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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건
2012. 9. 7. 23:43

 

 

 

 

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

김영갑

 

나는 심술궂은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은 멀리서 씨앗들을 한 움큼씩 가져와 내게 잘 보이려 아양을 떤다.
나는 그 바람을 품에 안고 사시사철 함께 중산간 초원을 떠돈다.
제주도 사람 누구나 알고 있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꼭꼭 숨어 있는 속살을 엿보려면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이해해야한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만 보고 느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한라산이 설악산이나 지리산보다 빼어날 수 없다. 한라산의 속살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하와이나 발리, 아니 지구상의 어떤 곳보다 아름다운 낙원임을 인정할 것이다.


제주도의 역사는 바람과 싸워온 투쟁의 역사이기에 눈물과 한숨의 역사이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주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태풍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한라산은 일년 내내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크고 작은 바람은 온갖 생명에게 시련을 안겨준다. 사람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어느 하나에 진득하니 몰입하지 못하고 방방곡곡 바람처럼 떠돌았다. 내 안에서 부는 바람을 어쩌지 못해 전국을 떠돌다가 바람을 타는 섬, 제주에 정착했다. 제주의 바람에 홀려 20년동안 바람을 쫓아다녔다. 동서남북, 섬 중의 섬. 바람 지나는 길목에서 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나무처럼 풀처럼 시련을 온몸으로 견디며 세상을, 삶을 느끼려 했다. 아니 제주도를 이해하려 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시련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쳤다.


자갈밭에 시 뿌리고 거두어도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 사람들의 생명력을,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무자맥질하는 늙은 해녀들의 강한 생명력을.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헤아릴 수 없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눈 비 바람에 시다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와 풀을 지켜보며 강인한 생명력을 닮으려 했다. 야생초는 태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쓰러져 뿌리가 뽑혀도 왕성한 생명력으로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제주도의 바람은 잦으면서도 사납다. '바람 불어 휘어진 나무가 봄비가 온다고 일어나다.' '정철 바람에 쇠뿔도 휘어진다.' 제주 바람이 사납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속담들이다. 남지나에서 몰려오는 태풍과 저기압의 길목인 제주도는 바람 자는 날이 드물다.


가을부터 늦봄까지 바람의 기세가 맹위를 떨치는데 그때의 바람은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을 만큼 헝클어져 불며 동풍이 많다. 제주도가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면서도 어업이 발달하지 못한 까닭도 모두 바람 때문이다. 바람이 소나기를 데리고 온 경우엔 우산이나, 비옷, 도룡이 따위로는 막을 수가 없다. 어느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지 모를 정도로 사납기때문이다. 태풍이나 폭풍이 아니더라도 소방호소로 물을 뿌리듯 쏟아 붓는 눈비바람은, 바로 앞의 자동차 라이트도 분간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날이면 한라산도 없어지고 수평선도 지평선도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런 날씨가 어떤 때는 한 달 가까이 계속된다. 또한 안개도 끼었다 하면 며칠째 계속된다.


척박한 섬에서 바람과 싸우면서 씨 뿌려 거두고 성깔 사나운 바다에서 물질을 해도 늘 배고픔에 시달린다.
허리띠 졸라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맨땅의 불모지를 일구며 살아온 섬 토박이들의 가슴앓이는 옥토를 가꾸며 살아온 뭍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섬을 선택했다. 섬에서 무엇을 작업할 것인가, 그 문제는 살아보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 제주로 여행을 떠난 지인이 사진 편지 3장을 보내주었다. 김영갑 그는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제주의 바람을 알고자 하였고 제주 사람들의 삶을 느끼고자 하였다. 20여년이 넘는 시간, 그는 바람을 쫓아 다녔다. 지금 그는 바람이 되어 제주 중산간 어느 곳에 머물다, 바다로 나갔다 다시 중간산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살고 있겠지. 그가 있는 그곳, 제주에 가고 싶다. 그의 긴 글 중에 '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시련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쳤다.'라는 구절이 내 눈에 박힌다.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시련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는 제주 바람을 닮았다. 그는 제주를 빼다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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