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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 해당되는 글 1건
2012. 3. 26. 21:44
*
소년이 살았어요.
네.
소년의 이름은 무재.
무재씨.
네.
그건 무재 씨의 이야기인가요?
무재의 이야기라니까요. 계속할까요?
네.
소년 무재가 살았습니다. 무재의 식구들은 그림 한 점 없는 커다란 방에서 살았습니다. 식구는 아홉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고 누나가 여섯이었습니다.
여섯이나 되나요?
무재가 일곱 번째로 막내입니다.
많군요.
많은가요.
왜 그렇게 많을까요.
그건 말이죠. 하고 무재 씨가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말했다.
그게 좋았던 것 아닐까요?
그거요?
섹스.
나는 얼굴을 조금 붉힌 채로 무재 씨를 따라서 걸었다. 은교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야한가요.
하나도 야하지 않은데요.
야하지 않을까요.
야해도 좋아요.
야한게 좋나요.
야해도 좋다고요.
라고 긴장해서 말하자 무재 씨가 후후. 하고 웃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무재의 부모는 일곱 명의 자식을 낳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다.
개연이요?
필연이라고 해도 좋고요.
빚을 지는 것이 어째서 필연이 되나요?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글쎄요. 하고 무재 씨가 나무뿌리를 잡고 비탈을 내려가느라 잠시 말을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腹)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공산품이 나쁜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렇군요.
어쨌든 소년 무재의 부모가 빚을 집니다.
네.
이 경우엔 다른 사람의 종이에 이름을 적어 준 대가로 얻은 빚입니다. 빚의 규모가 너무 커서 빚보다는 빚의 이자를 갚느라고 힘든 노동을 하는 와중에 아홉 식구의 생활비도 버는 생활을 하다가 소년 무재의 아버지의 그림자가 끝끝내 일어서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 황정은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중

+ 황정은씨의 소설 <百의 그림자>를 읽다보면 긴 산문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귀한 소설. 소설을 읽던 중 이 구절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빚' 빚지며 사는 인생, 그래서 야해할 도리를 하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내 곁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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