대해 감독은 깊이 있게 고민했고, 그들만의 규범에 대해 정당성을 덧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2. 영화를 보면서 엄마와 나에 대해 생각하다.

영화 <아무르>의 힘은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이것을 단순히 영화 속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게 한다는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지듯이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구나 늙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대해 관객들은 한 번즘 생각하게 된다. 아직 '죽음'까지는 생각이 다다르지 않더라도 늙음, 나이듦, 노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엄마 생각이 났고, 나의 노후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엄마가 아팠다. 아니 지금도 아픈 상태이다. 평생 사용한 근육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풀어준 적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사용하다보니 결국 탈이 났다. 오른손잡이인 엄마는 오른손이 고장나버려 일상생활을 할 수 없다. 혼자서 옷을 입고 벗을 수 없고, 밥을 먹을 때도 왼손으로 어설프게 밥을 뜨고 힘들게 반찬을 집는다. 엄마대신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엄마의 거동을 도우면서 속상했다. 그리고 순간순간 짜증이 치고 올라왔다. 속상함과 달리 올라오는 이 짜증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같이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기존 상태를 기억하고 엄마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몸은 마음과 달리 움직인다. 내곁에 있는 이가 내가 사랑하는 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대한다면, 그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성질을 잊어가며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짜증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감정의 또다른 표현 방식일까? (다시 생각해보니 오바스러운 해석같다. 정확히 말하면 짜증의 8할은 엄마가 아픈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가부장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나의 노후는? 나는 가난하다. 그리고 안나처럼 배우자가 없을 수도 있다. 가난한 내가 나이 들고 늙어 내 스스로를 돌보지못하는 순간이 올 때 나는 어떡하지? 평생 학생을 가르치며 매달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 연금 등으로 여든이 넘어도 사회경제적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조르주와 안나는 두 명의 간호사를 고용할 수 있고, 대신 장을 봐주고 집안 청소를 맡아하는 가정관리사를 둘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영화에 제대로 몰입하기 어려웠다.

 

3. 예술을 사유한다는 것에 대하여.

영화 속 안느와 조르주의 모습을 보면서 '참 우아하다.'라고 생각했다. 전직 음악교사였던 그들은 피아노 독주회도 가고, 새로 발간한 소설을 함께 읽고, 세계정세가 실린 신문기사를 읽어 주고, 피아노 연주를 하고, 오디오로 클래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는 그림들이 곳곳에 걸려 있고, 거실엔 책들로 가득하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그들은 우아한 삶을 살고 있었다. 품격과 격식, 격조라는 단어가 그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한 조르주와 안느를 보면서 '그들의 우아한 삶은 어디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일까?' 질문하게 되었다. 프랑스라는 국적에서? 혹은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에서? 아니면 경제적 지위에서?  이 모든 것들의 조합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감동과 동시에 예술을 사유할 수 있는 이들이 별도로 있는 것같다는 박탈감이 들었다. 가난한 이도 예술을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사유가 아닌 소비가 되어 버린 지금 가난한 이들은 예술을 향유할 수 없다. 무대에 위치한 카메라가 객석에 앉아 있는 안느와 조르주를 담는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4. 결론.

- '영화'는 자신의 위치에서 보고 해석하게 되는 것 같다.

- 2, 3번의 두려움과 박탈감을 떨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운동(movement)해야한다.

  : 그런데 요즘엔 계속 기운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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