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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9. 23:30


<혜화, 동>을 봤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하나 뱅글뱅글 돌다가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곰곰히 생각했다. 여자 주인공의 하얀 얼굴과 빨간 목도리가 인상적이었다. 열여덟살 혜화와 스물세살의 혜화는 시간이 흐른 흔적이 보이지 않아 어색했다. 혜화의 동물 병원 원장 배우 '박혁권'씨가 왠지 모르게 반갑고 친근하다. 엑스트라로 나오는 '나현'이 형의 껌씹는 장면때문에 잠시 영화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감독은 왜 엔딩크레딧에 브로컬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를 넣었을까? 뭔가 영화랑 어울리지 않는다. 감독이 개인적으로 이노래를 좋아하는 건가? 등등 단편적인 생각들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이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고, 왜 나는 영화를 보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밤이었다.

언론에서도 주변사람들이 <혜화, 동>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2011년 독립영화계 기대작이다, <혜화, 동> 꼭 봐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막연히 <혜화, 동>을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처음 영화의 제목을 보고 마로니에 근방, 혜화역 근방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나의 '상상'은 말그대로 상상이었을 뿐. <혜화, 동>의 혜화는 '지역명 혜화'가 아니라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동은 뭐지?

살아가면서 정체를 뒤흔들만큼의 경험을 하면 사람들은 그 기억을 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 경험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되고, 결국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망각의 자물쇠가 풀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 꽁꽁 봉인해두었던 기억은 와르르 쏟아져 나와 존재를 다시 뒤흔들고 만다. 아마 혜화도 그랬을 것이다. 열여덟살, 한수를 사랑했고 두 사람 사이엔 아이가 생겼다. 그 아이를 맞이하기 위해 혜화는 학교를 그만둔다. 하지만 한수는 갑자기 사라졌고, 혜화는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가 죽었다고 한다. 혜화는 그 기억을 잊기 위해 그 날 이후부터 손톱을 자르고 잘려진 손톱을 까만색 필름통에 봉인한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혜화의 마음 어딘가에 봉인된 기억은, 혜화도 모르게 혜화의 몸에게 지시를 한다. 혜화의 집에는 버려진 개들이 많다. 혜화는 버려진 개들에게 개사료를 먹이지 않고, 참치와 치킨같은 '사람이 먹는 것'을 준다. 버려진 개들을 돌보는 행위가 바로 그 기억의 지시인 것이다. 혜화의 엄마도 그러했다. 남편이 쉰이 넘어 바깥에서 여자아이를 낳아왔다. 그 여자아이를 혜화 엄마는 자신이 낳은 딸처럼 키웠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나이든 혜화의 엄마는 남편이 바깥에서 여자아이를 데리고 온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며 말한다. 봉인한 기억, 망각한 기억이라고 믿어왔는데 '완전히' 봉인하고 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한수가 5년만에 자신들의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혜화를 찾아 온다. 혜화는 아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부정하지만 아이의 얼굴이 궁금해지고, 시간을 되돌려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다. 아이를 유괴할까 생각하고 실행하려하지만 그만둔다. 봉인된 기억이 해제되는 순간부터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무모한 짓을 하는 혜화의 감정을 영화배우 유다인은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담았다. 그녀의 얼굴이 인상 깊었다.

<은하해방전선>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른 독립영화는 <혜화, 동>이 오랜만인 것같다. <혜화, 동>이라는 독립영화를 만난 것이 반갑다. 살아있는 캐릭터 혜화와 한수, 그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한 유다인과 유연석, 하고 싶은 말을 에피소드와 공간, 소품들 속에 잘 녹여낸 연출. <혜화, 동>은 마치 분류와 정리를 깔끔히 하는 어느 작가의 정돈된 책장같은 느낌의 영화이다. 그래서 민용근 감독은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고 스스로의 한계를 보지 않았을까? 민용근 감독은 아마도 <혜화, 동>에 대한 칭찬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하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여튼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배우 유다인의 다음 작품도.  

+ 배우 유다인씨의 표정과 눈이 좋았다. 덩달아 <혜화, 동>의 혜화 목소리가 좋았다. 영화를 보기 전 시놉시스를 읽으며 혜화에 대한 캐릭터를 나름 그려 보았다. 혜화의 목소리는 왠지 가련하고 건조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청춘드라마에 나올 법한 혜화의 튀는 목소리가 처음엔 살짝 어색했지만 그 목소리가 열여덟 살의 혜화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서 혜화 목소리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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