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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산'에 해당되는 글 1건
2012. 12. 30. 01:16

 

 

 

 

 

 

 

강원도 홍천 수타사에 다녀왔다. 지인이 겨울 여행을 제안했다. 올 초, 겨울에도 지인과 함께 전주에 있는 귀신사에 다녀왔다. 지인이 주로 제안하는 여행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박한 산사이다. 지인의 안목을 믿기에 이번 여행도 기쁜 마음으로 동행하였다. 내게 종종 이런 여행을 제안해주는 지인이 참 고맙다. 이 자리를 빌어 한 마디를 전한다. "고맙습니다. 헤헤." 

 

수타사는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십 분 가량 달려, 홍천터미널에서 다시 한 번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있는 곳이다. 겨울 산사의 매력은 인적이 드물다는 것이다. 하얗게 눈이 내린 길에는 오고가는 차도 별로 없고, 사람도 없다.

 

수타사 입구에 도착해서 꽤 큰 계곡을 끼고 뽀드득, 뽀드득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꽁꽁 언 수면 위로 하얀 눈이 쌓이고 그 눈길 위로 어떤 동물의 발자국이 보인다. 수타사 입구에서 수타사까지는 약 400m의 거리, 바로 수타사로 가지 않고 수타사는 조금 아껴두었다가 약수봉으로 오르는 산길을 먼저 들어선다. 눈이 내린 산길, 눈 아래에는 가을 낙옆이 폭신하게 쌓여있다. 낙엽 위 눈, 발걸음이 더욱 포근해진다. 

 

야산엔 아무도 없었다. 지인과 나 그렇게 둘. 새소리가 조용히 들렸고, 경쾌하게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만이 있다. 문득 길을 걷던 지인이 묻는다. "바람, 내가 사람으로 보여요? 사람이 아닐지도 유령일지도 몰라요." 지인의 그 농담이 재밌다. 시시한 농담에 흐흐흐 웃는다. 산 속엔 안개 냄새가, 눈 냄새가 가득하다. 나무 위에 소복히 쌓인 눈에 혀를 살짝 가져댄다. 시원하다. 눈에서 나무 맛이 난다. '아, 나무맛이란게 이런 맛이겠구나.' 싶다.

 

산길에 씨네21 송년호와 신년호를 엉덩이에 나란히 깔고 앉아 따끈한 차 한 잔 마시며, 맛밤도 먹고, 훈제계란도 까먹고, 귤도 하나 까먹고, 달달한 영양갱도 먹는다. 지인의 간식 고르는 솜씨가 최고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걷는다. 오랜만에 자연 안에 나를 둔다. 자연이 가지는 힘은 위대하다. 기형도 시인은 그의 시작 메모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나또한 믿는다.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수타사를 품고 있는 공작산에는 소나무가 많다. 초록의 소나무 잎마다 하얀 눈이 쌓인 것이 아니라 산을 오르고 내리는 안개때문에 하얗게 '물'이 물들어 있다. 짙은 녹색이 아닌 에메럴드 빛을 하고 있는 솔잎이 신기해 몇 번을 올려다 본다. 여전히도 산길은 고요하고, 산새 소리만 가득하고, 저멀리 마을의 소리가 유령처럼 들린다.

 

거북이처럼, 혹은 달팽이처럼 산길을 오르면서 지인과 모임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작당을 한다. 모임 이름은 민우회 유령소모임 '느림보산악회' 산악회의 원칙은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아주 느리게 걷기때문에 길 위에 있는 들풀, 나무의 생김새 하나하나 눈에 오롯히 담을 수 있다. 또 아주 느리게 걷기때문에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산길을 올라도 절대 숨이 차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아주 느리게 걷기때문에 칼로리 소모가 되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중심으로 '느림보산악회'를 운영해보기로 한다. 지인은 '느림보산악회' 프로그래머이고, 나는 '느림보산악회' 집행위원장이다. 프로그래머는 산행 일정과 산행지를 정하고 나는 사람을 조직하기로 한다. 새해 1월에 서울 근교 산행을 시작으로 봄에는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로 한다.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가 제멋대로 '느림보산악회' 멤바를 본인 동의도 구하지 않고 구성해본다. 누구는 이래서 좋고, 또 누구는 저래서 좋고 깔깔깔 재미지다.

 

아마 약수봉 근처에 거의 다달아서 산행을 멈춘다. 산아래를 내려다보며, 저 멀리 지인과 내가 걸었던 길을 내려다보며 겨울산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지인이 가곡 한곡을 부른다.

 

기약없이 떠나가신

그대를 그리며

먼 산위에 흰 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오시나

오늘도 해는 서산에 걸려 노을만 붉게 타네

 

귀뚜라미 우는 밤에

언덕을 오르면

초생달도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운다

아, 돌아오라

아, 못오시나

이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 길 달려 가네

(그리움 조두남 작곡, 고진숙 시)

 

멋진 곡에 멋진 목소리에 답가를 해야하는데 가사를 아는 노래가 없고, 노래솜씨도 영 꽝이여서 답가를 부르지 못한다. 나도 멋진 가곡 한곡 외워 언젠가 산에서 답가를 정성스레 불러봐야겠다. 노랫말이 애련하다. 노래 한곡을 끝으로 산길을 내려온다. 눈길에 미끄러지지않기 위해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산길을 걸을때마다 다짐하게 되는 것이 있다. '오만해지지말자. 자연 그 존재에 경외심을 가지자. 그 존재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다.'

 

무사히 길을 내려와 수타사에 방문한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산사에는 겨울날 오고가는 이들을 위해 나무향과 생강향이 그윽한 뜨근한 마가목차와 쫄깃하고 단 약과가 준비되어 있다. 수타사에 계시는 분들의 살뜰함에 감동받으며 감사히 차와 약과를 먹는다. 그렇게 여행이 마무리되어 간다. 산사 근처 식당에서 만두국과 감자전에 동동주 한잔을 마시고 나오니 눈이 반짝반짝 이쁘게도 내린다. 고요하게도 내린다. 빈집인듯한 집의 처마 아래에서 내리는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린다. 홍천 산사 사람들의 발이 되는 시골버스는 온기를 품고 어둠이 내려앉은 시골길을 달린다. 버스에 몸을 싣고 노곤함에 꾸벅꾸벅 존다. 그렇게 2012년의 마지막 여행이 될 듯한, 강원도 홍천 수타사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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