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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16. 22:54

'시간'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기에 사람들은 그 시간이 무한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 착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르기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호소다 마모루의 영화 <늑대아이>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봤다. 두 영화의 공통된 주제는 아마도 '시간'이지 않을까?

 

<늑대아이>는 늑대인간을 만나 사랑에 빠진 하나가 그의 부재 속에서 두 아이 유키와 아메를 기르는 13년의 시간을 순서대로 차곡차곡 기록한 영화다. 반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우연히 타임리프 방법을 습득한 마코토가 며칠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는 반복의 과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 <늑대아이>에 대한 평을 보면 주로 '성장'이라는 키워드 중심으로 글이 서술된다. 시간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치열하게 그 시간에 함께 개입한 하나도 결국 성장하는 영화가 <늑대아이>이다. 감독 호소다 마모루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를 동경한다고 어느 잡지에서 말하면서 이 영화가 '성장'에 관한 영화임을 피력하고 있었다. 밭에 씨를 뿌리고 그 다음날 바로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니라사키 할아바지의 말처럼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시행착오와 기쁨, 슬픔, 괴로움, 고난 등 온갖가지의 경험이 축적된 시간의 흐름을 거치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늑대아이>에서 유키와 아메의 성장을 함축과 은유를 배제하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또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아이들의 성장이 단순히 부모와 아이라는 일대일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서술하고 있었다. 성장의 흐름 속에서 유키는 세상의 '여자아이'들이 어떻게 길러지는지를 온 몸으로 체험하며 여자답게 살아가기를 은연 중에 습득하며 결국에는 여자사람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늑대의 습성을 아메보다 적극적으로 습득하며 발휘하며 살아가던 어린 유키에게는 '늑대'와 '사람'이라는 이중의 정체성 외에도 '여성'이라는 젠더의 옷이 하나 더 있었다. 유키의 삶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젠더의 옷은 쉬이 벗어던질 수 없는 옷이었기에, 유키는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는 삶을 영화 속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아메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그 누구도 그가 '어때야 한다.'라는 특별한 강요나 요구의 제약없이 당연한 성장의 과정을 거치고 자연스럽게 늑대가 되어 숲으로 돌아간다.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유키, 늑대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아메. 그리고 두 아이로 부터 새로운 독립을 감행해야하는 하나. 영화는 그렇게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선택하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아빠 미소로 보았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보다는 이 영화를 본 아이들의 생각이 나는 더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러 온 아이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세상의 부모들이 이 영화를 더 많이 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독립'이라는 개념은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라, 부모들 또한 반드시 각오하고 거쳐하는 과정이기때문에 그 과정을 온 몸으로 겪고 지나는 하나의 모습을 세상 부모들이 보고 공감하면서 함께 '독립'을 준비하기를 아이들은 바라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그저 본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보고싶어졌고 그래서 연달아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보았다. 만약 내게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나는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릴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결과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밟지 않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순차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늑대아이>와 달리 시간의 역행과 순행을 반복하는 영화이다. 주인공 마코토는 우연히 타임리프 방법을 습득하여 10시간 넘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일상에서 겪게 되는 작은 불행들을 피해가고, 치아키의 고백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녀가 시간을 역행하면 할수록, 그녀가 피해갔던 순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결국 내가 된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살면서 분명 그런 순간이 온다. 후회되거나 혹은 맞이하고 싶지 않은,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은 그런 순간들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역행하여 그 순간을 회피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나는 그 순간을 직면해야 하는 순간을 반드시 다시 맞이하고 그 시간을 뚫고 지나가야지만 내 생이 흘러간다는 명제를 영화를 보면서 느꼈다.

 

 

'Time waits for no one' 칠판에 쓰여있는 그 말처럼 시간은 내가 바라는대로의 속도로 흘러가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역행하지도 않고, 기다려주지도 않은채 그렇게 흘러간다. 때로는 나보다 먼저 앞서 흘러가기도 한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성취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그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배운다. 산다는 것은 시간에 나를 맡기고 그 흐름의 속도에 맞춰 유영해야한다는 것을 배우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온 존재를 다해 있는 그대로 시간을 겪어야 성장한다는 그 의미를 배우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나쳐와야하는 것일까? 내가 직면해야하는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 순간 나는 마코토처럼 타임리프를 통해 다시 주말 토요일 아침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주말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다. 이렇게 말도안되는 상상력으로 나는 시간을 뚫고 월요일로 향해간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월요일로! 꺅! (-_-;)

 

+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리뷰 '삶을 연장하는 편법, <시간을 달리는 소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6875

 

+ 조조로 <늑대아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차려먹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고, 저녁을 만들어 먹고 <정글의 법칙>과 <런닝맨>을 보고 오늘 본 영화들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글을 썼다는 나의 행위에 만족하며 호소다 마모루 감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고생스럽지만 2차원의 애니메이션을 고집을 가지고 아름답게 만드는 그가 참 고마웠다. 그의 2차원 애니메이션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기에.

 

+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OST도 참 좋다. OST를 재생해둔 채로 내내 글을 썼다. :)

2010. 9. 24. 16:31
나는 왜 지브리스튜디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지브리스튜디오의 영화를 잘 모르지만 좋아한다. 나는 왜 지브리스튜디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첫째 지브리스튜디오의 그림은 정교하다. 3D 애니메이션이 나오면서 그림이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 진짜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세상이지만 평면의 그림을 고집하면서 선 안에 고운 빛깔로 채운 섬세한 지브리스튜디오의 그림이 좋다. 상상력을 안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를 전하는 지브리스튜디오가 좋다. 한편의 그림 동화처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해서 좋다. 마지막으로 그림의 숨결을 더욱 생생하게 불어넣는 공들인 음악이 함께 담겨 있어서 좋다.

소인, 아리에티를 만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소인이 나오는 만화, 그림, 영화가 무작정 좋았다. 티비 만화 시리즈 '아기공룡 둘리'에서 둘리가 소인이 된 장면에 혼자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영화 "애들이 줄었어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이상한 약을 먹고 줄어드는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 상상했다. 내가 만약에 소인이 된다면? 내 몸에 꼭 맞던 침대가, 의자가 엄청난 크기로 변해있는 풍경, 밥한톨이면 충분히 한끼 식사가 될 수 있는 상황, 아주 작은 개미의 등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상상 등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그 생경함이 좋았다. 소인이 된다면 익숙한 공간이 새로운 모험이 가능한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좋았다. 그래서 영화관에서 소인 아리에티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세상에 어떤 인류집단이 얼마나 살아가고 있을까?

살면서 내가 접하고 느끼고 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시공간'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믿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마루 밑 아리에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마루 밑 아리에티'에는 세가지 인류 집단이 등장한다. 대인집단, 쇼우. 대인집단의 물건을 빌려쓰는 소인집단 아리에티. 소인집단 중 원시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스필러. 쇼우는 어딘가에 소인이 살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해 듣고, 어린 시절 엄마가 지내던 집에서 소인 아리에티를 만난다. 본인이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소인종이라고 믿었던 아리에티는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니는 소인집단 스필러를 만난다. 이렇듯 지구에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인류집단이 제각각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들꽃이 만발한 여름날 외할머니의 정원에서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말한다. "65억명의 인간이 이 지구에 살고 있어. 너희 종족...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결국 너하나 남고 모두 멸종할꺼야." 세상에 놀랄일 하나 없는 어른아이 쇼우이지만 쇼우의 이런 대사를 접했을 때 나는 흠짓 놀랐다. 지구에 남아 있는 최고의(?) 인류집단이라고 각자 생각하고 있는 인간의 오만한 사고를 감독은 쇼우의 입을 빌려 깨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쇼우의 가족은 소인들을 위해 영국에서 주문제작한 '돌하우스(doll hosse)'를 집 한 켠에 두고 언젠가 소인들에게 이 집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리에티의 존재를 알게 된 쇼우는 마루를 뜯고 대인 세계에서 빌려온 물건들로 만들어진 호밀리(엄마)의 부엌을 들어내고 돌하우스의 멋진 부엌을 가져다 놓는다. 그때 쇼우는 알고 있었을까? 마루가 갑자기 뜯기면서 발생하는 진동과 엄청난 굉음이 전했을 공포를. 일방이 일방에게 베푸는 배려가 순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러한 현상은 아리에티와 스필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이 발생한다. 새로운 집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다리를 다친 포드(아빠)는 원시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스필러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도움을 준 스필러에게 아리에티는 감사의 표현으로 차(茶)와 대인에게서 빌려온 쿠키를 빻아서 만든 빵을 권한다. 하지만 스필러는 그러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는 그의 망또 안에서 귀뚜라미 다리를 보이며 이것이면 충분하다 말한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엔딩을 생각한다. 아리에티와 쇼우의 강렬한 사랑을 상상한 누군가는 심심한 결말에 무언가 부족하다 말할 것이고, 아리에티가 쇼우의 할아버지가 주문제작한 멋진 '돌하우스'에서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누군가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극장을 나섰을 것이다. 만약 아리에티가 정말 그 '돌하우스'에서 살았다면?, 상상을 해본다. 아리에티는 호사스러운 '돌하우스'에서 사는 대신 그녀에게 몇천배, 몇만배는 더 크게 들리는 시계소리와 대인의 발자국 소리 등등을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돌하우스'에서 사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면서 살아지는(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어찌보면 심심했을 그 엔딩이 나는 소중하다. 쇼우의 가족이 소인에게 관용을 베푸는 대인이라고 하여도 그 관용은 대인의 위치에서 베푸는 관용이기에 대인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아리에티는 분명 참고 견뎌야 했을 것이다. 보리수 잎을 따다 엄마에게 선물하고 향기로운 풀로 가득히 방을 꾸미고 필요한 만큼 대인이 모르게 물건을 빌려 쓰는, 그 나름의 빛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영화의 엔딩이 나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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