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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18코스'에 해당되는 글 1건
2011. 10. 23. 13:58

승희나무님에게.

나무님은 가을이 깊어지는 일요일 오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요?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빨래를 개고 청소기를 밀고 전 책상에 앉았어요. 청소를 하다보면 오전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내일이면 다시 월요일, 또 주말을 기다리면서 한주를 보내겠지요?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제게 '의미'로 남는 날들이기를 바래봅니다.


제주에서의 일곱째 날은 18코스를 걸었어요. 내내 서귀포시에 있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처럼 제주시에서 아침을 맞이하였답니다. 공항근처에 숙소를 잡았어요. 공항근처에 숙소를 잡았다는 것은 이제 돌아갈 시간도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오늘의 여정이 내 앞에 있으니 신발끈 단단히 묶고 길을 나서봅니다. 18코스는 다양한 매력이 담겨있는 길이었어요. 동문시장에서 시작해서 여객터미널, 사라봉입구까지는 말그대로 도심 올레였어요. 제주의 번화가, 제주의 도시길을 걸으면서 서울 어느곳을 걷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계속 이런길이 펼쳐진다면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길을 다 걷기전에는 하나의 이미지로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올레길이겠지요. 사라봉은 제주시민들이 운동삼아 산책하는 작은 오름이었어요. 오름위에 올라서니 또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어요. 푸르고 푸른 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바다위 붉은 등대, 파랑과 빨강의 대조는 강렬했어요. 사라봉과 별도봉을 지나 당시 4.3사건으로 마을 전체가 불타버려 이제는 터만 남아 있는 곤을봉 마을터에서 당시 시간 속에서 울부짖었을 사람들,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간을 단순히 4.3사건만으로 알고 그 어떤 사정도 모르는 내가 한공간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막막해하다가 지나온 시간을 알고 기억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곤을봉 마을터를 지나 화북포구, 벌낭포구를 지나자 삼양검은모래해변이 나왔어요. 검은모래해변, 백사장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검은모래해변이라는 것은 처음이었어요. 이름 그대로 검은빛이 감도는 모래들, 왜 검은 모래일까? 현무암이 잘게 다져진 해변이라 검은색일까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보며 해변가를 걸었어요. 가을, 지나가버린 여름의 기분을 재연하려는 외국인들은 수영복을 입고 조심스레 바당속으로 걸어가고 아이들은 해변에서 모래 놀이를 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바당풍경이 눈앞에 있었어요. 다시 원당봉이라는 작은 오름을 오르면 그 안에 절터가 있고 제주의 유일한 불탑인 원당사지 오층석탑이 있었어요.


올레 18코스의 묘미는 아마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옛 제주에서는 제사가 있으면 혈연가족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함께 이동하여 제사도 지내고 제사밥도 나눠먹었다고 해요. 삼양사람들이 신촌 마을 제사밥을 먹기 위해 오갔던 길을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복원한 신촌옛길을 지나면 신촌 사람들의 손길이 역력히 느껴지는 넓은 농로가 나와요. 뜨거운 볕이 내려 앉은 검은 밭에는 초록의 싱싱한 것들이 스프링쿨러에서 나오는 물을 맞으며 생기를 마음껏 뽐내고 한적한 그 길을 걸으며 그 위에 내가 있다는 충만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어요.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풍요로와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요. 농로를 걷다 어느새 다시 바당이 눈앞에 드러나 환히 인사를 하고 바당길을 걷다보면 작고 아담한 포구가 있는 마을이 나오고, 신촌포구가 있던 마을은 소박하고 정갈한 마을이었어요. 샘이 솟는 빨래터엔 아낙이 나와 손빨래를 하고, 바당이 보이는 길목엔 쪼로록 의자들이 놓여있고, 작은 집의 마당엔 여기저기에서 주워다 놓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아마 바람도 햇살도 게으름을 피우는 어느날 그곳에서 사람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게으른 수다를 나누겠지요? 신촌마을의 정겨움에 나도 그 마을 사람들이 되고 싶다고 잠시 생각을 해봤어요. 그렇게 신촌마을을 지나면 포구를 안고 있는 또다른 마을이 나오고 마을마다 제각각 마을만의 무언가가 느껴졌어요.

몇개의 마을을 지나니 어느새 동생과 나는 18코스를 다 걷고 또다른 길의 시작점 위에 있더라고요. 그간 걸었던 길 중에서 가장 길었던 산지천에서 조천까지의 길은 길이가 긴 만큼 그 안에 다양한 매력을 안고 있었어요. 그날은 다리가 힘들어 길의 끝이 나오니 참 반가왔어요. 이제 다 왔구나. 근방 고등학생 아이들이 가득한 통학버스화 된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아이들의 북적거림 안에서 졸음을 껴안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날이었어요. 

나무님, 아아 이제 올레길 여정은 끝이 났어요. 내일은 비행기가 뜨기전까지 동생이랑 나름의 올레길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제주시내 곳곳을 그냥 걸어보려고 합니다. 제주, 제주는 괜시리 여인들의 섬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내게 어딘가에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이곳을 찾고 싶어요. 긴긴 시간 속에 나를 두며 그때는 가다 멈추고 그곳이 마음에 들면 몇날며칠 그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당을 바라보고 바람을 느끼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머물고 싶어요. 그 길위에 있을 나를 상상하며 다시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고싶은 것이 없고, 목적이 없었던 삶속에 다시 이곳 제주를 찾고 싶고, 찾겠다는 바람과 목적이 생겼어요.

나무님, 나무님 덕에 길을 설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었고, 나무님 덕에 길의 매력을 담뿍 느끼고 돌아왔어요. 고마와요. 이제 이 편지를 붙일 수 있겠어요. 서울에서 곧 얼굴 볼 날을 기다려봅니다. 건강히, 평안히 지내세요. 나무님에게도 제주의 기운을 전합니다. 나무님이 제게 전해주었던 것처럼.

안녕히계세요.

이천십일년 시월 사일 제주에서의 마지막 편지,
바람이 보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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