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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1. 00:0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관한 글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글을 시작하고 어떤 내용으로 글을 써야할지 몰라 며칠째 머릿속으로 영화 장면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홍상수 감독의 전작 <밤과 낮>,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를 다시 보았다. 연필을 들고 노트에 영화의 흐름을 쭉 한 번 적어보았다. 해원의 세 편의 일기가 영화의 주된 축이다. 3월 21일 해원의 엄마가 캐나다로 떠났다. 한식당에서 엄마를 기다리다가 해원은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해원은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 샬롯갱스부르의 엄마 제인버킨을 만난다. 해원은 평소에 좋아하던 배우의 엄마를 직접 만나게 되어 미쳐버릴 지경이다. 소리를 지르고, 흥분되어 몸을 마구 흔들어 댄다. 그리고 말한다. 샬롯갱스부르와 같은 배우가 된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고. 그리고 그녀는 "트루아티스트"라고 제인버킨에게 말한다. 해원역의 정은채는 실제로 샬롯갱스부르를 좋아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배우의 엄마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촬영 현장에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홍감독은 우연을 놓치지 않고 그의 영화 속에 담았다. 그리고 제인버킨은 해원(정은채)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 딸을 많이 닮았어요." 배우 정은채는 실제로도 샬롯갱스부르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였다. 현실이 픽션이 되는 순간을 홍상수는 영화에 담고 그것을 꿈이라고 명하였다.

 

현실계와 환상계의 중간영역을 그는 영화계라고 말한다

현실의 축이 있다. 그리고 환상의 축이 있다. 이 두 축은 별개의 세계이지만 두개의 축이 교집합되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하게 된다. 이를 경험하였을 때 우리는 이것을 현실이라고 해야할지, 환상이라고 해야할지, 어안이 벙벙하여 그저 묘하다고 표현할 뿐이다. 이런 모호한 영역을 홍상수 감독은 꿈이라고 명명하고, 그는 그것을 필름에 담았다. 나는 이것을 홍상수 감독의 영화계라고 표현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축과 환상의 축을 오고가기 위해 활용하는 장치가 있다. 일단 그는 공간을 빌어 현실과 환상이 교집합되는 영화계를 구축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가짜 공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통영, 제주도, 신두리, 아차산, 모항, 북촌과 서촌, 아차산과 남한산성 등과 같이 진짜 장소에서 영화를 찍고 명확한 지명을 영화 속 배우들이 언급하도록 한다. 그리고 명확한 장소의 명명과 더불어 그 장소에 위치한 구체적 공간을 영화 속에 그대로 등장시킨다. 그가게, 유명장, 사직공원, 아차산 휴게소, 다정, 소설 등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공간, 홍상수 주변의 사람들이 주로 향유하는 공간을 영화 속에 그대로 등장 시킨다. 그 공간은 현실계이다. 홍상수 감독은 현실 공간을 토대로 깔고 그 위에 이야기를 쌓는다. 토요일 오후 광화문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고 서촌까지 걸었다. 해원의 엄마가 다녔던 학교와 해원과 엄마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던 찻집을 지나고, 그가게 앞에서 기웃거려 보았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가짜 인물이고 그 이야기도 가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고갔던 머물렀던 공간은 진짜로 존재한다. 그 지역에 내가 서 있었을 때 나는 현실계와 환상계의 중간영역인 영화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이야기이지만 이야기는 현실 공간을 빌어 전개된다. 홍상수 감독은 진짜 공간 위에 만들어진 가짜 이야기에 현실계의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였을 것이다. 현실계와 환상계의 통로로 홍상수 감독은 영화계를 구축하였고, 그 공간을 아는 이들이은 그곳을 통해 현실계와 환상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아는 이들만이 오고갈 수 있는 암호같은 비밀의 통로를 만든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서촌을 산책할 때 환상계에 초대된 유령이 된 것처럼 나는 유유히 서촌을 어슬렁 거렸다. 

 

진화하는 홍상수 감독 영화 속 그녀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는 내내 긴장감에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특별히 긴장이 될만한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영화 속에 잠식되어 있는 불안의 공기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왜 그토록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경직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해원의 대사가 대답이 되었다. "외롭고 슬프다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해원은 이십대이다. 함께 살고 있는 이가 없다. 엄마는 캐나다로 떠나버렸다. 학교는 재미없다. 학교에서 무언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해원은 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삶의 섭리를 스스로 통달하고 있다. 해원은 튼튼하다. 해원은 스스로 생각해도 본인이 너무 튼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원은 외롭다. 그리고 슬프다. 외롭고 슬퍼서 옛 애인인 성준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성준은 해원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아니다. 성준은 애인이(었)지만 해원과 영혼을 교감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해원과 성준은 술집에서 학교 동기들을 만나고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된다. 성준은 해원과의 관계가 탄로날까봐 조마조마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가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해원은 그 긴장을 깨고 일어난다. "오늘 엄마가 캐나다로 떠났어. 내가 슬퍼서 선생님을 불렀거든. 그게 진실이라고. 믿던 안믿던. 거짓말해서 미안해." 이렇게 해원의 첫번째 일기가 끝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해원의 뒤로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흘러 나온다. 해원의 슬픈 마음을 음악이 대신하여 말한다.

해원의 두번째 일기는 성준과 남한산성을 찾아간 이야기로 시작된다. 늦은 오후 햇살이 나즈막이 내려앉는 시간, 해원과 성준은 남한산성의 고건물 계단에 나란히 앉아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을 카세트로 함께 듣는다. 그때 성준은 말한다. "우리 오래 보자. 우리 잘 살자."라고 말한다. 그 말에 해원도 평온한 얼굴이다. 곧이어 성준은 말한다. "정신바짝 차리고 우리 들키지 않도록 잘하자." 그 말에 해원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해원은 받아친다.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결국 다 알아요. 다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에요. 다 죽으면 돼요." 성준은 일차적이고 거짓말을 만드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해원은 복잡다단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그렇기때문에 해원은 성준을 사랑하지만 외롭고 슬프다. 그러다가 산다는 것 자체가 무서워지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해원은 솔직하다. 튼튼하다. 하지만 불안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진화하고 있다.    

 

해원의 세번째 일기에 관하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세번째 일기는 해원의 긴 꿈에 관한 일기이다. 해원은 학교 도서관에서 잠이 든다. 꿈 속에서 해원은 친구 유람이에게 이 감독과의 관계에 대해 다 털어 놓는다. 하지만 꿈이다. 해원은 꿈에서 깨어 "미친년. 미친년"이라며 자기를 질책한다. 해원은 그것이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교를 나와 해원은 혼자 서촌을 산책한다. 서촌을 산책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대학교수를 우연히 만난다. 대학교수는 용기를 내어 해원에게 차 한잔 함께 할 것을 권한다. 해원은 흔쾌히 그와 대화를 나눈다. 대학교수는 해원에 대해 말한다. "해원씨는 알고 싶어해요. 자기가 누군지. 절대적 진실을 해원씨는 사람들을 만나고 직접 부닥치면서 채워나가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대학교수는 독특하다. 마틴스콜세지와 아주 절친한 듯하고, 염동력으로 택시를 부른다. 해원은 그 장면을 신기해하며 그와 헤어진다. 이후 해원은 남한산성에서 친한 언니를 만난다. 언니와 언니의 애인, 해원은 안개로 가득한 길을 걷는다. 안개로 가득한 풍경은 마치 비현실적이다. 해원은 그곳에서 성준을 만나고 그에게 하고팠던 말들을 시원하게 내뱉는다. "선생님은 왜 원하는대로 다 하려고 하세요. 왜 다하려고만 해요. 선생님이 잘못됐어요." 그렇게 성준과 헤어진 해원은 전에 걷지 못했던 남한산성의 길 끝까지 걷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친절한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에게 두 잔의 막걸리를 얻어 마신다. 어떤 질문도 없이, 술을 청하는 해원에게 그는 그저 술을 따라 줄뿐이다. 해원은 그의 배려에 위로를 느낀다. 그리고 친절한 아저씨는 길을 걷다 성준을 만나고 그에게 질문한다. "남한산성 좋았습니까?" 그는 답한다. "네 좋았습니다." 성준은 거짓말을 한다. 해원과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좋았을리가 없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또 홀로 남아 운다. 해원은 울고 있는 성준을 발견하고 그를 위로한다. "조금만 기다려요. 괜찮아질거에요." 순간 장면은 바뀌어 학교 도서관 책상에 엎드려 잠든 해원을 비춘다. 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꿈에 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같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꿈 속의 해원이 꿈 안에서 깨어 다시 꿈을 꾼 해원의 긴 꿈에 관한 것이다. 해원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가 아니라 꿈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관객에게 이것이 꿈이라는 장치를 틈틈이 전달하고 있었다. 마틴스콜세지와 염동력, 하고픈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해원, 안개로 가득했던 풍경이 그러한 것이다. 해원의 세번째 일기에 관하여 많은 이들이 허탈해 했다. 꿈이었어? 왜 굳이 모든 이야기를 꿈으로 시작하여 꿈으로 매듭지은 거지? 홍상수 감독은 마지막 이야기를 쓸 때 어떤 심정이었던 걸까? 어쩌면 홍상수 감독에게 그것이 꿈이든 진짜 이야기이든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해원이 느끼는 감정들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그런 장치를 활용한 것이지 않을까? 해원은 꿈속에서 자유롭다. 친구에게 솔직하게 성준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는다. 미국에서 온 대학교수와 결혼을 해볼까 상상을 하며, 연주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준에게도 담아두었던 말들을 다 한다. 담아두었던 말, 하지못했던 말을 해원은 꿈을 빌어서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홍상수 감독은 해원이 감정을 원없이 풀 수 있도록 그녀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꿈이다. 해원은 깨어나서 생각했을 것이다. '아, 꿈이었구나. 하지못한 말들, 하고 싶은 말들은 아직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구나.' 그래서 해원은 외롭고 슬프다가 갑자기 무서워졌을 것이다.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까?"라고 해원은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녀는 예상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런 상태는 지속되고 반복되겠지." 그래서 해원은 무서웠을 것이다. 외롭고 슬픈, 그리고 무서운 삶의 길 위에서 말없이 술 한잔을 따라주던 그 아저씨가 해원은 더더욱 생각났을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녀의 일기는 "꿈에서 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같았다."라고 끝난것이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짓는 실력은 기가 막힌다. 이런 제목은 그의 사유에 기인한다. 영화 속 대사도 정말 죽인다.

+ 영화를 보고 나는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비교하였고, <다른 나라에서>가 더 좋은 영화라고 떠들고 다녔다. 오늘 <다른 나라에서>를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본 후 그 영화는 여전히도 좋은 영화라고 또 생각하였고,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별개의 영화라는 것을 확인하였고, 그리하여 <다른 나라에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각각 너무나도 좋은 영화라고 결론지었다.

+ 해원과 엄마의 관계도 재미있었다. 이 둘의 관계는 현실세계의 모녀의 관계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매력있었고 이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고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홍상수 감독의 차기작인 <우리 선희>라는 영화도 기대된다.

+ 못 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썼다. 썼다는 것에 일단은 의미를 두려고 한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